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막차」
08편 연속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 순옥은 차창 밖으로 또 한 대의 고속버스를 보게 된다.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달리는 고속버스는 한 사람의 승객도 보이지 않았다. “저 고속버스에는 사람이 한명도 없네요.”, “한사람도요.”(20쪽) 순옥은 독백하듯이 중얼거린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남편이 뜻밖에 말을 섞는다. 틀림없이 사람이 탔을 것이라며 우기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눈을 뜨지 않았다. “속을 긁어낸 멍게 껍질처럼 텅 빈 고속버스는 그들이 탄 버스를 추월하더니 조금씩 멀어져 한점 빛으로 반짝거리다가 어둠으로 사라졌다.”(21쪽) 속을 긁어낸 멍게로 표상되는 고속버스는 생명의 층위를 곧바로 무너뜨린다. 실체가 모호한 고속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녀 앞에 실체를 드러낸다. 순옥은 “운전기사도 없이 저 홀로 철필대 속 같은 고속도로를 유령처럼 내달리는 고속버스”(24쪽)에 자신과 남편 단둘이 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저 봐, 누군가는 타고 있잖아.”(34쪽) 순옥의 가물거리는 의식을 일깨우듯이 남편의 항의 섞인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온다. 겨우 눈을 뜬 순옥은 차창에 비친 남편의 얼굴을 보고 소름이 돋는다.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는 눈과 입, 순옥은 차창에 비친 남편을 보았으나 남편은 유령처럼 질주하는 버스에 탑승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한 공간에서 각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부부, 순옥은 남편과 각자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잠시 쉬고 싶었으나 옥산휴게소를 지나친 버스는 천안 휴게소도 그대로 지나간다. 버스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비명을 내지른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남편이 증발한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속버스는 휴게소에서 시동을 끈 채 멈춰있었다. 버스가 출발하려고 하자 순옥은 다급하게 소리친다. “사람이 덜 탔다니까요.”, “아주머니 혼자 아니었어요?”(43쪽) 기사는 남편이 버스에 탑승한 적이 없다는 듯이 순옥에게 되묻는다. 순옥은 평소 남편이라는 손님을 멀리멀리 내쫓고 싶어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하지만 무심코 내뱉은 소리가 진심은 아니었을 터이다. 운전기사에게 남편의 부재를 강하게 부인한 순옥은 버스에서 내린다. 그녀는 휴게소에 내린 후 남편의 부존재를 재확인한다. 남편은 애초에 순옥과 동행한 적이 없다는 듯이 자취를 감춘다.
남편이 돌아왔을까 싶어 고속버스 쪽으로 걸음을 내딛던 그녀는, 얼어붙듯 멈추어섰다. 꽃상여처럼 환한 고속버스가 그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고속도로를 유령처럼 내달리던 그 고속버스인 듯싶었다. 승객을 한명도 태우지 않고. (44쪽)
순옥은 휴게소 주차장에 죽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고속버스와 대면한다. 꽃상여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버스는 삶의 끝자락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며느리, 칠순을 목전에 둔 남편, 또는 순옥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순옥이 타고 온 버스는 꽃상여 같은 버스의 그림자에 가린 채 뒤쪽에 웅크리고 서 있다. 순옥은 자신이 타고 온 버스가 아니라 꽃상여 같은 버스에 오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도착지가 어디든 가는 곳까지 무작정 타고 갔으면 했다.”(44쪽) 그녀는 현실에 지쳐있다. 새파란 며느리의 암 진단과 임박한 죽음, 아들 혼자 헤쳐가야 할 미래, 어린 손녀들의 불투명한 내일, 그녀 주변은 온통 혼돈 상태다. 그녀를 둘러싼 암울한 현실은 생을 포기하라고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죽음은 인간의 선택이 아닌 순리에 맡겨야 할 것이다. 문이 닫히고 고속버스가 천천히 움직인다. 그녀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우두망찰 서있을 뿐이다. 버스는 그녀를 치받을 듯 스친다. 죽음의 여정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 고속버스는 아슬아슬하게 그녀 앞을 지나친다. 마치 머지않아 순옥도 그 버스에 올라야 한다는 듯이.
그녀는 누군가 타고 있다는 남편의 말이 불현듯 떠올라, 버스 안을 살피는 그녀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남편의 말대로 누군가 버스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버스가 유유히 휴게소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것을 그녀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버스에 타고 있는 누군가가, 유령인가 싶게 홀연히 타고 있는 누군가가 하필이면 남편과 닮아서였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녀 옆자리에도, 휴게소 어디에도 없던 남편과 몹시나. (45쪽)
버스에 타고 있는 누군가는 남편일 가능성이 크다. 부부로 만나 함께 살아왔으나 죽음이라는 갈림길에 접어들면 각자의 길로 가야 한다. ‘속을 긁어낸 멍게 껍질 같은 고속버스’, ‘철필대 같은 고속도로를 유령처럼 질주하는 버스’, ‘꽃상여 같은 버스’, 남편은 저승행 버스에 탑승한 것일까.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감각적인 것의 분배, 관념과 사건으로서의 문학은 이동하는 형식을 중요시한다. 미학적 상태란 미결정의 순수한 단계이며 형식이 독자적으로 경험되는 순간이다. 결말은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10편 연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