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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Sep 14. 2024

8-1. 바닥

딸은 다행히 유치원이나 하원 후에 다니는 학원들에 가지 않겠다는 투정은 부리지 않았다. 본인과 엄마를 철저하게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엄마의 부재가 하루 스케줄을 소화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있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떼쓰느라 불참하는 일정은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었다. 안 되는 것은 여지없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은 딸이라서 오히려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부부가 딸을 키우면서 일관적인 교육을 중요시 하긴 했지만, 이런 효과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부모는 지속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자식이 원하는 바를 다 들어줄 것인지, 아니면 부모가 원하는 바를 강요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부모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아무 말하지 않고 선택 유예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 역시 가만히 있기로 한 결정을 내린 것이며, 침묵 또한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책임감을 느끼고 아이와 상호작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이의 결정도 존중해야 하기에 부모로서 그 균형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했던 훈육이 딸에게 이런 상황에서 헛된 희망조차 품지 않도록 해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잘했다 싶으면서도 딸에게서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여지마저 앗아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딱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만으로 딸의 성향이 결정되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육아를 하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도 중요하겠지만, 타고난 기질이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느낀 경우가 많았다. 백지로 태어난다고 생각했던 어린아이들은 오히려 부모가 그리는 그림을 그대로 베끼는 먹지로 태어나며, 그 먹지에 그려지는 그림과 먹지의 투영도는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성격과 후천적인 경험에서부터 기인한다. 나중에라도 딸에게서 그때의 심정을 들으면 좋겠지만, 지금 당장은 티를 내지 않고 버텨주는 것이 정말 고맙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딸의 어리광까지 받아내야 한다면, 무척 견디기 힘든 무게로 다가왔을 테다.


낮에 병원에 갔더니 어제 약속했던 것처럼 C가 장모님과 이모와 함께 와서 중환자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든든한 지원군의 기운을 등에 업고 중환자실로 갔다. 오늘 확인한 아내는 어제의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집중 관리를 받고 있으면 당연히 호전되어야 할 것 같은데, G병원에 입원한 지 6일이 된 시점에도 아내의 컨디션은 우상향 곡선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없이 자가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C와 함께 담당의의 설명을 들으려고 했는데 하필 오늘은 이례적으로 담당의가 직접 아내가 있는 중환자실 병실로 와버렸다. 면회 시간이 끝날 무렵에 온 담당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들으면서 정성껏 반응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C도 이 설명을 듣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궁리하며 들었던 소식들 중 반가웠던 이야기는 우측 다리에 진행되던 마비의 완화였다. 하지만, 잠시라도 마음을 놓았던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그 마비 증세가 이제는 왼쪽 다리 쪽에서 나오기 시작했다고도 일러줬다. 그래도 며칠 동안 걱정했던 하반신 마비 증세가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담당의가 계속 설명을 이어 가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이해의 진입장벽에 봉착했음을 직감했다. 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최대한 빠르게 카톡으로 C를 중환자실 앞에 대기시켰다. 그리고 담당의에게 최근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친구가 와 있어서 같이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으니,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길 부탁했다. 담당의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나는 절박했기에 그가 보내는 부정적 피드백을 가볍게 무시하며, 다급하게 아내에게 인사하고 C가 있는 쪽으로 함께 나갔다. 소개팅처럼 둘을 만나게 해주고 나니 한결 편히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를 보며 다시 설명을 시작한 담당의는 처음에는 나를 보면서 설명했지만, 나의 확신 없는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점점 C와 눈 맞춤을 늘려갔다. 담당의는 최근 며칠간 내게 설명할 때보다 훨씬 생동감 있는 대화를 계속했으며, C 역시 똑바르게 알아듣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전달해 줬다.


길랭-바레 증후군: 확률은 낮으나 뇌척수 검사를 통해 확실히 할 예정

모그(Mog) 항체 뇌염: 피검사 수치가 정상과 이상의 경계선이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스테로이드 치료 예정. 하지만, 현재 임상 증상과는 잘 맞지 않음

자가면역뇌염: 서울대 이순태 교수 연구실에 보낸 항체 검사 결과가 양성이 나오면 바로 리툭시맙 투약 예정


나는 C처럼 상세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리툭시맙이라는 약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기회에 장모님에게 리툭시맙의 강력함과 위험을 꼭 주지 시켜 주고 싶었다.


“선생님, 선제적인 투약을 위해 지금 단계에서 리툭시맙을 넣는 것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 아닌가요?”


내가 굳이 이 말을 꺼낸 것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 지속적으로 리툭시맙 투약을 주장했던 장모님이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의학 지식이 전무한 사위보다는 전문가의 입에서 리툭시맙 투약이 시기상조라는 말을 들으면 그래도 믿고 기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담당의는 정확한 비유라며 지지해 줬고, 장모님한테 기다려야 할 명분을 제공해 줬다. 지금처럼 명확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후유증에 대한 고려 없이 필요 이상으로 대응하는 것은 환자를 위한 치료가 아닌 사실상 보호자를 위한 치료로 느껴졌다. 보호자에게 환자의 안녕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불안감 해소가 오히려 더 큰 결정 요소로 다가올 때가 많다. 가장 아픈 사람은 환자들이겠지만, 곁에서 다른 이유로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바로 보호자들이다.


아내의 보호자라는 역할이 추가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바로 “힘들겠지만 정신 똑바로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환자의 회복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마음 한편에 항상 아쉬웠던 것은 위급 환자의 남편이자 보호자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이 위로받고 싶은 순간들도 많았는데, 연락해 오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99%의 걱정이 환자에 대한 것이었다. 아내가 일주일째 산송장처럼 누워 있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할 때는 의사들이 아내의 컨디션이 바닥을 치고 올라올 테니 기다려보자고 했기에 아내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안 좋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처럼 나를 걱정의 구렁텅이로 안내했다.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마개를 뺄 때 물이 죄다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나쁜 생각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특히 혼자 있으면서 잡념에 빠질 때 이런 순간들이 한 번씩 찾아오는데, 그때 이런저런 나쁜 생각들이 다 들곤 했다. 아내가 영구 손상을 입어서 다시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해 평생 재활만 하는 몸이 되거나, 이순태 교수가 유튜브에서 얘기한 것처럼 중증 장애를 얻게 되는 상상을 꽤 자주 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내가 과연 나와 우리 가족의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내가 다시 웃을 수 있을지, 아내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렇게 되면 딸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이런 생각들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한동안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이러다가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나는 어느새 내 머릿속 어디에선가 상복을 입고 있었다. 난생처음 상주가 돼서 가족, 친구, 지인들의 계속된 조문을 받고 끊임없이 그들과 맞절을 나누며 그들의 품에서 무너졌고,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는 딸은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검은 상복을 입고는 구석에서 울다 지쳐 창백해진 할머니들에게 기대서 책을 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만큼은 만나기 싫었던 친구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운구해 주고 있고, 한동안 면도를 하지 못해 간신 수염이 비겁하게 자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영정 사진을 들고 도살장에 끌려가듯 장례 지도사를 따르고 있었다. 입관할 때의 창백하고 차가워진 고인의 몸과 마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다시 정신 차리면 이럴 확률은 희박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며칠의 시간이 흐르면서 희박하다는 게 0%가 아니라는 것이 점점 부각되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온당치 못한 정신 상태로 살아가는데 남들이 내게 아내와 가족을 위해 정신 차리고 집중하라고 하는 요구와 당부들이 나를 더욱더 지치게 했다. 물론 그들도 적절한 위로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위로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고,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나와 내 가족이 걱정되니 연락은 하고 싶은데, 마땅한 위로를 찾지 못해서 하는 충고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씩은 오롯이 내 안녕만 묻는 사람들의 관심도 받으면서 위로받고 싶었다. 물론,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나뿐이겠냐만, 지금 당장 내게는 우리 가족과 내가 중요했다. 다른 사람들의 군 생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게 연락하는 사람들이 나는 안중에도 없고 아내만 걱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어지럽고 여유가 없어지다 보니 이기적이고 옹졸해져 조심스레 온 연락들이 파파라치들의 예의 없는 사진 촬영 세례처럼 느껴지면서 야속하고 미워지기도 했다. 그들은 신중하게 연락했겠지만, 나는 그 질문들이 부담스럽고 불쑥 물어보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도 했다. 나막신 장수와 짚신 장수의 엄마처럼 연락이 오면 연락이 오는 대로, 연락이 안 오면 연락이 안 오는 대로 모순적인 아쉬움이 가득했다. 내 속에 거친 생각들이 가득해지면 세상 모두가 내게 예의를 차리지 않는 것 같아 언짢았다. 보호자들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없겠지만, 그 이외에 너무나도 다양하고 새로운 불편함을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리툭시맙이 지금 당장 투입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재차 얻으면서 담당의의 담당 간호사와 대화하게 되었다. 그는 내가 매일 면회 오니까, 아내도 곧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줬다. 나는 오히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되더라도 가족이 오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간호사의 말로는 투병 기간이 장기화되거나, 금전적인 곤궁에 처하면 결국 가족들도 발길을 끊는다고 했다. 아내도 분명히 장기전이 될 수도 있는데, 나는 계속 이렇게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병원을 나서기 전에 중환자실 간호사가 부탁한 기저귀와 함께 작은 고무공 2개를 사서 아내에게 교도소 사식 넣어주듯 전해줬다. 면회 중에 간호사와 아내의 상태를 논의하면서 근육 경련이 계속되면서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펴는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을 전해 들었고, 주먹 쥔 채로 손이 굳는 것을 방지하려면 고무공 같은 둥근 물체를 쥐여 주면 좋다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아내에게 고무공을 쥐여 주면 되는 것을 왜 보호자인 내게 이야기하나 했는데, 결국 나더러 사 오라는 말이었다. 아직 전신에 마비가 진행되지 않고 그나마 움직임이 있음에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것인지, 근육 경련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중환자실에서 응급 상황이 있으면 주겠다고 한 연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병원을 나서면서 처음으로 여의도까지 차를 얻어 타기로 했다. 그간 이모나 장인어른이 운전하는 차를 태워달라고 하기 미안했는데, 오늘은 C가 운전한다고 하길래 염치 불고하고 얻어 타기로 했다. 참 여러모로 번거로운 매형이었다. 그래도 여의도로 돌아가는 길에 C한테 의료진 파업 사태와 더불어 아내의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내가 아픈 이유가 만약에 담당의가 말한 가능성 중에서 길랭-바레 증후군에 해당하면, 생각보다 예후가 좋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도 전해줬다. 길랭-바레 증후군은 흔한 병은 아니지만, 워낙 증상들의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해서 의대생들이 공부할 때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된다고 하면서, 그때 배웠던 특징 중 하나가 비교적 양호한 예후라고 했다. 차라리 길랭-바레 증후군이길 바라게 됐다. 이제는 차악책으로 그나마 덜 고통스러운 질병을 기원하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퇴근하고 귀가했더니 엄마가 TV를 보고 있는 딸 모르게 한마디 했다.


“애가 영어 학원 다니는 게 힘들다고 하더라. 한마디도 못 하다가 오나 봐.”


안 그래도 짠했던 우리 딸이 더욱더 안쓰러워졌고, 동시에 영어 학원에 대한 회의감이 더욱 증폭됐다. 만 6세도 안 되는 어린아이가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학원에서 하루에 두 시간씩 앉아 있다가 오는 것은 결국 부모 욕심을 해소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굳이 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학원에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영어 학원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어른들의 편의를 위해서 딸이 희생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원래는 아내와 이런 것들을 상의하면서 결정했지만, 이번만큼은 독단적인 결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4월부터는 딸이 좋아할 만한 피아노, 미술 위주의 학원 스케줄로 재편하는 것도 고려해 보기로 했다.


동시에 딸이 왜 나한테는 영어 학원이 힘들다는 말을 못 하는 것일지 의문스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본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얘기를 했다가 아빠한테 잔소리 폭탄을 맞을까 봐 걱정됐을까? 지금만큼은 아빠 2가 득세하고 있어서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는데 그런 말을 굳이 할머니한테만 하는 딸이 참으로 짠했다. 이 친구도 나름의 방식으로 견디고 있을 텐데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다. 부모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련을 겪으면서 강제로 철이 들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운 동시에 대견하기까지 했다. 역시 쉬운 것 하나 없고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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