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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림 Oct 25. 2024

거친 일상으로 질주

김숨 「막차」

    

  현대는 고-모빌리티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 지구를 하나의 네트워크 체계에 편입한 이동 매체와 지리적 활동 범위를 넓힌 교통수단의 역할로 인해 ‘이동’은 단순한 움직임을 넘어 현대인의 사회적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인식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김숨 작가는 70여 편의 작품을 통해 서민들의 곤궁한 삶을 재현해 왔다. 특히 이동 공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흔들리는 약자들의 실존 삶을 기계적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있어 흥미롭다. 교통수단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인간과 기계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인간과 사물의 동일체 의식은 예술적 감응을 넘어 AI와 공존 시대, 새로운 사유 확장의 논거가 될 것이다. 

  「막차」는 가족의 일상사를 모티브로 모빌리티 수행 과정을 재현한 작품이다. 소설은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죽음을 모티브로 천변만화 같지만, 알고 보면 제자리를 돌고 도는 인생 여정을 다룬다. 서사는 부부가 고속버스에 탑승하면서 시작된다. 소설 장르는 사회 계층의 구체적 현실로 부각 되는 인간관계의 불합리한 조건과 그 이면에 내재한 문제들을 형상화하는 장르다. 「막차」는 개인 가족사를 다루고 있으나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화자 순옥 부부는 아들로부터 며느리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순옥은 기우뚱 가라앉는 배에서 뛰어내리듯 외출을 서둘렀고 남편은 경황없는 와중에도 바지를 다림질하고 손수건까지 다려 외투 주머니에 챙겨 넣고서 집을 나선다. 순옥은 남편의 행위가 눈에 거슬렸으나 굳이 탓하지는 않는다.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결혼까지 했을 정도의 시간을 함께 사는 동안 익숙하게 겪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코드는 뺏대요? 코드를 빼두는 거랑 꽂아두는 거랑 전기세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밥솥 코드는 뺐던가. 하루 이틀 비울 것도 아니고, 집을 나서기 전에 두루 둘러보지 않은 게 그녀는 뒤늦게 후회되었다. (13쪽)     

“어제오늘 손님이 달랑 한명뿐이었다고요. 그것도 파마 손님이 아니라 염색 손님요. 그깟 염색을 해주고 얼마나 받는다고. 자반 한 손 사고, 달래 한묶음 사니까 그 돈이 다 날아갑디다.” (「막차」 본문, 19쪽)     


  순옥 가족이 처한 현실은 전기 요금이라도 아껴야 할 만큼 곤궁하다. 남편은 자신의 입성만 챙기는 무능한 캐릭터로 아내 순옥에게 생계를 의지하여 삶을 지탱해 왔다. 그동안 남성은 합리적이고 강인하며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이 처해있는 일련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주체로 여겨져 왔다. 반면 여성은 감정적이고 연약하며 보호가 필요한 순종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막차」의 화자 순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며 남편은 무위도식한다. 이러한 구조는 전통적인 성 역할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여주며 가부장제의 변화를 아우른다. 

  순옥은 아들을 낳고 일 년쯤 지나 익힌 미용 기술로 동네 미용실을 차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미용실 수입은 가족의 생계유지 정도는 되었으나 예측불허의 위험, 즉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지출은 감당하기에 어려웠다. 가난은 일평생 순옥 가족을 따라다녔고 그 흔한 자가용 한 대 없어 부부는 며느리 임종 소식을 듣고 고속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내일 미선 엄마가 머리 좀 해달라고 했는데…”, “못 받아도 이만 오천 원은 받을 텐데.” (10쪽) 당장 가족의 생활비와 며느리의 병원비까지 책임져야 하는 현실이 순옥이 짊어진 짐이며 풀어야 할 과제다. 죽음 앞에서 삶은 한층 진지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며느리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고 순옥은 놓친 손님을 아쉬워한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 삶에 근거한 것으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그녀를 모질고 야박한 인물로 몰아간다.   

   

“그애까지 낳았으면 정말 어쩔 뻔했어요.” 

그녀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토한 말이었다.

“며느리가 왜… 셋째를 가졌었잖아요.” (27쪽)     

상훈이만 죽어나는 거지. 혹이 셋이나 딸린 홀아비한테 누가 시집을 온다 하겠어요. 버젓하고 안정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29쪽)     


  순옥은 셋째 손주 태몽을 꾸었고 아들 손주라는 확신이 있었던 터였다. 당시 상의 없이 낙태한 며느리가 야속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아들 상훈은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영업직으로 전전하며 순옥에게 도움을 받아 겨우 생계를 꾸려간다. 두 딸 양육도 버거운 현실에서 셋째 출산은 무리였을 것이다. 순옥이 며느리의 맞벌이를 원한 것도 아들 혼자 버는 돈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아들과 직장 동료였던 며느리는 결혼 후 집안일과 아이들 양육에 전념했다. 생계 전반을 아들 상훈이 도맡게 되자 며느리에 불만이 쌓인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진다. “내가 제집에 일하러 온 파출부도 아니고, 빌라 계단을 다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현관문을 야멸치게 닫아버리지 뭐예요.”(30쪽), “아까운 차비 들여 올라가서는 그런 대접이나 받다니, 고작 그런 대접이나요…(31쪽) 큰 손녀가 태어나고 우울증을 앓는 며느리를 보살피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순옥은 집안일을 살뜰히 보살펴주지만, 며느리에게 푸대접받는다. 셋째 아이를 낙태한 상훈 부부, 며느리의 낙태에 공감하는 순옥, 이들 가족의 생명 경시 태도나 고부 갈등도 결국은 경제적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순옥이 혼자 남겨질 아들 걱정을 한다고 해서 며느리에게 연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까지 봐서 뭐하겠어요.”

“굳이 그것까지…”

지켜본들 서로 간에 뭐 할 말이 있을까. 명절에나 겨우 얼굴 보던 사이가 뭔 정이 그렇게나 들었다고. 나도 그렇지만 며느리도 성격이 보통 쌀쌀한가. 남다른 정이 들었다 한들 새파란 며느리가 병에 찌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세상천지 어느 시어머니가 보고 싶겠는가. (33쪽)     


  며느리가 위급하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정작 서두른 건 순옥이였다. 남편이 들고 있는 다리미를 빼앗고 막차를 타기 위해 도로로 뛰어 내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간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날이 밝은 다음에 첫차를 타는 게 나을 뻔했다고 자책한다. 첫차에 집착하는 심리는 며느리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로다. 하루의 시작을 상징하는 첫차가 생의 출발점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 “뭘 그렇게나…”(34쪽) 그녀는 막차를 타고 올라가 병원에 도착해도 며느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데 절망한다. 죽음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몸속에 뼈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무력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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