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에 화가 매우 잘 나지만, 겉으로 화를 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분을 못 이겨 내뱉는 말들이 결국 나 자신을 갉아먹는 흑역사가 돼서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반적으로 화를 내는 경우는 주체가 되지 않는 분노가 나의 표피를 뚫고 나와서 불길한 기운으로 발현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분명히 살면서 전략적인 분노도 필요한 경우가 있지만, 마음대로 조절될 만큼 나 자신의 감정 기복을 지배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기쁘거나 환희에 찬 감정이 드는 것도 극도로 경계한다. 들뜬 상태가 되면 높은 확률로 말실수하거나 후회할 행동을 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항상 말조심을 하라고 해왔는데, 나는 엄마 앞에서 직접적으로 인정하진 않지만 옳은 말이라고 여기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긍정적인 감정 표현에 유난히 인색했던 엄마의 영향을 받았는지, 나도 기쁘거나 만족스럽다는 감정을 내비치는 것이 매우 쑥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한 일이라고 자연스레 학습하게 되었다. 성향은 습관이 됐고 습관은 성격이 됐다. 지금까지도 기쁘거나 좋은 일이 있으면 굳이 반대급부를 따지거나 비꼬는 말로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곤 한다.
과연 내가 관찰한 변화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내가 판단한 회복이 진정 회복된 거라고 볼 수 있을까? 주말을 업데이트 없이 보내야 할 장모님께 쓸데없는 희망을 줘도 되는 걸까? 수많은 생각들이 짧은 중환자실의 복도에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결정적인 물음이 나의 뒤통수를 쳤다. 이 모든 게 설레발이라면?
내가 미세한 회복이라고 판단했던 것들이 사실은 설레발이라고 판명 나면 나는 절대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주변 친지와 가족들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아내를 부관참시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았다. 용서란 누군가의 죄를 사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마음속에서 나만의 결자해지가 필요하다. 옛날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0%이고 아무리 내가 마음속에서 미워하더라도 과거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완전하고 진정한 용서에 도달할 수 있다. 어차피 후회한다고 내게 상처가 된 말이나 행동들은 바뀌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서 비롯된 상처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 사람이 조금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내가 상처받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결국 그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벌어질 일이 발생한 것이다.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는 것은 타인이 자기 자신을 버리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가지고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나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우리 가족이 2월 말에 갔던 홍콩 여행 3일 차에는 전날 디즈니랜드에 다녀왔던 피로감도 가볍게 풀 겸 도심 여행을 기획했었다. 우리가 여행했던 나흘간의 날씨는 참 변덕스러웠다. 첫 이틀은 걷다가 한 번씩 그늘을 찾아서 쉬어야 할 정도로 더웠던 반면, 도심 여행이 있었던 셋째 날은 구름이 잔뜩 끼고 해가 거의 없어서 얇은 외투를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나는 아침에 숙소를 나서면서 혹시나 해서 챙겨 왔던 바람막이를 걸쳤지만, 때때로 제갈량처럼 하늘만 보고 자체적으로 날씨를 예측하는 아내는 얇은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다. 점심 먹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오후에는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생각보다 낮은 기온과 약하지 않은 바람 탓에 반팔 티셔츠만 입고 나온 아내가 걱정돼서 바람막이를 권하기도 했지만, 한 번씩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아내는 한사코 괜찮다고 하면서 꿋꿋하게 얇은 복장으로 홍콩 시내 탐방을 이어 나갔다. 예의상 두세 번 더 물어봤지만 가볍게 퇴짜를 맞고 나니까 나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녁에 들렀던 도시락 가게 직원도 나에게 아내한테 옷을 벗어주지 않고 뭐 하냐고 농담할 정도로 아내의 옷차림은 누가 봐도 걱정되는 차림새였던 모양이었다. 우리 가족은 스티로폼으로 된 도시락통에 밥과 각종 반찬을 담은 후 포장해서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우걱우걱 먹었다. 심지어 아내는 자기 입맛에 너무 잘 맞다고 하면서 과식까지 하는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 아내의 컨디션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고 속도 울렁울렁한다고 했다. 결국 아내는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먹은 것을 모두 게워 내고 나서야 겨우 밤잠에 들 수 있었다. 평소에도 한 번씩 이렇게 가벼운 장염 증세를 보였던 아내였기에 과식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여기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아내가 의식을 잃고 나서 인터넷으로 각종 정보를 찾아봤더니 길랭-바레 증후군의 대표적인 전조 증상 중에 바로 장염이 있었다. 혹시 내가 옷을 벗어주지 않고 하루 종일 추운 날씨에 떨며 다닌 것이 이렇게 큰 병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한 번씩 마음이 어지러워지기도 했지만, 나는 되도록 아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나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원인을 알 수 없는 발병이었기 때문에 아내가 아프게 된 이유는 블랙박스 안에 고이 모셔진 미지의 영역에 남게 되었다. 정말 내가 그날 옷을 벗어줬다면, 아내는 괜찮을 수 있었을까. 내 잘못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할까 봐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 내 잘못이고 아내가 이순태 교수가 말했던 중증 장애에 도달하게 되면 나는 영원히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하는 일을 만들지 않기로 다짐한 나는 장모님과 이모에게 면회 내용을 보고할 때, 희망을 판도라의 상자에 꼭꼭 숨겨둔 채 있었던 일 위주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행간의 뜻을 읽을 수 있는 여지는 남겨뒀지만, 희망 고문의 올가미는 거둬들이기로 했다. 오늘도 두 분과 푸드코트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서로에게 주말을 잘 보내라고 당부하면서 헤어졌다.
내가 면회를 다녀와서 회사에 돌아가면 J형은 항상 물어보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당연히 아내가 회복했는지를 먼저 물어보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꼭 덧붙여서 물어보는 게 하나 있었다. 항상 아내가 오늘을 기억할 것 같은지를 물어봤다. 양 손목이 묶여 있는 아내를 보고 있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자기의 힘으로 식사가 전혀 되지 않는 아내의 영양 보충을 위해서 며칠 전부터 콧줄을 장착하고 유동식이 투입되고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아내의 얼굴 한가운데에 위치한 콧구멍에 꽂힌 실리콘 관이 의료용 테이프로 고정된 채로 아내의 생명을 부지해 주고 있었다. 그마저도 식도까지 타고 들어가는 관이 불편했는지 아내가 자기도 모르게 뽑는 바람에 환자복과 침상이 엉망이 돼서 결국 내가 침대에 손을 묶는 동의서까지 서명해야 했다. 이렇게 잔인한 행위는 꼭 보호자의 손을 빌리는 게 야속했지만, 책임 소재를 따질 일이 생길까 봐 하는 절차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됐으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는 이렇게 속상하고 화나는 일들을 곱씹어야만 겨우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물론, 이 모든 갈등은 병원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도 없으니 내적 갈등에 그치기 일쑤였다.
중환자실에 계속 누워 있는 것도 무지 괴로울 것 같았다. 만약 멈춰 버린 육체 안에 아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 이보다 괴로운 감옥은 없을 것 같았다. 중환자실은 인간의 존엄성보다 생존권이 우선되는 공간이었다. 중환자실 간호사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침상에 누워 있는 육체들은 사람이기 이전에 환자였다. 일정한 시간에 취해야 하는 행위들이 있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분명 가족들을 다루는 것보다는 차가운 온도가 적용됐을 것이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LED 등 아래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굴림을 당하는 것은 의식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괴로운 경험이 될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J형은 항상 내게 물어봤다. 그도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중증 환자로 들어갔을 때 느낄 수 있는 병원의 냄새, 온도, 채광은 차라리 기억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차라리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며칠 만에 깨어나고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길 기대해 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원하는 것들이 쓸데없이 구체적이고 까다로워졌다.
결국 나는 오늘 아무에게도 아내가 좋아진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낮에 아내의 눈물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약간의 환희를 맛봤다. 며칠간 그토록 바라던 모습을 아주 살짝 맛봤다. 무수히 실패하면서 개발했던 요리나 소스를 기대 없이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가 처음으로 내가 기대하던 맛이 약간이라도 났을 때의 반가움이랄까. 면역 글로불린이 들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수요일부터 투약이 시작된 스테로이드가 약효를 발휘하기 시작한 걸까. 어떤 것이든 상관없으니 내가 봤던 모습이 진정한 회복이길 기원해 본다. 내가 나를 용서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