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재앙 같은 청춘이여 오라, 아름답게 부서져버릴 마음이라면 더더욱
-이은규, <세상에서 가장 긴 의자>
일주일이 넘는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 동안 캐나다에 다녀왔다.
혼자 가는 거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출발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캐나다는 무비자로 갈 수 있지만 eTA라는 여행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국의 ESTA와 비슷한데 이 사실을 출발 전날 오후 2시쯤에 깨달아버렸다.
24시간 후에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여행 허가가 없는 것이었다.
바로 신청해 놓고 인터넷에서 후기를 검색했는데, 1시간 만에 승인받았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며칠이나 걸리는 바람에 결국 캐나다에 못 갔다고 했다.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금전적 손실이 있을 뿐, 며칠 기다렸다가 가거나 집에서 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연휴 기간 동안 기숙사 전체가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에 잘 곳이 없어지는 상황이었다.
지낼 곳을 찾아야 하는데 언제 eTA를 승인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 대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아닌 육로로 캐나다에 들어가면 eTA가 필요 없다는 말을 보고, 뉴욕에서 기차로 몬트리올에 가는 방법까지 알아봤다.
그러다가 다행히 오후 6시쯤에 승인을 받았다.
금요일이라 퇴근 시간이 지나면 승인을 못 받을 줄 알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보통 캐나다 동부를 여행하면 토론토나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계획을 짜는데, 나는 퀘벡이 목적이어서 몬트리올은 퀘벡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한 경유지였다.
그래서 캐나다 도착한 날 하루 자고 다음날 오후까지 살짝 구경한 다음에 떠나간 곳이다.
몬트리올에서 캐나다와 미국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몬트리올은 캐나다에서 굉장히 큰 대도시인데, 고층빌딩과 맥길대학교가 모여 있는 번화가에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차도가 대부분 왕복 2차선이고 일방통행인 도로도 많아서 놀랐다.
번화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모두 이삼 층 규모의 주택가라 한적한 유럽 도시 같았다.
그리고 퀘벡 주이다 보니 프랑스어를 주로 쓰는데, 영어가 병기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관광객을 응대할 때 하는 영어에서 그들의 모국어는 프랑스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몬트리올은 Mount Royal이라는 큰 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라서, "Montreal"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산에서 강까지 도시가 이어져 있어서 경사가 어마어마했다.
샴페인과 시카고는 모두 평지였는데 말이다.
둘째 날 아침 등산하러 등산로의 입구에 가기 전까지도 등산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캠퍼스 체육관에서 매일 천국의 계단을 오르며 단련한 체력으로 열심히 올라갔다.
생각보다 등산이 재미있어서 한국에 돌아가면 등산에 또 도전해 보기로 다짐했다.
일요일 아침이라 등산객과 공원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보이는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도시 옆에 이렇게 큰 공원과 산이 있다는 게 살기 좋아 보였다.
몬트리올에서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은 스모크미트 샌드위치, 베이글, 그리고 푸틴이었다.
스모크미트 샌드위치는 첫날 저녁에 먹었다.
고기가 정말 많고 맛있었지만 한 번으로 충분한 맛이었다.
베이글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현금으로만 결제가 가능하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다.
후기를 찾아보니 푸틴은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라 최대한 평이 좋은 곳을 찾아갔다.
푸틴은 기본적으로 감자튀김과 치즈커드, 그레이비소스가 더해진 음식인데, 내가 먹은 건 포르투갈식 치킨이 올라간 푸틴이었다.
음식 양은 미국과 비슷해서 3번에 나눠먹고도 남았다.
이것도 맛있었는데 한 번으로 충분한 맛이었다.
몬트리올도 한적한 곳이라고 느꼈는데 퀘벡은 비교도 안 되게 여유롭고 아기자기한 도시였다.
올드퀘벡이라는 구시가지가 주요 관광지이고, 성곽으로 신시가지와 구분되어 있다.
몽모랑시 폭포에 갈 때 버스를 타러 신시가지 쪽으로 나가 보았는데, 빌딩도 많고 도시 느낌이었던 반면, 구시가지는 유럽식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올드퀘벡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라 그렇다고 했다.
한국에는 드라마 <도깨비>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올드퀘벡이 역사적으로 캐나다에서 중요한 도시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퀘벡의 대표 랜드마크이자 도깨비 호텔로 알려진 샤토 프롱트낙은 예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대접할 정도로 역사적인 장소이고, 퀘벡 성당은 캐나다 교회의 모체라고 한다.
사실 프랑스어를 쓰고 유럽식 건물들이 남아 있는 건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인데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껴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에서도 많이 하는 생각이었다.
큰 행사가 있을 때 한국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이 땅에 원래 살았던 원주민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The University of Illinois is aware that it sits on what was once native land, occupied by multiple Indigenous peoples including the Peoria, Kaskaskia, Peankashaw, Wea, Miami, Mascoutin, Odawa, Sauk, Mesquaki, Kickapoo, Ojibwe, Chicksaw and Potawatomi."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라 신기했는데,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인지하려고 노력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어떤 노력을 더 하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인지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어쨌든 한국인이라 도깨비 투어를 했다.
도깨비 언덕에서 삼각대로 사진도 열심히 찍고, 도깨비 분수와 크리스마스 소품샵, 도깨비 문도 가보았다.
엽서를 사서 한국으로 보내는 편지를 쓰고 도깨비 우체통에도 넣어보았다.
내가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퀘벡이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고 관광지들이 서로 도보 거리에 있다 보니 기념품샵에서 만난 한국인들을 도깨비 언덕에서 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리니까 마음이 안정되었다.
도깨비에 나온 곳들을 전부 둘러보고 나서 다시 유튜브 영상을 보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저곳에 나온 장소들을 가보았으니 어떤 경로를 따라 주인공들이 걸어갔을지 상상되었다.
<도깨비>는 나에게 특별한 드라마이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 넷플릭스를 구독하다가 드라마를 너무 안 봐서 해지할 정도로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서, 내가 본 몇 안 되는 드라마는 그걸 볼 때 했던 생각들이 기억난다.
<도깨비>는 나중에 유튜브로 명장면을 여러 번 돌려볼 정도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드라마였다.
스토리는 다소 유치하지만 영상미가 예쁘고 OST도 좋고 배경이 가을부터 겨울까지인 것도 좋았다.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하는 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줘서,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사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특히 <사랑의 물리학> 시가 나오는 장면과 은탁이 분수 앞에서 기억을 되찾는 장면을 제일 좋아하는데 둘 다 퀘벡에서 찍은 장면이었다.
은탁이 분수에서부터 소품샵까지 어떻게 뛰어갔을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생각보다 멀리 뛰어갔구나 싶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셋째 날부터 눈이 오기 시작했다.
눈 덮인 퀘벡은 정말 아름다웠다.
첫날 아침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고 도깨비 언덕에 올라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겨울을 11월부터 경험하다니.
이제 정말 겨울이 오는구나.
싸늘한 겨울 공기에 눈이 입혀지는 분위기가 사랑스러웠다.
눈이 와서인지 날씨가 덜 추워져서 몽모랑시 폭포에 다녀왔다.
몽모랑시 폭포는 캐나다에서 나이아가라 다음으로 큰 폭포이다.
폭포 아래쪽에서 보는 풍경이 멋있는데, 겨울에는 안전 문제 때문인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나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았다.
그래도 폭포 위 나무다리는 건널 수 있었다.
생각보다 무서워서 얼른 건너려고 했는데 어떤 분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셔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찍어드리기까지 했다.
폭포 위에서 보니 폭포보다도 저 멀리 보이는 강과 산이 멋있었다.
나는 대자연을 좋아하나 보다.
겨울의 고요함 속에서 잔잔한 강의 표면은 얼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얼어 있지 않은 것만이 가지는 종류였다.
그곳에서 공기를 들이마시니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퀘벡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겨울을 한 층 더 느끼게 해 주었다.
내가 여행한 주간에 시작해서 크리스마스이브 전날까지 연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던 행사였다.
생각보다 규모도 크고 밴드 공연과 인형극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거의 100개가량의 상점들이 있었는데, 치즈퐁듀, 프레첼, 초콜릿, 메이플시럽, 츄러스, 빵, 와인 같은 음식도 많았고, 목도리, 모자, 장갑 같은 의류나 비누도 있었다.
와인과 의류가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초콜릿이나 누가를 시식해 보라고 주시기도 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해주시기도 했다.
누가 시식을 엄청 많이 시켜주셨는데 너무 맛있고 친절하셔서 기념으로 하나를 샀다.
누가는 머랭과 비슷한 디저트인데 쫀득쫀득하고 견과류가 들어 있다.
나는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나온 걸 샀는데, 슈톨렌과 비슷한 맛이 났다.
우리 가족은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슈톨렌을 사는데 이제 정말 크리스마스인가 보다.
이곳의 음식들은 프랑스 음식을 캐나다식으로 바꾼 것들이 많은데, 크로와상이나 누가 같은 프랑스 디저트도 유명하고, 초콜릿 퍼지가 특산품이다.
소시지 모양 초콜릿을 파는 유명한 초콜릿 퍼지 가게가 있었다.
처음에는 진짜 소시지에 초콜릿을 바른 줄 알고 살지 말지 고민했는데, 찾아보니 초콜릿을 소시지 모양으로 만든 것이어서 망설임 없이 샀다.
파베 초콜릿이 생각나는 부드러운 식감인데 고급스럽고 진한 맛이었다.
메이플 시럽은 말할 것도 없어서 쿠키, 사탕, 아이스크림, 팝콘, 크레페, 오트밀, 폭립 등 온갖 음식에 메이플 시럽이 들어가 있었다.
퀘벡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은 메이플 오트밀이었다.
추워서인지 칼로리가 높고 단 음식이 많았는데, 인공적이지 않고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에는 마켓에서 치즈 퐁듀를 먹어보았다.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짭짤하고 부드러운 치즈가 가득 든 뜨거운 빵을 먹으니 천상의 맛이었다.
치즈 퐁듀로 여행을 마무리하고 몬트리올로 향했다.
역시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치면 안 되는 법이다.
다음날 새벽 비행기를 타야 해서 호텔을 공항 바로 옆으로 잡았는데, 원래 계획은 몬트리올 중앙역에 내려서 어떻게든 호텔에 가는 것이었다.
세부적인 계획은 나중에 짜겠다는 무책임한 태도로 기차에 타고, 중앙역에 도착할 때쯤 길 찾기를 했다.
그런데 호텔까지 40분 정도 걸리는 데다가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이곳은 해가 4시쯤에 져서 이미 깜깜한 상태라 혼자 다니기가 무서워서 걱정되었는데, 구글 지도를 보니 지금 타고 있는 기차를 타고 쭉 가면 호텔로부터 도보 10분 거리에 내릴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몬트리올 중앙역에 내리기 10분 전에 기차표를 살 수 있는지 검색해 보았지만 티켓이 뜨지 않았다.
일단 역에 내려서 다시 검색해 보아도 티켓이 안 떠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해졌다.
그때 지나가던 직원이 어디 가려는 건지 물어보았다.
퀘벡에서 왔는데 이 공항 근처 역에 가고 싶어요.
올 때 샀던 티켓을 보여주니까 저 줄에 서면 된다고 하셨다.
알고 보니 내 티켓으로 몬트리올에 있는 역이라면 다 갈 수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다음 기차를 타고 공항 근처 역까지 갔다.
기차역에서 10분을 걸어야 호텔이 나오는데, 구글 지도를 보면서 걸어가려고 했지만 기찻길과 차도밖에 보이지 않고 걸어 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무서워서 다시 역으로 돌아와 멍한 상태로 있었는데, 지나가던 직원이 어디 가려는 건지 물어보았다.
쉐라톤 호텔에 가고 싶어요.
직원이 공항에 데려다줄 테니까 거기에서 쉐라톤 셔틀을 타라고 하셨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공항으로 가는 셔틀을 탔고, 공항에서 쉐라톤 셔틀을 타고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다.
다음날에는 6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2시에 일어나 3시에 호텔 셔틀을 타고 공항에 갔다.
5시 반부터 탑승이 시작된다고 했는데 공항 직원들이 늦게 출근하는지 4시까지 공항 검색대가 안 열렸다.
다행히 일찍 간 덕분에 줄 거의 맨 앞에 서 있어서 검색대가 열리자마자 들어갔고, 미국 입국 심사도 금방 끝나서 5시쯤에 모든 절차를 통과했다.
캐나다라 그런지 미국으로 가는 사람들은 다른 게이트에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고 입국 심사까지 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혼자 다녀온 첫 여행이 해외라서 처음과 끝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별 탈 없이 무사히 다녀왔다.
여유롭게 혼자 여행하는 것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조금 더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내 감성에 딱 맞는 여행지, 퀘벡을 선택해서 알차게 구경하고 잘 쉬다 올 수 있었다.
돌아온 샴페인도 이제 겨울이었다.
겨울은 연말연초의 계절인데, 이때만 느낄 수 있는 설렘이 좋다.
2023년도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다니.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일이 일어난 해인 것 같았다.
그만큼 많이 성장하고 단단해지고, 연초에 세웠던 새해 목표들도 많이 이루었다.
수업도 하나둘씩 종강하고, 2주만 있으면 시험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돌아가는 일이 설렌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교환생활 동안 이루고 싶었던 것들을 잘 마무리하고 가는 기분이라 뿌듯한 마음이 컸고, 돌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한국에 가면 나를 누구보다도 반겨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혼자 캐나다에 다녀오며 느낀 건 공항에서 나를 배웅해 주고 마중 나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