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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Sep 17. 2024

9-1. 용서

이제는 중환자실 면회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르는 지경까지 왔다. 여전히 자가호흡이 유지되는 것에 위안을 삼고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최악을 가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지. 불확실성이 나의 불안감을 점점 키우고 있었다. 롤러코스터에서 실제로 떨어질 때보다 정점에 멈춰서 급하강하기를 기다리면서 간 졸이는 순간이 가장 두렵고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것처럼 나는 가장 높은 곳에서 숨을 참고 있는 사람 같았다. 여기가 정점이라고 해도 되는지 확신 없었지만 변곡점이 머지않았다고 믿어야 내 마음이 편해졌다.


며칠간 아무런 변화를 관찰하지 못했기에, 오늘도 큰 기대감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점점 기대보다는 걱정이 많아지고 있었다. 기적처럼 아내가 회복해서 일반실로 옮기라는 허락을 받지 않는 이상, 오늘 면회 이후에 3일 후에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회복도 회복이지만, 생각보다 길어지는 투병 기간을 아내가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월요일부터 아내에게 주야장천 말했던 것처럼 버티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아내가 루비콘강에 발끝이라도 담그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면 너무 괴로워졌다.


이번 주 내내 그랬듯 오늘도 중환자실 앞에서 장모님과 이모를 차분하게 맞이하고 면회 일지를 작성했다. 일주일 내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잔기침을 태연한 척 숨기며 손소독제를 손 곳곳에 꼼꼼하게 펴 발랐다. 며칠간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는 아내의 모습만 맞이한 탓에 오늘도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웠고, 현상 유지만이라도 되고 있기를 기대하며 중환자실 2번 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겼다. 24시간 밝은 불빛을 유지하는 중환자실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며칠간 아내와 어떠한 상호작용도 하지 못했기에 특별한 말을 준비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리지 않을 말인 것 같아 안 그래도 힘이 나지 않는데 전하지 못할 말을 특별히 준비하는 것은 사치 같이 느껴졌다. 며칠 만에 학습된 무기력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고, 나도 모르게 의무적인 방문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도 기대감 없는 행사가 또 있을까 싶었다. 가장 큰 걱정은 내가 면회하러 오지 못하는 주말을 아내가 어떻게 버틸까였다. 아내의 회복은 이제 내게 너무 먼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기적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중환자실 2번 방에서 아내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아내의 눈꺼풀에서는 여전히 의지 따위는 엿볼 수 없었다. 최근 3~4일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도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을 이어 나갔다. “남편 왔어!”라고 애써 밝고 힘차게 소리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한 척 인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가 오늘은 최근 며칠 간의 반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답례하거나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며칠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런 힘과 의지가 없어 보였던 아내였는데, 오늘은 남편이 왔다는 목소리를 듣고 최소한의 기력을 짜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겨우 몇 cm 돌리는 것 같았다.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아주 미미한 움직임이었다. 자의적인 움직임이라고 판단해도 되는 정도인지 알 수 없었기에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일주일 만에 소중해진 대화를 다시 시도해 봤다.


“내 말 들려?”

“으...”


큰 기대가 없었던 질문에 아내는 겨우 옅은 신음만 내비쳤다. 이마저도 얼굴 근육이 전반적으로 굳어 있어 입은 벌리지 못하고 입안 어디에선가 겨우 나는 소리 정도였다. 며칠 만에 자리 잡은 좌절감과 매너리즘은 오히려 소소한 변화에도 나를 상당히 놀라게 했다. 어제까지는 아내에게 어떠한 말을 해도 반응이 아예 없었던 반면, 오늘은 굳어버린 신체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어디선가 어렴풋이 듣고 있다는 느낌을 옅게나마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 일이 이토록 반갑다는 것이 참 묘했다. 평소에는 당연했던 소통과 대화가 새삼 엄청나게 소중해졌다.


토요일 이후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내 눈앞에 누워 있는 몸뚱이에 아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한번 월요일의 당부 모드에 돌입했다. 가족 일은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하고 있으니 아무런 걱정 말고 회복에만 집중하자고 했고, 잔소리처럼 들리기 싫어서 즉석에서 지어낸 각종 희망적인 말들만 늘어놨다. 이제 좋아지고 있고, 의사들이 말했던 바닥을 확인했으니 회복할 일만 남았으니, 얼른 회복해서 딸을 만나야 하지 않겠냐는 등의 말을 쏟아냈다. 딸을 생각하면 아내가 힘을 내지 않을까 생각해서 이번 주에 몇 차례에 걸쳐 틀어줬던 딸의 동영상을 재생해 봤다.


“얼른 와~ 보고 싶어~ 사랑해~”


월요일 출근길에 아내에게 전달할 요량으로 딸의 모습을 담았던 5초짜리 영상이었다. 나조차도 촬영하면서 번잡하고 벅찬 마음이 들었던 영상이었지만, 아내는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오늘은 알아차리길 기대하면서 틀어줬는데,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놀라웠다. 동영상 속 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아내는 굳어 있는 얼굴의 근육들을 온 힘으로 총동원해서 목 놓아 울었다. 대부분의 안면 근육이 굳어 있어 얼굴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지만, 굳게 닫혀 있는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아내의 눈물과 절규가 무척 안타깝기도 했지만 일주일 만에 아내의 육체에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서 이기적이게도 반가움이 훨씬 더 컸다. 아내는 나라 잃은 사람처럼 울고 있었지만, 나는 얄궂게도 환희에 차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내를 다시 만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봤다.


아내의 볼 위로 제멋대로 흐르는 눈물을 광개토대왕비 탁본하듯 휴지로 조심스레 닦아주면서, 내가 방금 본 모습이 진짜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아무렇지 않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 괜스레 농담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상호작용을 하는 상황인데도, 농담이 생각나는 나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고작 아내의 눈물만 보고 비겁한 안도감이 들었는지, 코털을 다듬어주고 싶다는 농을 과감하게 던져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콧김을 내뱉는 느낌과 함께 기가 차고 내가 한심하다는 듯한 깊은 날숨을 선보였다. 분명 나의 말도 안 되고 맥락 없는 농담에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때 아내가 나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몇 년 만에 엄마를 만난 철없는 아들처럼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죄다 읊기 시작했다. 딸의 영어학원은 끊기로 마음먹었으며, 며칠 전에는 딸이랑 말도 안 되게 크게 싸웠다는 이야기를 재잘재잘 풀어냈다. 아내가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특별한 반응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듣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말로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미세하게 변하는 호흡을 통해 최대한 열심히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주말에 내가 면회는 못 오지만, 이제 충분히 좋아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잘 견디고 있어 달라고 당부하며 병실을 나왔다.


아내의 병실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간호사에게 담당의를 언제 만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아내가 정말로 회복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의견을 듣고 싶기도 했고, 주말을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인지 묻고 싶었다. 의사라고 미래까지 예측할 수 없겠지만, 72시간 동안 아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경감받고 싶었다. 내가 만나달라고 하면 무조건 만나줘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흘간 만나줬으니 오늘도 당연히 면담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간호사는 알아듣기 힘든 이유로 만나려면 늦은 오후에나 만날 수 있고 그마저 확실하지 않다는 듯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 만남을 성사시켜 줄 마음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강력하게 만남을 요구하고 싶기도 했지만, 괜히 담당의의 심기를 건드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회복을 확인했으니, 병원을 믿고 월요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담당의랑 대화한다고 크게 바뀌는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오늘도 중환자실 밖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을 장모님과 아내의 이모를 만날 생각을 하니 오늘 있었던 미세한 변화를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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