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오늘, 아픈 손가락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소파에 기대어 다 함께 티비를 보고 있었다. 나름 평온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 옆에 앉은 첫째 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 있어?"라는 나의 물음에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대화를 피했다.
우리 집 첫째는 항상 그랬다. 속 이야기를 잘하지 않았고, 말 수가 적은 편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는 혼자 방으로 들어가서 감정을 삭이는 스타일이다. 무슨 일이 분명히 있구나 싶었다. 나는 조용히 안방으로 첫째 딸을 불렀다. 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말이다. 안방 침대에 앉아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너 지금 어떤 기분인 거야?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나는 딸의 눈을 다정히 바라보며 물었다.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이면서 눈물을 흘리던 딸아이.
"다들 동생만 사랑하고 나는 사랑해 주지 않는 것 같아요. 나도 아직 어린아이인데..."
순간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 얼굴에서 내 얼굴이 비춰 보였다. 항상 이해만 해야 하고, 항상 양보만을 해야 했던 아이. 첫째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런 생각이 들게 해서 너무 미안했다. 나는 딸의 손을 쥐고 말했다. 엄마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우리 가족이 얼마나 너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리고 사실 엄마도 너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노라고.
순한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는 맏이. 어쩌면 그건 맏이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욕구나, 동생들의 욕구, 선생님의 욕구, 친구의 욕구를 모두 쉽게 받아들이고 따르는 맏이들이 많다. 자신만의 색을 점점 잃어가며 순종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첫째 아이들이 나는 너무 아프다. 맏이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전달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과하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자신을 뒷전에 두게 된다.
태연한 미소와 따뜻한 성품, 그리고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눈빛으로 맏이들은 주변에서 착한 아이로 소문이 자자한 존재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한다. 이 착한 이미지는 그저 사랑받기 위해 부단히 도 애쓰다 만들어진 모습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맏이들이 참 불쌍하고 안쓰럽다. 내 안에 내가 없는 그 느낌...
울음을 터뜨리는 딸아이를 보며 나도 같이 눈물이 흘렀다. 누구보다 맏이의 고통을 잘 알면서 왜 나는 이를 대물림했을까? 그래도 용기 내어 나에게 마음을 보여준 첫째 아이가 대견하고 멋져 보였다. 첫째 딸아이와 난, 착한 아이로서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함께 배워나가자고 이야기 나누었다.
이 세상 모든 맏이들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다. 늘 짠하고 안쓰럽고 애틋한 첫째. 고작 몇 살밖에 차이 나지 않은 동생을 위해 엄마노릇을 해가며 보살피는 우리 첫째들. 응석 부리는 아이로만 자라야 할 어린 시절부터 더 어린 동생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스레 다 큰 아이 취급받으며 자란다. 왜 맏이는 그 나이보다 더 크게만 느껴질까? 나는 분명 그리 키우지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내 맘처럼 되지 못했다. 첫째에 대한 사랑에는 엄마의 기대감이 더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첫째 아이의 우는 마음을 들여다보며 진심을 담아 사과해 본다. 엄마가 늘 고맙고 미안해, 사랑한다.
열두 번째 오늘, 끝.
• 오늘의 질문 일기•
Q1. 나에겐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 있나요?
Q2. 안 아픈, 덜 아픈 손가락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