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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림 Aug 01. 2024

거머리는 아닙니다만...

40줄에 엄마랑 같이 사는 (비혼) 딸의 이야기

40대의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은 애인이나 남편이라 부를만한 남자가 아니라 ‘엄마’다. 요즘 경제적으로 자립 못 한 캥거루족이 늘고 있다는데, 난 엄마와 같이 살기는 하나 엄마에게 손 벌리는 일은 없으므로 캥거루족에 해당하진 않는다. 하지만 종종 캥거루족, 그 비슷한 부류로 범주화되는 것 같다. 그 일은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잡을 기회가 없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공공근로 나갔던 엄마가 돌아와 “같이 일하는 할매도 딸이랑 산갑더라. 그 집 딸도 마흔여섯인가 그란디.. 결혼은 포기했는지 아예 그런 쪽으론 생각도 안 하고, 직장도 안구하고.. 아주 속이 터진다고 해서 ‘나도 딸이랑 둘이 사요’ 했더니, 그 할매가 ‘우리가 다 거머리 하나씩 달고 살고 있구만요’ 함서 웃어.”라고 했을 때 “난 거머리가 아니에요”라고 말할 기회를 이미 상실한 상태였으니까.


최근 본 책에서 인간의 뇌는 타인을 각각의 개체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복잡한 과정에 엄청난 부담을 느껴 인간을 몇 개의 간단한 범주로 나누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방식에 적응하게 되었다고 했다. 난 그 말을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의 백수 딸과 거머리로 묶여도 그러려니 하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엄마를 교육할 필요성은 느꼈다. 내 얘기를 굳이 밖에 나가서 할 필욘 없지만, 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딸이랑 살아요, 보다는 길게, 포기를 모르는 나의 도전정신을 대놓고는 아니고 은근히 부각하는 방향으로 얘기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 되겠다.


딸이랑 같이 산 지 5년 정도 됐어요. 서울에서 직장생활 잘하던 딸이 프리하게 일하면서 대학원에 다녀보겠다고 5년 전 집으로 들어왔거든요. 대학원(문예창작학과) 수업이 오전에 있으니 직장생활과는 병행하기 힘들고, 직장도 안 다니며 대학원 학비에 월세까지 감당하자니 그것도 힘들고… 그래서 집으로 들어온 건데, 처음엔 저도 걱정을 많이 했죠. 시집을 가야지 왜 나한테 오나, 돈이나 더 벌 것이지 나이 40에 무슨 대학원인가 하고요. 근데 직장만 안 다닌다 뿐이지 집에 들어와서도 제 용돈벌이는 계속하더라고요, 그리고 대학원에 헛돈 쓴 건 아닌지 거기 다니면서 쓴 글로 문학상도 받고, 무슨 스토리지원사업엔가도 덜컥 붙고… 좋은 일이 많이 있었어요. 지금도 여기 낸다, 저기 낸다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데, 속으로 그랬죠. ‘그래, 딴 건 몰라도 그 도전정신 하나는 높이 사마’ 

이 정도만 얘기해줬어도 거머리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의 도전정신이 공모전 따위가 아니라 시집가는 데 발휘되길 바라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신데렐라가 아닐뿐더러 멋진 왕자님이 기다리는 궁궐 무도회란 것도 현실에선 없는 것을.. 무엇보다 내 나이쯤 되면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믿음 같은 게 없다. (신데렐라를 쓴) 작가가 ‘보기엔 그럴 듯해도 두 발을 옥죄는 고통이 너무도 큰 결혼생활’에 대한 메타포로써 유리구두를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만이 들 뿐이다. 말이 나와 말인데, 신축성 하나 없는 유리구두를 신고 춤추고 뛰기까지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멋진 왕자님은 한번 만나보고 싶다. 예쁜 드레스도 입어보고 싶고... 하지만 난 곧 현실을 직시한다. 왕자님과 춤을 추기엔 ‘신데렐라 계모뻘’ 되는 너무 많은 나이이며, 예쁜 드레스를 입기엔 60킬로를 훌쩍 넘긴 너무 찐 몸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말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현실을 너무 가까이서 보는 건 정신건강에 좋은 일이 못 된다. 그렇게 보다 보면 거머리는 아니지만 거머리보다 나은 무엇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도전’이라는 포장지 안에는 거머리보다 나은 무엇이 되고 싶은 내가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계속 쓰고 있다. 호박마차를 타고 무도회장에 갈 수 없는 나와 같은 인간은 쓰는 일 외엔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몇 달 전엔 드라마를 썼고, 며칠 전엔 소설을 썼고, 지금은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있다. 에세이 제목은 ‘거머리는 아닙니다만...’

아직 돈이 된, 그러니까 팔린 글들은 없다. 이렇게 팔리지 않는 글들을 계속 쓰다가 엄마한테 빨대 꽂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문득문득 엄습한다. 生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더니 거머리가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데, 글을 쓰는 행위가 날 거머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현실 또한 그러한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아직은 아닌 것이다. 거머리가... (엄마랑) 같이 살지만 나의 홀로서기는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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