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집에 가고 나서, 나는 딸과 이런저런 놀이도 하고 다음 달부터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싶은지도 물어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감정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여서 딸에게 온전히 집중해서 놀아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단순노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100조각 퍼즐을 제안했다. 다행히 딸은 나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딸의 방 앞 복도에서 멍 때리며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약 6년 전에 이사했다. 그런데 딸이 만 2살 정도 됐을 무렵에 아랫집과 층간소음 문제로 약간의 다툼이 생겼다. 내가 재택근무로 집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엄마가 딸을 봐주고 있었다. 당시 딸은 걸음마는 한참 전에 뗐고, 이제 뜀박질에 재미를 붙여가던 시기였다. 엄마는 뛰기 시작한 손녀딸이 예뻤는지, 노트북으로 열심히 업무를 하고 있던 나의 뒤로 딸과 함께 술래잡기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리나케 아랫집에서 인터폰 시스템을 통해서 연락이 왔다. 서로 날 선 말들이 오갔고, 아랫집 남자가 홧김에 던진 ‘방치’라는 비난이 나의 뇌관을 건드리면서 대화가 격해졌다. 인터폰 전화 시스템의 1회 통화 제한 시간 때문에 두어 번 통화하고 나서 결국 내가 사과하는 것으로 대화를 일단락 지었다. 층간소음을 방지하지 못하도록 설계한 아파트 시공사도 미웠고, 두 살배기의 뜀박질조차 이해 못 해주는 아랫집이 원망스러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 아파트의 층간소음은 결코 견디기 쉬운 수준은 아니라서 마냥 아랫집만 탓할 수는 없었다. 이제 갓 뛸 수 있게 된 딸에게 오히려 뛰지 말라는 잔소리를 끝없이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아내와 나는 둘만의 가족회의를 개최했고, 한창 뛰어다녀야 할 딸에게 뛰지 말라고 내내 잔소리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여러 방안을 모색한 끝에 거금을 지출해서 층간소음 매트 중에서 가장 두꺼운 3cm 매트 시공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층간소음 매트가 설치된 복도에서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은 큰 실수였다. 층간소음 매트는 방문을 피해서 시공되어야 했기에, 방문에 진입하기 직전의 공간을 아우르는 거실, 부엌, 복도에만 설치한 상태였다. 딸 방에는 층간소음 매트를 따로 설치할 수 없었고, 층간소음 매트에서 방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로봇청소기용 문턱 경사로까지 울퉁불퉁하게 설치되어 있어 무척 혼란스러운 공간이었다. 하필이면 딸과 나는 그 복잡한 방문 입구에서 퍼즐을 완성하는데 약 30분 정도 소요했고, 딸에게 잘 시간이라고 주장할 명분이 충분한 시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양치하고 잘 준비를 하러 가자고 딸에게 말했는데, 그 이후 사달이 나고 말았다.
딸은 퍼즐을 완성했으니 완성된 퍼즐을 자기 방으로 옮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매트 위에서 완성한 퍼즐을 울퉁불퉁한 문턱 경사로 너머로 옮긴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였기에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완성 후에 당연히 퍼즐을 분해해서 다시 상자 안에 넣을 거라고 넘겨짚었던 나의 불찰이었다. 메마른 겨울날 들불이 번져나가듯 순식간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퍼즐은 못 옮기니까 놔두고 얼른 양치하고 잘 준비하자”
“싫어”
나는 딸의 방 안 습기 조절을 위해 젖은 수건을 널면서 딸과 이 대화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탈출구는 없었다. 완성된 퍼즐을 방으로 옮겨야만 끝날 대화였다. 신속하게 상황을 종료하며 딸을 얼른 재우기 위해 이내 굴복하고 다시 퍼즐을 옮기는 것을 시도해 봤는데, 이는 평소에 아내와 내가 가졌던 주요 육아 철학에 크게 반하는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떼를 써서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경험을 시켜주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지양했다.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해서 들어줄 수 있는 일은 요구받자마자 들어주는 대신에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들어주지 않았다. 물론 모든 일들에 대한 의사결정을 미리 할 수 없지만, 우리 부부는 평소에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가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이행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딸은 3~4살 무렵에 드물게 떼를 쓰며 드러눕는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 부부는 딸의 안전에 문제가 없는 선에서 딸의 생떼를 완전히 무시했고, 결국 떼를 써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딸은 울고불고 소리 지르면서 떼쓰는 작전을 이내 폐기했다. 이는 거꾸로 우리 발목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부부가 본래의 뜻과 다르게 딸의 요구에 실수로 동의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해줘야 했다. 그래야 우리가 딸과 체결한 암묵적인 규칙이 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모든 집에는 그만의 룰이 있고 이것이 바로 우리 부부가 정한 원칙이다. 딸도 이런 부모 아래에 태어난 게 어쩔 수 없는 팔자고 운명이려니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딸을 키운 5년 넘는 기간 동안 지켜온 이러한 대원칙을 깨면서 퍼즐을 옮기는 시도를 한 것은 내가 그만큼 피곤했다는 증거였다. 첫 번째로 시도한 방법은 단순히 바닥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퍼즐을 문턱 경사로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시작하자마자 퍼즐의 첫째 행부터 부스러지기 시작했고, 이 시도는 퍼즐이 무너지기 전에 신속하게 중단했다. 두 번째 시도는 퍼즐 아래에 판때기를 받쳐서 옮기는 것이었다. 얇은 마분지를 퍼즐 아래에 밀어 넣으려고 했는데, 이 역시 퍼즐의 붕괴를 일으키면서 적절치 못한 시도가 됐다.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수많은 대처 방법을 머릿속에서 떠올려 봤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결국 완전 해체 후 퍼즐을 다시 맞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는 딸을 빨리 재우기 위해 집중하고 있던 내게는 수행할 수 없는 과제였다.
“오늘은 못 옮기겠다. 아빠가 내일 다시 맞춰줄게.”
“그래도.”
여기서 ‘그래도’라는 딸의 발언에는 나의 제안을 수용하기 어렵고 기어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냥 내일 하자.”
“그래도.”
“내일 꼭 해줄게.”
“그래도.”
트집 순도 100%의 ‘그래도’ 3연타는 아내에 대한 걱정과 체력의 부침으로 인해 이미 지치고 예민해진 내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으며, 딸이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지 않아서 생기는 아쉬움, 원망, 답답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딸이 나를 화나게 하면 나는 잠시 자리를 피하거나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갖고는 했다. 이번에도 역시 몸을 돌려 심호흡하면서 애써 딸의 요구를 무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딸은 거의 울면서 연신 “그래도~”를 외치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내 머릿속의 ‘버럭이’가 나머지 감정들을 전부 밀쳐내고 운전대를 차지했다. 그동안 딸을 훈육할 때면 단호하게 얘기하더라도 소리 지른 적은 없었다. 소리 지르는 것은 분풀이일 뿐,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뒷전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딸을 키우면서 가장 크고 화난 목소리로 우리 집 전체에 울려 퍼질 만큼 목청 높여 소리 질렀다.
“그럼, 니 맘대로 해!”
난생처음 들은 아빠의 고함에 딸 역시 보인 적 없는 반응을 보였다. 울면서 퍼즐을 옮기겠다고 트집 잡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바닥에 앉아 있던 딸의 두 눈은 공허해진 채로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었다. 딸은 울고 있긴 했지만, 소리 내어 울거나 흐느끼기에는 처음 본 아빠의 모습이 너무 놀랍고 무서웠는지 마음속으로만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던 나는 딸의 상태를 살피고는 얼른 가서 온몸으로 꼭 안아줬다.
“아빠가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아빠가 정말 정말 미안해.”
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온몸을 잔잔하게 떨면서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딸에게서 느꼈던 짜증은 금세 증발했고,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딸과 몸을 비비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여태껏 나 자신에게 마음의 여유를 허용하지 않다 보니, 아내가 아프고 나서 딸과 내가 서로를 이렇게 꼭 안아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아직도 아내가 없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은 나도 딸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빠가 됐으면서도 이기적으로 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히려, 딸은 지금껏 어리광을 피우지 않다가 처음으로 내게 짜증을 부렸는데, 그것 하나 받아주지 못한 못난 아빠였다. 나도 혼란스럽고 힘들지만, 딸은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일 것이고 지금껏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잘 버텨왔다. 사실 딸이 나보다 훨씬 더 괴로울 테고, 엄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의 농도는 나보다도 훨씬 짙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빠라는 사람으로서 기특해하고 고마워하기는커녕 내 생각만 했던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딸은 아빠의 사과를 받아주면서 좋든 싫든 아빠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잔인하게도 딸에게는 다른 선택 사항은 없었다. 딸에게 두 번, 세 번 사과하면서 내가 펼칠 수 있는 가장 넓은 가슴으로 품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잘 견뎌보자며 또 나 혼자 다짐했다. 그렇게 한바탕 치르고 나니 딸과 나는 오히려 해우소에서 급한 용무를 처리하고 나온 사람들처럼 차분해졌다. 비교적 평화로운 취침 루틴을 보내고 나니, 딸은 평소보다도 금방 잠을 청했다. 곤히 잠든 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조금 전에 했던 짓들이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던 엄마를 병마에게 빼앗긴 지금, 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제 아빠일 테다. 그런 사람이 책임감을 버리고, 순간의 감정에 패배했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내가 내 손으로 딸을 직접 붕괴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딸의 곁을 지켜줘야 한다. 벅차기도 하면서 야속하지만, 이 또한 우리 팔자다.
가족 구성원 전체의 삶의 질과 생활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을 겪고 나니 오히려 삶의 우선순위가 명확해졌다. 나는 약 3년 전에 생애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다이어트를 해서 성공적인 체중 감량을 이룬 적이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나는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골문을 지켰던 이운재 선수처럼 물만 마셔도 살찌는 체질이었다. 식단과 운동량 관리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순식간에 불어나는 신체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다이어트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최근 몇 년간 무던히 노력해 왔다. 고단백질 식단과 꾸준한 근력 운동을 유지하면서 만족스러운 몸을 만든 적은 없더라도, 살을 다시 빼야겠다는 위기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몸매도 중요하지만, 건강을 지킨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끼며 지속적으로 해왔던 근력 운동이 나의 중요한 취미였다. 또한, 지속적인 근력 운동과 평소의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인해 망가진 신체 밸런스를 잡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바디 컨디셔닝 관리도 받고 있었다. 이 또한 내 몸을 지키기 위한 일환이었다. 그렇지만 우습게도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가장 먼저 포기한 것 또한 내가 집착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신체 관리 루틴이었다.
취미 생활은 잉여 자원에서 비롯된다. 먹고살 만한 재정 상태와 남들에게 구애받지 않고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야만 즐길 수 있는 게 바로 취미 활동이다. 사실 엄마한테 딸을 재워 달라고 부탁하면서 항상 그랬듯이 밤에 헬스장을 다녀와도 됐다. 하지만,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에 딸을 신경 쓰고 있는 엄마가 딸을 재우기까지 해야 한다면, 사실상 하루 종일 보육을 해야 하는 것인데, 아들의 부탁을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엄마에게 그것까지 부탁할 수 없었다. 나의 취미 생활을 가족원의 건강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딸을 재우고 간단한 집 정리를 하고 나면 이미 녹초가 되어 있기도 해서 운동은 사치 같이 느껴졌다. 저녁 10~11시쯤, 하루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자유시간은 보통 멍하니 유튜브를 보거나, 아내가 건강해진다면 보여주기 위해 쓰는 간단한 투병일지를 작성하는 데 사용하게 됐다. 결국 다니고 있던 헬스장과 바디 컨디셔닝 센터에 장기 이용권의 일시 정지를 신청하기로 했다. PT 트레이너 선생님과 컨디셔닝 센터 원장님께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나는 체중 감량 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운동뿐만 아니라 식단 관리에도 항상 신경을 썼다. 각자의 자정 작용이 발동되기를 기대하면서 친구들과 각자의 하루 식사 메뉴와 식사 시간 등을 인증했던 적이 있었다. 남들에게 내 식단을 보여주면 그나마 깨끗하게 먹고 간식도 최소한으로 먹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믿음이 각자에게 있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단 공유를 중단한 이후에도 나는 계속 사진을 찍고 식사량 기록 앱에 나의 식단을 기록하면서 하루 섭취 칼로리를 관리해 왔다. 한번 시작한 루틴을 굳이 멈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아내가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난 이후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음식을 정성스럽게 한 그릇에 담는 것도, 그릇에 담으면서 음식의 무게를 일일이 재는 것도, 내가 먹은 시간과 메뉴를 굳이 기록하는 것들도 모두 부질없고 하찮아 보였다. 아내는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는 사진을 찍지 않을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휴대폰 갤러리에 있는 마지막 식단 사진은 여전히 아내가 쓰러지기 전날에 머물러 있었다.
예전에는 내 우선순위에 가족, 일, 운동, 체중 관리 등이 있었다면 아내가 아프고 나서 비로소 나만의 개인적인 목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개인 건강, 운동, 체중 관리는 이제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제는 오히려 가족이라는 두루뭉술한 개념보다도 아내의 건강, 딸의 안정과 일상생활, 부모님의 신체 및 정신 건강 등의 구체적이고 새로운 당면 과제들이 선명해졌다. 적어도 오늘 밤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는 딸과 날 선 감정들로 대치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내게 시간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여유도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