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림 Aug 01. 2024

양파 고독사 사건(?)

고독사를 걱정하게 되는 우리들의 이야기

나는 가난한 부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건 자라면서 고독할 일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독(孤獨)’의 사전적 정의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다. 우리 4남매는 사춘기에 접어들도록 통에 든 통오이지처럼 나란히 누워 부모님과 한방에서 잤다.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엔 우린 좁은 방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덕분에 난 고독이란 감정은 늦게 배우고,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의 필요성에 대해선 남보다 일찍 깨쳤던 것 같다. 


엄마 역시, 아니 엄마야말로 자식들 뒤치다꺼리로 고독할 겨를 따윈 없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아들 둘을 각각 군대와 대학에 보내고 형부랑 둘이 남게 된 언니가 찾아와 꽤나 고독해진 표정으로 “엄마도 이랬어?”(엄마도 저처럼 빈둥지증후군을 앓았냐는 의미다)라고 했을 때, 엄마는 헛웃음 치며 “아이고야, 나는 지발(제발) 좀 혼자 사는 게 소원이었다!”라고 말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사치였던 옛 시절이 엄마로 하여금 혼자이기를 소원하게 한 것 같았다. 그 소원이 지금껏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시 나의 ‘고독’ 얘기로 돌아가서, 나는 본가를 떠나 홀로 서울살이를 하며 직장에 다니던 2, 30대 때, 군중 속의 고독과 혼자인 데서 오는 고독, 둘 다를 경험했던 것 같다. 그때도 난 뭔가를 끄적였는데, 고독을 종이에 비유하자면 백지보단 흑지에 가까워 흰색 글자들이 써졌다. 아주 드물게지만, 단순히 검은 바탕에 흰 글자가 아니라 어둠을 깨고 태어나는 빛나는 뭔가를 써 내려간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나란 인간은 좀 더 고독해져도 되겠다 싶어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후 맞이하게 된 자발적 고독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곧 엄마와 같이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독하지 않기 위해 엄마랑 살게 된 건 아니지만, 누구랑 같이 산다는 건 확실히 고독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고독사에 대한 염려도 줄었다. 사실 고독은 괜찮지만, 고독사(孤獨死)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사는 일뿐만 아니라 혼자 죽는 상황까지 고민해야 한다. 어쩌면 후자를 더 고민거리로 여길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고, 며칠 전 걸려 온 친구의 전화도 고독사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담고 있었으니까.


몇 년 전의 나처럼 홀로 서울살이 하며 직장에 다니고 있는 친구는 썩은 양파망에서 고독사의 공포를 느낀 모양인지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간만에 집밥 좀 해 먹어보려고 장을 본다는 게 양파를 한 망이나 사버렸다고, 근데 또 장 볼 때 맘이랑은 달라서 장만 봐두고 뭘 안 해 먹는 바람에 양파망이 주방 문턱을 못 넘고 현관에 방치된 채로 있었다고,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있었는데도 양파 상태는 양호했다고, 그러다 보게 된 거라고, 양파망의 양파가 말간 윗얼굴과는 달리 아래 부분이 조용히 썩기 시작해 벌레를 키우고 있었던 것을.. 부패된 양파에서 나온 진물과 벌레가 나무로 된 현관 바닥마저 먹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을...


그다지 철학적인 친구는 아닌데, 친구는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죽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여겨졌다고 했다. ‘이 집에서 혼자인 나는 혼자 죽음을 맞을 것이며 가족이 나를 찾았을 땐 이미 저런 상태가 되어 있겠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친구는 그 순간 휴대폰을 집어 들고 가족이 보았을 때 문제가 될 만한 사진과 메모들을 지워나갔다고 했다. 제가 죽으면 가족들이 젤 먼저 들여다볼 게 제 휴대폰일 것만 같았다면서. 또 몇 푼 되진 않지만, 자기 재산이 누구한테 얼마씩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유서도 써놔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난 분명 건강도 젊음도 없는 독거노인과 통화한 것이 아니었다. 건강한 40대 미혼여성과 통화한 것이었다.


혼자 산다는 건 나이 불문하고 남보다 이르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엄마랑 살기로 한 거, 참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는 엄마랑 사는 나를 1도 부러워하지 않지만, 어쨌든 당장은 동거인이 생겨 고독사 걱정은 덜었으니 말이다.


살아서는 고독할지언정 태어날 때 혼자가 아니듯 죽을 때도 혼자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결혼 여부, 자녀 유무와 상관없이 이루어졌으면 하는데, 그건 정녕 꿈의 영역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썩은 양파 따위를 보고 나의 죽음을 떠올리진 않을 것이다. 당장에 버리고 새 양파를 사다가 맛있는 요리를 할 것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면 더더욱, 미루지 않고 지금 맛있게, 행복하게 살고 볼 일일 테니까…. 

이전 01화 거머리는 아닙니다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