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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림 Oct 25. 2024

현실과 비현실의 콜라주

김숨 「룸미러」

03편 연속 

  

  인간은 환경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다.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생명을 얻는 순간부터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먹어야 산다는 간단한 생존 법칙은 자연이 주는 엄중한 진리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부양책임도 떠맡아야 한다.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듯한 남편의 태도는 부양책임의 엄중함이다. 표면적으로 남편이 경제적 부담, 아내는 양육 부담을 지고 있다. 아이들이 박제 새나 도마뱀처럼 되지 않았다고 치부해도 이들 부부가 자식을 완곡하게 거부하는 심리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아이들 방문에 걸어둔 박제 새의 “핑크빛 부리가 여차하면 남편의 눈동자를 파먹을 듯 그악스럽게 벌어져 있었다.”(185쪽) 박제 새는 아이들이다. 어머니인 그녀는 아이들을 부모에게 해악을 끼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박제 새를 아이들 품에 안겨 잠재우고 방문에 걸어 봉인한 행위와 개연성을 갖게 된다. 부부에게 두 아들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둘째 아들 호석은 박제 새가 살아있다고 여기고 새의 부리에 생쌀을 넣어준다. 호석의 행위는 남편(아빠)의 분노를 산다. 두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의 먹이 또한 아빠가 부담할 몫이다. 아이들이나 도마뱀의 성장과 비례하여 남편의 부양 부담은 가중된다. 무섭게 자란 도마뱀에 대한 남편의 적의는 죽이고 싶은 욕구로 변한다. 

통제 불능에 빠진 충동은 죽음으로 떠돈다. 죽음의 메타포는 첫째, 가족 나들이의 목적지가 장례식장이라는데 있다. 둘째, 남편이 중국 출장길에 사 온 박제 새다. 셋째, 도마뱀의 죽음이다. 넷째,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이다. 다섯째, 천호대교를 지날 즈음 가족 앞에 나타난 ‘우주 관광’이라고 적힌 노란 관광버스다. 좌석이 텅 빈 채 줄지어 도로를 내달리던 버스는 가족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가족이 도로에서 버스와 다시 마주쳤을 때는 늙은이들이 타고 있었다. 늙은이들은 죽은 자들을 상징한다. 소설이 죽음의 메타포를 유기적으로 구성한 것은 현실 삶의 잔혹한 일면을 부각하려는 의도다. 죽음의 유보적 전개는 불투명한 미래 암시다. 죽음이 막다른 길이듯 가족의 베르나는 동력을 잃는다. 

  도로 정체는 파탄 직전에 이른 가족 관계처럼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베르나는 자유로에 멈춘다. 자유로는 이율배반적으로 자유를 억압한다. 정체는 심각했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차들의 행렬을 앞질러 어디론가 걸어간다. 허공에서 출몰한 새 떼가 공격적으로 차들이 멈춰있는 도로 상공을 선회한다. 사람들은 공포에 떤다. 새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을 공격한다. “새들이 저러다 돼지들을 다 잡아먹어버리겠어.” (210쪽) 먹고 먹히는 잔혹한 세계의 질서는 이들 부부의 태도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도마뱀의 목을 조르고 박제 새를 아들의 품에 안겨주고 유통기한이 지난 만두를 먹이는 행위가 그것이다. 

부부의 행위는 의식적 자기방어 기제로 심리적 억압에서 비롯된다. 억압은 거부의 예비단계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발현하는 불쾌의 산물이다. 주목할 지점은 이들 가족의 경제적 여건이 파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맞벌이가 아니면 당장 생계가 어렵고 자가용이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다수의 하층민과 비교하면 남편은 엄연히 직장이 있고 베르나를 타고 장례식장을 찾을 만큼의 여유는 있다. 즉 부부가 자식을 거부하는 움직임은 시대성의 반영이다. 

  공동체 중심의 가치가 우선하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우선하면서 가족 유지, 부양책임 회피는 사회에 또 다른 그늘이 되어간다. 엄밀히 보자면 이들 가족의 해체는 물신주의 풍조가 원인이다. 그 중심에는 양극화가 존재한다.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격차가 심해질수록 사회문제 역시 악화 일로를 걷는다.” 상대적 박탈감은 좌절과 분노를 넘어 삶의 의지마저 꺾게 된다.     

 

“좀 자야겠어. 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깨워주겠어?”

남편은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가 깨워주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아이들이 잠들어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 또한 잠들어 있기를 그는 바라는 게 아닐까. (210쪽)     


  남편은 아이뿐 아니라 아내마저도 거부한다. 이쯤에서 가족 공동체는 해체국면에 접어든다. 연료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고 시동을 켜 둔 채 남편은 차에서 내린다. 운전자의 자리 포기한 가장은 남편, 아빠의 역할을 포기한 것과 같다. 아내는 남편이 떠났으나 가정의 운전자가 될 생각은 없다. 그녀는 조수석을 고수한 채 룸미러를 자신 쪽으로 거칠게 돌린다. 룸미러는 망가졌고 차의 연료는 바닥난다. 시동은 꺼지고 그녀 또한 차에서 이탈한다. 어머니 역할을 포기한 것인지 삶을 포기한 것인지는 베일에 가려있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을 보았다.”(216-217쪽)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탈출한 그녀가 본 광경이 무엇인지는 미스터리다. 다만 그녀는 “지금쯤 내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며…” (217쪽)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아이들이 끔찍한 것인지 주어진 삶이 끔찍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차에 남겨진 존재는 잠든 아이들 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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