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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Sep 09. 2024

6-2. 균형

아내를 만난 지 무려 17년이 됐다. 나는 21살이고 아내는 20살이었던 2007년 봄에 만났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아내는 같은 과의 신입생이었다. 지난해에 신입생이었지만 이제는 2학년이 된 학생들이 3월 한 달 동안 신입생 후배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식사 대접을 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당시에는 후배들과의 밥 약속을 많이 잡으면 요즘 말하는 소위 핵인싸 같은 존재였기에, 2학년생들은 막대한 자금 지출이 예상되지만 무리해서라도 약속을 많이 잡으려고 했다. 그리고 남녀를 막론하고 이성의 후배와 식사하게 되면 동성의 후배와 식사할 때보다 평단가가 높은 메뉴가 선정됐다. 아웃백, TGIF, 베니건스, 피자헛 등의 서양식 식당에서 보자고 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며 주위에서 쑥덕쑥덕 뒷말이 나오기도 했다. 일부 학생들은 3월의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겨울 방학 때 아르바이트해서 자금을 미리 비축했었고, 나 역시 과외해서 돈을 마련해 뒀었다.


처음으로 선배가 된 2학년생들과 고단했던 수험생활을 마친 신입생들의 만남은 종류만 다를 뿐 설렘이라는 감정으로 같은 궤를 이루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세상 모든 대학생들에게 후배였던 2학년생들은 처음으로 신입생을 맞이하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으스댈 수 있고, 신입생들은 억압당했던 고단한 수험 생활을 거쳐서 처음 맞이하게 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설렘이 모여서 신학기 초에는 긍정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캠퍼스에서 핵반응을 보이는데, 의욕이 과하게 앞서는 친구들의 섣부른 판단으로 풋풋한 캠퍼스 커플들이 여럿 생겨났고, 이 커플들의 유통기한은 보통 그리 길지 않았다. 나 또한 턱없이 부족한 경험만으로도 원 없이 나를 과시할 수 있는 신입생들을 3월 내내 만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3월 말에 신입생이었던 아내랑 I와 함께 저녁 약속을 잡았다. 저녁 약속 전까지는 아내와 전혀 교류도 없었고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몰랐다. 그저 3월이 가기 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아내와 저녁 약속을 잡게 됐다. 우리는 피자헛에 가기로 했었는데, 약속 시간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I가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을 섭외할 시간도 없어 아내와 단 둘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아내와의 첫 번째 식사를 피자헛에서 하게 된 셈이다. 셋이 먹는 예산을 잡아놨기에 나는 괜히 허세를 부리며 먹고 싶은 메뉴를 다 시키라고 하면서 샐러드바, 피자, 파스타까지 자신 있게 주문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둘이 식사하다 보니 서먹한 순간들이 생겼는데 뻘쭘한 상황을 불편해했던 나는 기지를 살려서 최대한 많은 말을 이어 나갔다. 피자헛에서의 식사가 우리의 첫 겸상이 됐고, 그렇게 17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함께 겪었다. 나의 군 생활, 아내의 회계사 수험생활, 아내의 회계사 시험 합격, 아내의 졸업과 회계법인 입사, 나의 미국 회계사 시험 합격, 나의 졸업과 회계법인 입사, 다양한 지인들 앞에서의 결혼, 신혼 생활, 딸의 출산. 이를 포함한 수많은 일들이 있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얻는 위안들이 많았다. 특히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던 나는 아내와 함께 살면서 혼자 살 때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을 얻었다. 각자의 배우자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우리는 카카오톡 대신에 비트윈을 오랜 기간 사용하고 있는데,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루 중에 있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공유했다. 고단한 출근길을 거쳐서 회사 책상에 앉거나, 점심을 먹거나, 회사에서 누가 속상하게 한다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비트윈에서 공유하는 다양한 이야기의 일부였다.


나는 택시에 타면서 17년간 그랬듯 비트윈으로 아내에게 ‘병원에 들렀다가 이제 택시 탐’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보내려고 했다. 서로가 결코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하루 종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가볍게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답장해 줄 아내는 없었다. 평소에 조금이라도 고민이 되는 일이 있으면 서로 비트윈에 공유해서 의견을 묻곤 했는데, 내 평생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해야 할 지금, 막상 대답해 줄 수 있는 아내는 없었다. 유튜브에서 봤던 비비의 <밤양갱>의 매력에 반해서 습관적으로 아내에게 공유해주려고 했으나, 그 역시 처절하게 실패를 맞이했다. 외로운 싸움이 더없이 고독해지고 있었다. 아내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내 가장 친한 친구를 다시 볼 수 있는 것일까.


회사에 돌아가서 남은 일과를 어떻게 버텼는지 모른 채 퇴근했다. 집에는 역시나 엄마와 딸만 있었다. 딸은 오늘 학원 일정도 없어서 유치원이 끝난 이후에 할머니랑 집에 내내 있었던 것 같았다. 둘에게 오늘만큼은 좋은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아 현관에 들어가는 마음이 무거웠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경우의 수를 기대하다가 조별 예선 3차전을 치르고 잔인한 탈락의 현실을 마주하는 좌절감을 그들에게 굳이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 아내의 상태를 보고 나서 장기전이 될 거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세상이 던져 준 곤란한 상황을 거부할 재간이 없었다. 1,500m인지 5,000m인지 42.195km 마라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뿐, 장기전이 될 것은 자명해 보였다. 양가 엄마들이 일주일씩 교대로 우리 가족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지금은 엄마가 나와 함께 딸을 전적으로 돌보고 있었다. 장모님한테는 마음을 추스르고 집에 계시라고 했다. 장모님은 장인어른과 함께 집에서 정신적인 회복에 힘쓰고 있었다면, 엄마는 언제 끝날지 모를 싸움에 참전했다. 장모님한테도 나와 딸을 도와주기를 요청해야 하는지 무척 고민됐다. 장모님이 딸을 등원시키게 되면 유치원의 다른 엄마와 할머니들의 질문 세례를 견뎌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 분명했기에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반면, 엄마가 자발적으로 손녀딸을 돌보겠다며 나서기는 했지만, 엄마도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이 상황이 빨리 종료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엄마도 언제 끝날지 모를 기나긴 싸움을 함께 해야 했다. 고등학교 사회와 문화 시간에 ‘역할 갈등’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두 가지 이상의 역할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는데 이 역할들이 서로 상충할 때 겪는 내적 갈등이라고 배웠다. 교과서에서 배운 걸 몸소 깨닫게 됐다. 아들과 사위로서의 역할들이 치열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지금 둘의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경제학 이론 중에 케네스 애로(Kenneth Arrow)의 불가능성 정리(Impossibility Theorem, 1951)를 몸소 체험하는 것 같았다. 불가능성 정리는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사회의 후생 수준을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는 바람직하고 민주적인 선호 체계가 존재할 수 없기에, 선호들이 서로 딜레마에 빠져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사회효용함수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5가지 조건이 있는데, 이 조건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 그 수준은 매우 다르지만, 나 역시 엄마와 장모님뿐만 아니라, 딸, 가족, 회사, 지인들의 수많은 요구 사이에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허우적대고 있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과 체력도 없었고, 그들의 요구들 또한 상충하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처음 아내가 입원할 때부터 쏟아졌던 다양한 조언과 충고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었고, 충실한 직원, 훌륭한 아들, 듬직한 사위, 든든한 아빠 노릇을 온전히 만족시키기에 너무나 버거웠다. 우리 가족 전체의 충족 가능 효용은 순식간에 하락하였고, 그마저도 내가 어떻게든 메꿔보려고 하고 있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파레토 균형을 찾고 싶었는데, 내게 균형은 이룩할 수 없는 우주 저 멀리에 있는 먼지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엄마한테 언제까지 할 수 있겠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엄마는 항상 마음고생보다는 몸고생 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기에, 힘닿는 데까지 해준다고 답변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계속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장모님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노출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렇게 불편한 상황에서는 아내와 내가 각자의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비교적 예의를 덜 차려도 되고, 필요한 것들을 그나마 편하게 부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철없는 아들로 돌아가서 한동안 최대한 엄마에게 의지하기로 하고, 아내가 중환자실에서 있는 기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는다면,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서는 장모님에게 아내의 병간호를 부탁하기로 혼자 결심했다. 물론, 이 계획은 아내가 바닥을 찍고 중환자실에서 나올 때나 유효한 계획이었다.


엄마의 서울 체류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빠도 부산에서 혼자 있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최근 몇 년간 딸을 챙겨주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빠도 일 년의 절반은 난생처음 혼자 밥을 챙겨 먹고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다. 평생 엄마가 해주던 밥을 먹었는데, 큰아들이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손녀딸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빠의 생활마저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거기다가 이제는 며느리까지 사라져서 본인의 아내도 언제 돌아올지 모를 출정에 나섰다. 가족원 한 명이 아프니 가족 전체의 균형이 처절하게 무너지면서 나머지 가족들의 삶마저 풍비박산이 되었다. 건강은 나를 위해 지키는 게 아니라 내가 아프면 나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지켜야 한다. 우리 모두 각자의 건강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저녁 식사 이후에 끊기로 마음먹은 딸의 영어 학원에서 내준 딸의 숙제를 봐줬다. 딸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인 교재들을 훑어보며 딸이 학원에서 주눅 들지 않을 정도로만 반복 학습을 시켜줬다. 학원 교재와 숙제를 보고 나니 더욱더 학원 대신 원어민 교사 수업을 받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들었다. 숙제를 끝내고 딸에게 오늘 만나고 온 아내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어제랑 크게 다르지 않고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다고 했지만, 딸은 오히려 내가 아내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시간이 흐르고 지금쯤이면 회복세에 접어들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이제는 의사소통도 안 되고 있으니, 딸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의사가 바닥만 찍으면 되는 문제라고 했으니 믿어보기로 했다. 그 바닥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으나, 얼른 맞이하고 회복만 하면 된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어졌다.


다행히 딸은 상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인지 엄마가 보고 싶다고 크게 보채지 않았다. 그저 하루에 몇 번씩 주문처럼 “엄마 보고 싶어”를 힘없이 읊는데, 그 말을 듣고 눈물을 참아야 하는 일들이 하루 중에도 몇 번씩 생겼다. 딸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지만, 불안한 기운을 조장하고 싶지 않았다. 든든한 아빠가 되기에 제법 힘든 여건들이었다. 딸과 앞으로 잘 지내야 할 텐데, 걱정이 점점 쌓여갔다. 그래도 한 번씩 읊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 이외에는 딸이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빠를 걱정해 주는 경우가 꽤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철이 든 건가 싶어서 오히려 미안하고 안타까운 경우가 많았다. 딸은 나와 영어책과 한글책을 한 권씩 읽고 나서 금방 잠을 청했고, 적당히 집 정리를 하고 짧게 주어진 나만의 고독을 즐겼다.


고뇌의 시간에 돌입한 나는 다시금 아내에 대한 걱정을 시작하면서 담당의와 했던 대화들을 떠올리게 됐다. 어제부터 담당의와 상담을 진행하면서 의학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나의 지식수준이 무척 안타까웠다. 내가 며칠 만에 밤새워서 공부한다고 해서 내가 아내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으나 최소한 의사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생산적인 대화를 하고 싶었다. 내가 놓치는 게 없는지 확인해 줄 대체 인력이 필요했다. 마침, 최근 의학전문대학을 졸업한 아내의 이종사촌 동생, C가 떠올랐다. C와 연락해서 아내의 상황을 공유했고, C로부터 아내가 회복한 이후에 급여로 받을 수 있는 재활 치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C는 열심히 설명을 해줬지만, 그것을 알아듣기에는 내 이해도가 미치지 못했다. 재차 묻기 미안해서 나중에 필요할 때 다시 물어볼 요량으로 알겠다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느 정도 안심이 됨과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불안감이 생겨났다. 알아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어린 시절에 미국에 살면서 민화와 같은 이야기를 교과서에서 접한 기억이 있다. 네덜란드의 이야기를 희한하게도 대서양 건너의 나라인 미국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었다. 허구의 사건을 기반으로 만든 이야기이며, 1865년에 Mary Mapes Dodge라는 작가가 집필한 <Hans Brinker; or, the Silver Skates: A Story of Life in Holland>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이다. 책 속의 제목은 <Hero of Haarlem>. 네덜란드 서쪽 해안의 많은 지역들이 지대가 해수면 보다 낮아서 바닷물을 막기 위한 댐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날, 혼자 밤길을 걷던 한 소년이 댐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한다. 소년은 급한 대로 구멍에 손가락을 꽂아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았는데, 이 일이 늦은 밤에 일어난 탓에 소년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그 상태 그대로 하룻밤을 꼬박 새워서 마을을 구했다는 영웅담이다. 당연히 댐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라고 하면, 구멍 하나 막는다고 해서 해결될 리도 없고, 어린 소년이 야밤에 혼자 밖에 싸돌아다닌 이유도 납득되지 않지만, 결국 소년이 위태로운 상황을 손가락 하나로 겨우 버틴다는 것이 이 요상한 영웅담의 요지이다.


내 상황을 떠올리면 밤새 혼자서 댐에 손가락을 꽂아놓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꾸벅꾸벅 졸고 있을 소년과 오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춥고 외로운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두렵고, 이 손가락을 댐에서 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생각에 지배되어 옴짝달싹 못 하는 모양새가 쏙 빼닮았다. 남편, 아빠, 직원, 아들, 사위로서의 수많은 역할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모든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신체적인 체력도 부족했지만,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요소들 간의 균형을 잘 잡는 일이 내게 새로 주어진 임무인 것 같아 압박감이 점차 더해지고 있는데, 언제까지 손가락을 꽂아놓고 버텨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내일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아침이 오긴 하는 것일까. 밤은 어둡기만 했다.




불가능성 정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67647&cid=42107&categoryId=42107)

Hans Brinker; or, the Silver Skates: A Story of Life in Holland

(https://en.wikipedia.org/wiki/Hans_Brinker,_or_The_Silver_Sk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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