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연봉 말하래서 말했다가 졸지에 '백수'된 썰
나에게 일을 주던 회사에서 프리가 아니라 정직원으로 일하라며 원하는 연봉을 말하라고 했다. 게다가 하던 대로 쭈욱 재택근무를 해도 좋다 하니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출퇴근하는 정직원, 재택근무 하는 프리랜서, 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재택근무 하는 정직원이라니 이게 웬 떡이냐 싶기까지 했다. 그건 곧 나의 반려견 '봄이'를 혼자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안정적인 수입,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네이버에서 내 또래의 평균 연봉을 검색해, 그걸 참고삼아 5천 초반대의 연봉을 제시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줄 것처럼 말할 땐 언제고 왜 아무 말이 없어? 비싸다든지 싸다든지 무슨 말을 해줘야 깎아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나는 꽤 도도하고 의연한 표정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내 표정이 '안 도도하고, 안 의연하게' 바뀐 것이다. 회사 대표가 나를 보고 있었다면 나의 표정이 "제 연봉은 백화점처럼 정찰제가 아니에요. 그냥 시장에서 콩나물값 깎듯 깎아도 된답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회사 대표에게 나의 표정을 들킬 일은 없었다. 자존심상 나도 먼저 회사에 연락하지 않았고, 회사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둘이 만날 일 따윈 없었으니까.
내가 짤린 이유를 연봉 말고 달리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순 없었다. 구직사이트를 뒤져본 결과 연봉 4천 넘는 곳도 흔치 않은 것으로 보아 연봉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 백퍼 연봉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하던 대로 프리(랜서)로라도 써줄 것이지, 정규직 고용 건이 물 건너가더니 프리하게 하던 일마저 끊겨버렸다. 졸지에 백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웬 떡인가 싶었을 때, 그건 떡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도 딱히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할 일이 없어지자 유튜브 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다 보니 나도 유튜브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독학으로 영상편집을 익힌 뒤, 난 '백수 브이로그' 유튜버가 되었다.
내 첫 구독자이기도 한 큰언니는 졸지에 백수 되고 유튜브라도 해보겠다는 동생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지, 이런 쪽엔 별 관심 없는 형부한테도 내 백수 브이로그 구독을 권한 모양이었다. 형부는 그제야 내가 백수라는 사실을 안 모양이었고.
언니: 니 형부한테도 니꺼 보고 구독 좀 해주라고 하니까 “처제.. 백수야?” 하고 묻더라. “프리랜서가 일 없으면 백수지”라고 했더니, “처제... 일이 없어?” 또 그러는 거 있지.
백수가 무슨 출생의 비밀도 아닌데, 형부가 알게 된 게 영 신경 쓰였다. 그런데 언니는 눈치 없이 조카들한테까지 이모 브이로그 좀 보라고 했다지 뭔가! 난 순간 짜증이 났고, 언니는 쓸데없이 해맑았다.
나: (왕짜증 톤으로) 애들한테는 왜 얘기했어!
언니: 많이 봐주면 좋잖아.
나: 이거 애들 보라고 만든 거 아니거든. 너 같으면 조카 보는 데서 '나 백수입네' 하고 싶겠냐?
언니: 아이고 이 사람 빼고, 저 사람 빼고 그럼 누가 보냐? 처음이니까 지인들이 많이 봐줘야지.
나: 지인들이 볼까 봐 걱정이구만 뭔 소리야!
그래, 내 채널은 언니가 잠자코만 있으면 지인들이 볼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채널이었다. 문제는 지인들뿐만 아니라 지인 아닌 사람들도 보지 않는 조회수 10, 20 언저리의 채널이라는 것이었고. 물론 아직 낙담할 일은 아니었다. 고작 유튜버 2개월 차에 불과한 내가 쯔양이나 곽튜브처럼 되길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희망적인 건 더더욱 아닌 것이 그냥 계속 부연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원하는 연봉을 말하라고 했을 때도 내가 원하는 연봉을 말하라는 것인지, 그들이 원하는 연봉을 맞추라는 것인지 모호했고(지금에서야 난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무엇이 됐건 그 숫자라는 것도 명확지가 않았다. 나의 유튜브 조회수라는 것도 앞으로 몇십, 몇백만 단위로 훌쩍 뛸지, 아니면 지금 상태 그대로 바닥을 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생의 본질은 '불확실성'이라더니 이놈의 삶, 확실한 게 하나도 없고, 그러니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밖에.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눈앞이 부옇더라도,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몰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백수가 된 지금도 뒤로 가고 있진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