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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답시를 올립니다.

by 쏘리
류시화.png



- 답 시


여행자의 답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 오늘도 입금된 하루를

어떻게 여행할지 고민하는 하루)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길 떠나야 하리



(* 과거의 상념 속에서 현재를 다시 설계하기도

미래를 그리지 않지만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설계하기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 새는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나는 얼마나 뒤돌아 보고 있는가

정답은 뒤에 없다고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계속 뒤를 돌아보는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니 뒤를 살피며 앞으로 걸어가는 것 또한

그 나름의 길이다.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나는 불꽃같이 꽃을 피웠다.

꽃을 피우는지도 모른 채.

내가 꽃인지도 모른 채.



그러다가 이젠 시들해져서 죽고 싶었다.

더 이상 불꽃처럼 살 에너지도

그리고 불꽃처럼 살 수 없음을 안 순간.



죽음뿐이다 싶었다.

평생을 칙칙하게 살기 싫었다.



그래서 짧고 굵게, 그게 아니라면 그 지루한 인생 다들 어떻게

살아가나 싶었다. 부모님이 존경스러웠다.



이 지겨운 인생. 죽지 못해 산다.

근데 또 죽는 게 쉬울까.

주변에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 답답한 마음에 새벽 4시에 밖에 나가

쓰레기를 줍는다.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펼쳐진다.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같은 시간이라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싶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 아무리 내가 새벽 4시에 일어나 밖을 나가도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블루베리를 따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다.

내가 일찍 일어난 사람이겠지.

싶지만 나보다 더 일찍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죽고 싶을 땐 눈 뜨는 게 뭔 의미가 있나 싶어서

죽고 싶을 땐 화장이 뭔 의미가, 옷이 뭔 의미가, 돈이 뭔 의미가.



씻지도 않고 그냥 가려줘야 하는 부분만 가리고 밖을 나간다.

원초적인가? 원래 원초적으로 태어났다가 원초적으로 삶을 마감한다. )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 몽상이라기엔 현실인데

현실을 살다 보니 몽상을 안 하곤 살아갈 수가 없는데



몽상을 끝내면

현실도 끝나는데



뭔 상관인데.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는 일도 이제 그만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

순간 속에 자신을 발견



순간도 어떻게 쓰냐에 따라 다르다.



유폐하는 그 시간마저도 언젠간 그래, 그 유폐했던 시간이 있어서

나를 알 수 있었지. 유폐 꼭 나쁘게 만 볼게 아니다.)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 환영, 나는 자정이 좋다.

하루가 바뀌는 그 자정이 좋다.



또 새롭게 입금되는 월급이 아니라 주어진 하루 24시간

나는 그 시간을 환영한다.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오늘 하루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군.

저녁이 되면 곧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불면이 아니라 내일이 기대가 돼서 잠이 오지 않는다.

1분 1초가 아까워서 눈이 빨리 떠진다.



옥죄는 게 없는 이 순간.

옥죄며 살아가는 사람은 날 부러워할까?



그렇다면 해봐라.

백수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 오늘은 떡볶이 투어를 가볼까.


전국에 떡볶이

김해에서 먹었던 떡볶이도 맛있었고

서울에서 먹었던 떡볶이도 맛있었고

천안에 있는 마늘 떡볶이도 맛있는데



그래서 또 간집 유튜브를 좋아한다.

광고성이 아닌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그들만의 재방문집.



하루를 거창하게 살 필요가 없다.

뭐 거창하게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 무소유에서 풀소유



무소유가 더 행복할까

풀소유가 더 행복할까



그 중간지점은 더 행복할까?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아서 행복한 것을 왜 모르는가.



나도 근데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다.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 행복하여라



사랑은 365일 10대에서 90대까지 해라.

결혼은 선택 연애는 필수다.



사랑하고 안 하고의 일상의 온도차는 다르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일부터가 사랑의 시작이었더라.



그러니까 이혼이나 새 출발을 두려워 말라.



대신 양다리는 죽음뿐이다. 매듭짓고 해라.

나쁜 놈 나쁜 년 되기 싫어서 문어발 걸치다간

다리 다 잘려져 나간다. 콱 그냥. )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 상처까지도 즐길 수 있을 때

그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헤어짐을 생각하고 만나진 않지만

헤어짐도 품을 수 있을 때 시작하는 사랑이



덜 불안하고 덜 두렵다.

언젠가 헤어지겠지를 생각하면

더 최선을 다하게 된다.



아낌없이 사랑해라.

줘도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랑.



그리고 내가 해준 만큼 그 사람이 주지 못한다고

날 안 사랑하나, 내가 별로 인가도 생각지 마라.



그러려고 사랑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구걸이 아니다.

근데 난 약간 구걸도 했던 듯...



구걸하다 안 주면 가차 없이 갔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삶인가.



비웃어도 괜찮다. )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 이 모순적인 문장은 무얼까.

마치 내 삶과 비슷하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말을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되고

내뱉었으면 지켜야 한다.



그런 말 하지 않기로

그런 행동하지 않기로



약속을 걸고,

나는 그런 말을 하고

나는 그런 행동을 했다.



그 한테는 상처였겠지요.

기분파인 나는 그런 나로 인해 상처받을 당신을 위해 떠났습니다.



이게 더 상처라면

내 상처는 뭐로 보상하지요. )



상처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 대문과 안방 문은 다르다.

대문은 활짝 열어놔도

안방 문은 굳게 잠근다.



그게 내 룰이다. )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 길바닥에서도 잘 잔다.

지하주차장에서도 잘 잤다.



이럴 땐 여자인 게 싫다.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내가 베스트드라이버라 해도

방어운전을 해도


운전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거라서


다 같이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 오로라를 보고 싶다.


눈물이 난다고 하던데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경의롭고, 웅장해서 흘려보고 싶다.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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