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 해결사의 길 - 2
가구 공장 입구에 승용차가 멈추고 세 사람이 내렸다.
그 중 한 명은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이목구비를 지닌 치우였다. 정장 셔츠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잔근육까지, 그의 모습은 완벽했다.
치우와 춘식이 앞장서고 민수가 절뚝거리며 뒤따랐다.
목재가 쌓인 한쪽에 '사무실'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공장 내부에서 작업 소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춘식은 공장 문을 확 밀어젖히며 거칠게 들어섰다.
“여기 사장이 누구야!”
그의 고함에 일하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제가 사장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빚 대신 이 공장을 접수하러 왔수다.”
춘식은 가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공포감을 느낀 직원들이 슬금슬금 밖으로 나갔다. 치우는 백 사장에게 서류를 내밀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희는 사장님께서 돈을 빌리신 동양캐피탈에서 왔습니다. 약속한 이자 납부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계약에 따라 이 공장을 우리에게 넘겨주셔야 합니다. 이 양도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갑자기 거래처가 부도나서 그랬지만, 다른 곳에서 납품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껏 이자로도 원금은 다 갚은 거 아닙니까?”
“아니, 우리 돈이 급전이라는 걸 모르고 썼나.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면 안 되지.”
춘식이 핀잔을 주며 끼어들었다.
“그때는 너무 급해서 그랬지만….”
백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단호하게 나왔다.
“이 공장만은 절대 안 돼요. 제가 평생을 바쳐 남긴 것이 이 공장뿐입니다. 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고요.”
정색하던 백 사장이 돌연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치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춘식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가구를 들고 문으로 걸어갔다. 이때 백 사장이 작업용 칼을 집어 들어 춘식의 앞을 가로막았다.
겁에 질린 그는 주춤하며 치우의 눈치를 살폈다. 곁에 있던 민수가 그 가구를 낚아채고 무심히 나갔다.
순간, 백 사장이 소리를 지르며 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찔렀다. 그 모습에 경악한 아내가 급히 달려와 수건으로 피를 막았다.
“인주가 필요 없겠군.”
치우가 툭 던졌다.
“빨리 차를 불러서 물건을 싣고 가자.”
“잠깐만!”
춘식이 휴대폰을 들자 치우가 제지하며 백 사장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사장님의 계약 불이행에 대한 집행을 하러 온 것입니다. 알아본 바, 사장님께서 사는 집이 전세더군요. 저희는 사장님의 채무를 대신해 주인에게 전세금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고3 수험생인 따님이 공부를 아주 잘하던데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길바닥에서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낙방하게 된다면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겠죠?”
백 사장은 입술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께서 이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집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지요. 또한 가구와 기계를 처분하면 따님의 입학금도 마련할 수 있고, 직원들에게도 봉급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절하면 저희는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수령하고 공장의 모든 물건을 가져갈 것입니다.”
백 사장은 동공이 풀린 눈으로 갈등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결심한 듯 아내에게 손짓했다. 여자는 흐느끼며 도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서류를 주세요.”
민수가 재빨리 양도계약서를 내밀었다. 서류를 챙긴 그들은 공장을 나섰고, 백 사장 부부는 목 놓아 울었다.
춘식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치우는 전화를 걸었다.
“가구공장 건은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차 사장 건을 처리하러 가겠습니다.”
“금 사장과 통화했어?”
치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언제 백 사장 뒷조사를 했냐? 죽어도 안 된다며 자해를 한 백 사장이 네가 딸 얘기를 꺼내니까 표정이 확 바뀌더라.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잖아. 하여간 넌 대단한 놈이야!”
춘식이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맞아, 치우 형은 상대의 약점을 정말 잘 찾아내.”
민수가 맞장구쳤다.
‘차 사장 건은 어떻게 해결하지….’
달리는 차에서 치우는 고민에 잠겨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가을날이다. 길가의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어 바람에 하느작거렸다. 어느새 가을이 왔음을 코스모스를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꽃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혜원의 얼굴이 피어났다. 그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만발한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머쓱한 치우와 V자 손모양을 한 혜원과의 인증샷이다.
작년 이맘때, 그녀와 함께 야외 드라이브를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코스모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야.”
한가로운 사잇길에 핀 코스모스 가을 들녘을 걸으며 혜원이 한 말이다.
“치우 씨는 어떤 꽃을 좋아해?”
꽃에 별로 관심이 없던 그는 떠듬거렸다.
“나는… 들꽃.”
“들꽃? 자기는 마음이 엄청 넓은가 보네. 그렇게 많은 들판의 꽃을 다 포용하니.”
“그래서 내 닉네임이 태평양이잖아. 이 가슴 속에 만주 벌판이 있다고. 근데 이제부터 코스모스를 좋아하기로, 아니 사랑하기로 했어.”
“피, 나 때문에 그런 거지?”
“그 어려운 걸 어떻게 알았어? 주관식으로 맞히다니, 대단해!”
그날 치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첫사랑의 두근거림으로 행복하게 거닐었다.
“뭐 보고 있어? 혜원 씨 사진이구나.”
향기로운 추억에 젖어 있던 그를 춘식이 깨웠다.
“치우 형, 언제 국수 먹을 거야?”
민수가 그의 기분을 맞추려 물었다.
“하고 싶긴 한데 지금은 힘들어. 앞으로 2~3년 더 고생하고 할 생각할 거야.”
“그럼 결혼식 사회는 내가 맡을게.”
“춘식 형이 사회를 보면 오려던 하객들도 다 돌아갈걸? 누가 저승사자를 보러 오겠어?”
“내 얼굴 정도면 거의 조각 수준 아냐?”
“맞아. 그것도 산산조각이지.”
“야, 내 인상이 어때서? 내가 좀 야생적으로 생겨서 그렇지, 아프리카에서는 먹히는 스타일이야. 자식이 좁은 조선 땅에서만 살아서 뭘 몰라요. 내가 글로벌한 마스크라는 걸.”
춘식과 민수는 옥신각신했다. 치우는 현재 자신의 처지로는 결혼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우울해졌다.
그의 기분을 눈치챈 춘식이 분위기를 바꿨다.
“그런데 사실, 나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깜짝 놀라곤 해.”
이 말에 두 사람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춘식과 민수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혜원이 근무하는 병원에 치우가 입원한 동안 그들이 자주 문병을 와서다. 그녀는 처음 춘식을 봤을 때 인상이 험상궂어 무섭다고 말했다.
치우는 그녀에게 이들이 보육원에서 힘들게 자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혜원은 선입견을 가져서 미안하다며 그들과 친형제처럼 지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