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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림 Oct 25. 2024

잔혹한 이동 경관

김숨 「막차」

06편 연속


07. 잔혹한 이동 경관  

   

  1960년대 전후는 인문계열보다 상고가 인기가 좋았다. 상고를 졸업한 남편은 마음만 먹으면 취업이 가능한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담을 치고 아내에게 생계를 떠맡긴 채 살아왔다. 순옥에게 기댄 삶은 아들 상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훈은 성인이 된 후에도 대학 등록금은 물론 졸업 후 외지로 나가 생활하는 제반 비용을 어머니 순옥에게 의지한다. 결혼 비용과 신혼집 전세금, 빌라 매입, 아내의 병원비도 어머니의 도움을 받는다. 남편과 아들은 순옥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가족 간의 착취구조는 아무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행된다. 심지어 남편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빚 받는 일마저도 순옥에게 떠넘긴다. 순옥은 남편 친구가 죽자, 그의 아내가 일하는 식당으로 찾아가 기어이 돈을 받아낸다. 남편은 그런 순옥에게 벌을 받을 것이라고 악담까지 퍼붓는다. 오직 가족을 위해 억척같은 삶을 살아왔으나 순옥은 남편이나 아들, 며느리에게까지 속물 취급을 받는다. 

  순옥 가족의 관계 균열은 필요한 만큼 충족될 수 없는 물질적 욕망에 있다. 이들 가족의 물질적 욕망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족의 입성을 해결하고 집 한 채 품고 사는 삶, 몸이 아플 때 필요한 최소한의 치료비가 전부다. 순옥 가족의 욕망은 소박하다 못해 처절한 욕망이다. 순옥 부부는 지방에서 미용실에 달린 살림집에서 기거하는 형편이고 아들 상훈은 재개발을 꿈꾸며 서울 변두리에 15평 빌라를 매수해 거주해 왔다. 순옥 가족은 그때가 호시절이었다. 며느리의 암 진단으로 가족의 소박한 유토피아는 단숨에 허물어진다. 

  순옥이 한 달에 오만 원씩 부어오던 이 년짜리 정기적금도 며느리의 병원비로 들어간다. 순옥에게는 미래 희망이었던 적금을 내주었지만, 며느리는 고맙다는 전화 한 통 없고 아들 상훈은 서운한 내색을 감추지 않는다. 미용실이라도 팔아서 병원비를 대달라는 상훈의 요구를 순옥이 거절하면서 모자 관계는 틀어진다. “세탁기 안에서 악다구니 쓰듯 뒤엉킨 채 큼큼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갈”(22쪽) 수건이 순옥 가족 관계의 현재다. 가족에 속물 취급을 받는 순옥, 속물 취급을 하면서도 돈을 요구하는 가족, 이는 물질이 가진 불편부당한 양면성이다. 순옥은 가망 없는 며느리를 위해 가족의 생계 수단인 미용실을 팔아 병원비를 대주지 못한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우리는 그저 죄인처럼 죽은 듯이 있다가 내려오자구요.”, “죽은 듯이요.(24쪽), “피 한방울 안 섞였다지만 그애가 그렇게 된 게 내 탓인지도 모르지요. 내 탓인지도요…”(39쪽) 순옥은 가족에게 봉사하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위치에 선다. 그녀는 며느리의 질병마저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아내에게 생계 전반을 떠맡기고 살아온 남편은 오히려 태연한 듯이 보인다. 

  순옥에게 무능하고 무심한 남편이 달가운 존재일 리 없다. 순옥 부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있으나 남남과 같다. 부부의 소통 부재는 이동 여정에서도 드러난다. 남편은 고속버스에 올라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눈을 질끈 감았고 순옥이 무슨 말을 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멀어도 어지간히 멀어야지요. 어지간히…”(9쪽) 이러한 진술은 순옥 부부의 거주지에서 아들이 거주하는 서울까지의 거리를 뜻하지만, 심층적으로는 부부 관계의 거리를 뜻한다. 순옥과 나란히 앉은 남편은 고속버스가 두 시간여를 달리는 사이 눈 한번 뜨지 않았다.     

“갈 때가 되면 그렇게 급하게 가더라고요. 하기는 반년을 더 산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아니겠어요?” (12-13쪽)     

“백만원을 해다준 게 언제였어요?” (…)

“우리가 백만원을 해다준 게요.” (15쪽)     

“설사 미장원을 내놓아 살려놓는다 쳐요. 지들이 우리를 죽을 때까지 먹여 살리기나 할 거래요?” (18쪽)     

“벌써 대전은 지났을 테지요?” (37쪽)     


  부부의 대화는 단절되었고 순옥은 연극무대에서 배우가 독백하듯 저 혼자 중얼거리는 모양새다.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같은 방향으로 내달리며 살아왔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냉담하다. 그녀는 신문이나 방송에도 귀를 닫고 사는 남편을 ‘흑싸리 깝데기’같은 인간으로 인식하고 살아왔다. 남편 또한 그녀를 무시하긴 마찬가지다. 버스가 두 시간을 달리 내내 단절된 대화는 그들이 살아온 삶 전반을 반추한다. 

  남편은 순옥뿐 아니라 세상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한 번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사회의 부적응자, 은둔형 외톨이로 산 그는 사회적으로 매장된 존재다. 산 사람이 아닌 인물로 각색된 남편은 완고한 부동성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반면 서사의 대부분이 순옥의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순옥은 움직이는 캐릭터, 즉 유동적 주체가 된다. 부동성과 이동성은 상충하는 개념이다. 포괄적으로 「막차」의 부동성은 가족 간의 소통 부재, 개인과 사회의 불통, 죽음(생명 상실)으로 요약된다. 순옥과 남편은 삶과 죽음이라는 상대성의 개념을 갖는다. 


08편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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