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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림 Oct 25. 2024

사이 공간에 움직이는 죽음의 벡터들

김숨 「막차」

07편 연속

   

  고속버스는 ‘사이 공간’이다. 사이 공간은 억압과 단절, 통제 등의 부동성을 갖는다. 부동성은 움직임이 멈춘 상태, 육체적 죽음을 아우른다. 「막차」는 이동 여정에 다수의 죽음을 배치하고 있다. 첫째, 며느리는 임종 상태로 살아날 가망이 없다. 둘째,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한 채 낙태 당한 손주다. 셋째, 남편 친구의 죽음이다. 그는 여러 차례 사업에 실패하고 순옥에게 돈까지 빌려 재기를 꿈꾸었으나 거듭되는 실패로 술을 마시고 도로에 누워있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넷째, 순옥의 꿈에 나타난 친정어머니와 당숙모도 망자다. 

  이들의 죽음 이면에는 가난이라는 그늘이 있다. 셋째를 키울 능력이 없는 아들 부부는 서둘러 아이를 낙태시킨다. 남편 친구 또한 경제적 어려움이 죽음의 빌미가 되었다. 암에 걸린 며느리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다. 이러한 사례는 다수의 서민이 직면한 현실로 물질이 사람의 생사에도 관여하는 정황이다. 따라서 소설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경제적 약자의 고통스러운 삶이 촉발한 죽음의 문제를 부각하고 있다. 

  소설의 표제인 막차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뜻한다. 노년기에 접어든 순옥 부부는 막차에 올라 삶의 종착지를 향해 내달리는 중이다. 소설에서 고속버스는 순옥 부부와 함께 이동의 주체가 되어 움직인다. 인간과 기계의 혼종적 아상블라주는 새로운 이동 경관을 창출한다. 순옥은 “콜타르를 바른 듯 검게 번들거리는 차창에서 남편의 얼굴을 찾았다.”, “남편의 옆얼굴은 물속에 묵직이 가라앉은 돌덩이처럼 붓고 일그러져 보였다. 뭉텅한 턱 밑으로 손을 들이밀고 들추면 이끼 뭉치 같은 다슬기가 두엇 달라붙어 있을 것 같았다.” (10쪽) 콜타르, 돌덩이, 다슬기는 죽음과 동일체다. “남편의 두 눈은 그러나 시침질을 해놓은 듯 고집스럽게 감겨 있었다.”(20쪽) “남편의 두 눈과 입은 이미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었다.” (35쪽) 순옥은 알루미늄포일을 구기는 소리에 뒤를 본다. “빈 의자들 너머 배죽이 튀어나온 검은 머리”(10쪽)를 본다. 의자들에 가려 얼굴과 몸이 전혀 보이지 않아 가발을 걸쳐 놓은 듯하다. 이는 죽은 자를 연상케 한다. 순옥의 눈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산 자의 형상이 아니다. 사이 공간에 함몰된 그녀의 의식에는 죽음의 벡터들이 움직인다. 이제 고속버스는 기계의 물리적 속성을 넘어 죽음의 메신저가 된다. 

     

흔들리는 차창에 떠올라 희미해졌다 또렷해졌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남편의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에서, 그녀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37쪽)     


  공간은 행위자의 체험과 주체의 특정 견해에 따라 의미 체계가 달라진다. 순옥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눈을 감고 있는 남편의 얼굴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다. 자신과 나란히 앉아 있으나 남편은 부재중인 사람이나 다름없다. 순옥이 묻는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남편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동 공간에 내재한 기계 본성은 인간의 불안한 내면 심리를 추동하고 이질적인 세계를 재현한다. 부부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서 각자 다른 세계에서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순옥의 의식적 기제를 통해 고속버스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간단없이 허물어 버린다.     

 

히터를 한껏 틀어 고속버스 안 공기는 덥고 건조했다. 아직 2월 중순이라 히터를 끄면 손발이 금세 시려올 것이었다. 눅눅한 걸레 냄새와 쉬어터진 김밥 냄새, 지려진 어묵 국물 냄새가 뒤섞여 떠돌아 그녀는 벌써부터 멀미가 났다. (...)

그녀는 의자 등받이가 박제 거북의 등딱지처럼 딱딱해 영 불편했다. 어딘가 어긋난 관철처럼 헐거워졌는지 의자는 그녀가 뒤척거릴 때마다 끼익,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다고 촐싹 다른 의자로 바꾸어 앉아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 앞뒤로 빈 의자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별반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일반인데다 오래된 고속버스였다. 그렇지 않아도 고속버스는 탈수 중인 세탁기처럼 흔들림이 심했다. (9-10쪽)     


  고속버스의 환경묘사는 순옥의 불편한 심리와 맞물린다. 건조한 공기와 시린 발, 불쾌한 냄새가 뒤섞여 그녀는 멀미가 난다. 멀미는 버스에 오르면서부터 육체적 고통이 시작되리라는 암시다. 버스의 이동성은 삶의 흐름이다. 멀미는 존재자가 대면하는 현실적 난제다. 관절처럼 헐거워진 의자, 그녀가 뒤척일 때 비명을 내지르는 의자는 순옥의 몸으로 치환된다. 오래된 고속버스는 노년기에 접어든 순옥 부부의 육체를 연상케 한다. 탈수 중인 세탁기처럼 흔들리는 버스는 임종이 임박한 며느리의 목숨을 움켜쥔 듯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고속버스는 가족의 요동치는 일상을 비춘다.

  버스 실내가 정전인가 싶게 침침해지더니 환하게 켜져 있던 조명들이 일제히 점멸한다. 고대, 중세,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담론을 지배해 온 빛은 어둠과 대극점에서 맞물린다. 빛은 생명을 어둠은 죽음의 상징성을 갖는다. 빛이 사라진 버스 실내는 혼돈 상태다. 흡사 죽음을 암시하듯 어둠에 묻힌 버스의 실내 환경은 음산하다. “며칠 전에 통화할 때만 해도 반년은 더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반년은요.”(11쪽) 순옥은 며느리의 임종을 지금 여기의 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버스 내부의 어둠을 밀어내려는 듯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들의 전화가 걸려 온 시간을 유추하며 혹여 그사이 불길한 소식이라도 당도했는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며느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시점을 떠올리다 반년 더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회의감에 빠진다. 며느리의 삶은 살아있어도 고통의 연장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며느리를 지키고 싶은 의지를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안방에 불을 켜둔다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그녀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 고속버스 안 공기가 더워서인지 아까부터 스카프가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13쪽)     


  순옥은 전등을 켜두지 않고 집을 나온 자신을 질책한다. 그녀는 전등을 켜는 행위를 통해 가족에게 다가오는 위험에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짓뭉개듯이 현실은 목을 죄어온다. 목에 두른 스카프를 푸는 순옥의 행위가 삶의 긍정형이라면 고속버스 실내의 열악한 환경은 그녀의 목을 조여오는 실체로 대두된다. 젊은 며느리의 죽음이라는 부당한 환경 세계에서 가족을 지켜내려는 순옥의 의지와 무관하게 버스(현실 세계)는 거침없이 어둠 속을 질주한다. 목을 조여오는 스카프를 푸는 그녀,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긍정적 태도가 가족을 지키며 살아온 단 하나의 힘이었지만, 죽음만큼의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이다.      


09편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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