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림 Aug 01. 2024

노모에게 커피 심부름시키는
인간이 또 있다고?

"딸아, 일어나라! 커피 사 왔다!!"

나는 타고나길 잠이 많은 편이다. 오죽하면 학창 시절 '잠순이'로 통했을까. 그래서 나는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 말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그땐 정말 몰랐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침잠을 ‘아이스 아메리카노(이하 '아아')’로 쫓고 있을 줄은.


눈 뜨자마자 커피 한 잔, 때론 눈 감은 채로 커피 한 잔. 이것이 30대부터 이어져 온 나의 아침 루틴이다. 잠 부족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아침 일상이 아닐까 싶은데, 사실 난 잠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특히나 백수 상태인 지금, 부족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난 원래 잠이 많다.

잠 많은 나를 위해 아아는 카페인으로 한 번, 그 차가움으로 또 한 번 나를 깨운다. 아아 입장에서는 백수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깨울 필요가 있을까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무리 백수라도 남들 깨어있을 때 깨어있는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아아를 집에서 만들어 먹다가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커피를 1,500원에 파는 C커피점이 생기면서 요즘은 그냥 사다 먹고 있다. 먹긴 해야겠으나 사러 가기 귀찮을 땐 엄마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엄마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내가 엄마한테 "운동 겸 사다 줘~"라고 하면 엄마가 다이소에서 산 컵홀더를 들고 가 아아를 사다 주시곤 한다는 얘기다. 가끔 눈을 흘기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흔쾌히 사다 주시는 편이다. 그 횟수가 잦기 잦았던지 이제는 커피점 직원이 엄마가 주문하기도 전에 “아이스 드려요?” 하거나 어느 날은 그냥 알아서 아아를 줄 때도 있다나 뭐라나.


오늘도 엄마는 내 커피 심부름을 해주셨다. 그리고 아아만 주신 게 아니라 커피점 직원의 말까지 전하셨다.

"아가씨(커피점 직원)가 '어머니.. 커피 누가 드셔요?' 하더라"

나는 좀 뜨끔했다. 70대 노모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게 그제야 찔리는지. 나는 찔리는 마음으로 엄마의 다음 얘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응. 우리 딸.. 우리 딸이 지금 일하고 있어서 내가 운동 삼아 사러 왔어'라고 했제"

딸이 일하고 있다는 엄마의 하얀 거짓말 덕에 세간의 비난은 면한 듯했다. 물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 당신이 백수 딸을 대신해 커피 사러 왔다는 사실이 팔려 그리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엄마는 엄마의 답에 대한 직원의 반응을 마저 얘기하셨다.

"그란께 아가씨가 '그래요? 아까 어떤 할머니도 커피 사러 오셔서 물어봤더니 그분은 아드님 사다 드린대요' 함서 웃더라."


엄마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순간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종족(미혼에 엄마랑 살며, 어미 새에게 모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어미로부터 커피를 공급받는 종족)이 근거리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엄마랑 사는 비혼 백수 딸은 가끔 외로울 때가 있다. 이렇게 사는 인간은 나뿐인 것만 같은 생각이 밀려들 때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드는 것이 아닌가.

엄마가 전한 얘길 또 둘째 언니한테 전했더니 언니도 엄마의 얘기 속 어떤 할머니의 아드님을 나와 같은 과라고 생각했는지 둘이 소개팅하면 좋겠다며 깔깔댔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언니야, 내가 굳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나와 같은 과는 싫어.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 예를 들면 아침잠이 없는 사람. 아침잠이 없어서 아침잠 많은 나를 위해 기꺼이 커피 심부름을 해줄 있는 사람.'


생각 속 남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엄마에게 커피 심부름시키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도 울 엄마, 운동은 좀 해야 하지 않나?'

이전 04화 연봉 잘못 불렀다가 '백수' 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