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청승맞은 눈물로 출근하고 오전 시간을 정신없이 보낸 후, G병원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오늘은 이전의 이틀보다 5~10분 늦게 나온 데다가 택시 기사마저 내가 요청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면회 시작 시각인 11시 40분보다 3분 정도 늦게 도착해서 마음이 매우 급해졌다. 평소라면 택시 기사에게 가벼운 볼멘소리라도 했을 텐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부리나케 택시에서 내려서 뇌혈관계 중환자실까지 뛰어 올라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내가 오전에 MRI 검사를 받는 바람에 어차피 제시간에 면회를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간단한 계산과는 다르게 간호사는 시작 시각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12시에 면회를 마무리해야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20분의 면회 시간조차도 짧아서 초조한데, 내게 그 시간마저 앗아가겠다고 하니 답답하고 억울해서 하마터면 역정을 낼 뻔했다. 내가 유일하게 아내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이런 식으로 뺏길 수는 없다는 생각에 택시 기사한테 못한 볼멘소리까지 얹어서 내 나름의 예의 있는 투정을 부려봤다. 그런데도 엄청난 원칙주의자였는지 그 간호사는 끝까지 12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민해진 상태에서 이런 일을 겪으니 그만큼 더 억울했다. 원칙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정해진 면회 시간에 아내를 만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원칙이 그렇다고 하니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원칙주의자 간호사가 2번 방 밖을 나서고 나니 다른 간호사가 최대한 면회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해서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검사를 마치고 온 아내는 피곤한 것인지, 원활한 검사를 위해서 안정제를 맞은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매우 지쳐 보였고, 오늘도 여전히 어떠한 의사 표현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부터 스테로이드 투여가 시작된다고 해서 내심 일말의 회복이라도 기대한 나의 희망은, 남편이 왔음에도 어떠한 인기척도 없는 아내의 상태를 보고 무참히 깨졌다. 당연히 약효가 당장 나타나지 않겠지만, 어제까지 투여가 완료된 면역 글로불린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아내를 맞이하러 갔는데, 이 역시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이틀간 똑같은 말만 반복했던 게 아내에게 못내 미안하기도 했고, 보호자로서의 책무를 게을리하는 것 같아 병원 가는 길에 다른 말들을 무수히 떠올려봤지만, 적절한 멘트들은 끝끝내 생각해 내지 못했다. 오늘은 심지어 면회 시간이 짧아져 생긴 초조함 덕분에 더 생각해 내기 어려웠다. 결국 죄책감만 안고 아내를 만났는데 어떠한 멘트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제와 그저께는 그래도 반응이 있는 정도였다면, 오늘은 완전히 곯아떨어진 사람처럼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지난 토요일에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우려했던 호흡곤란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희망의 불모지에서 어떻게든 한 줄기 빛을 찾고자 했던 내가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자기 위안이었다. 아직 바닥이 깊어진 것 같지 않았다.
아내가 아예 반응하지 않으니 새로운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떠오르는 말이 있다고 한들 무의미해 보였다.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긴 했지만,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오히려 옆에서 아내의 수액을 갈아주면서 각종 처치를 해주는 간호사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게 되었다. 아내의 상태는 어제보다 개선되거나 악화되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되냐고 물어봤더니 아주 간단한 의사 표현은 된다고 했다.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몸소 시범까지 보여줬다. 아내의 어깨 부근에 손을 올리고 아내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남편이 왔다고 소리를 질렀더니 아내가 그제야 겨울잠에서 깨는 곰처럼 약간의 움직임을 보였다. 고개를 간호사 쪽으로 약간 돌리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어제처럼 옅게 끙끙대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든 간호사가 하는 말에 대답하면서 살아 있다는 인증을 하려고 하는 사람 같았다. 약간의 반응이라도 봤기에 혹시나 자극될까 하는 마음에 그저께 보여줬던 딸의 동영상을 다시 틀어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좌절한 나를 위로해 주듯 간호사가 면회를 시작하면서 했던 약속을 지켜줘서 예정된 면회 종료 시각보다 5~10분 정도 더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오늘도 장모님과 아내의 이모가 와서 내가 면회하는 동안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점심 식사와 담당의 면담을 함께 했다. 각종 검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아내가 아픈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양성 반응의 결과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답답하기만 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아픈 곳을 밝혀내면 치료법도 명확해질 텐데, 혈액 검사, MRI 검사 등의 다양한 검사에서 특별한 소견이 나오지 않아 담당의 역시 똑 부러지게 병명을 말해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자가면역뇌염일 확률이 가장 높았으나, 길랭-바레 증후군의 사촌일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었다.
일주일 동안 중환자실에 머무르면서 다양한 검사들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확실한 병명이 나오지 않자, 나는 점점 갑갑하고 두려워지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병을 상대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아내의 상황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도 괴로웠는데, 병명을 모르다 보니 장황한 설명을 하는 것이 내 고통을 연장하고 있었다. 병명을 알고 있으면, 증상들에 관해서 별도로 설명할 필요 없이 병명만 얘기해 주면 상대방이 알아듣거나 찾아보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알 권리와 대화의 용이함에 대한 욕구를 초월하는 두려움은 정확한 병을 몰라서 적절한 대응을 제때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기인했다. 내가 골든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아내가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장애를 얻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면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괴롭고 답답해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병원에서 적시에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길 기대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를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부모님과 길이 엇갈려 혼자가 된 어린아이가 벤치에 앉아서 부모님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저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까, 누가 나를 찾으러 오긴 할까.
오늘도 담당의와 상담하면서 역시나 그가 하는 말들을 따라가기 버겁다는 것을 체감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력이라고 했던가. 이제는 혼자서 버겁다는 것을 깨닫고 전공의인 아내의 이종 사촌 C에게 혹시 시간이 되면 담당의와의 상담에 함께해 줄 수 있을지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연락해 봤더니 감사하게도 흔쾌히 내일 상담에 함께 해주겠다고 했다. 물론 C가 온다고 아내의 상태에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놓치는 줄도 몰랐던 것들을 분명히 짚어주면서 보다 정확한 아내의 상태 파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하게 됐다.
회사로 돌아가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는 몇 시간을 보냈더니 어느새 또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오늘도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못하는 못난 아빠라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우리 엄마를 만나서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전해줬고, 우리 둘은 딸이 아내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저녁 먹을 때 괜스레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과도하게 많이 물어봤는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던 딸은 이윽고 엄마의 상태를 물어봤다. 계속 그래왔듯 아내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줬다.
“엄마는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래도 어제랑 비슷해서 괜찮은 것 같아. 우리가 계속 응원해 주면 금방 좋아질 거야.”
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이제는 딸에게 계속 아내의 상태를 알려주는 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딸에게 숨기거나 거짓말하기 싫고, 아내가 당연히 회복될 거라고 여기며 시작됐던 일간 보고였는데, 며칠째 중환자실에 누워서 끙끙대는 모습만 보고 왔더니 오히려 의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딸에게 거짓말로 헛된 희망을 주는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오늘까지 아내의 상태를 알려주고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