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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Sep 05. 2024

5-3. 지독한 감기

나는 무너질 정도로 참담했지만 무너질 틈도 없이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급히 택시를 잡아서 회사에 들어갔지만 늦은 오후 정도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이지만 아무도 내게 왜 늦었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간단하게 대표님과 J형에게 아내의 상황을 업데이트해주고 내 자리에 앉았다.


아내가 입원하던 날부터 내가 맡은 일이 있었는데 여태껏 손을 못 대고 있었다. 시작만 하고 매조지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를 채근하지도 않고 있는 J형에게 미안해서 얼른 내 부분을 완성해서 넘겨주고 나의 걱정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어차피 자리에 앉아서 아내의 병에 집중한다고 해서 아내에게 도움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 당장이라도 업무에 집중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모니터 두 대를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업무와 관련된 그 어떤 생각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엑스맨의 매그니토가 쓰고 있는 헬멧이 자비에르 교수의 텔레파시 공격을 튕겨내듯 업무 관련 생각들은 모두 차단되고 있었다. 아직도 나를 절망에 빠뜨린 아내의 상태, 담당의가 해줬던 설명들, 그리고 하반신 마비+중증 장애의 복합체가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계속 나쁜 생각만 하다 보니 모니터를 멍하니 보고 있던 나의 눈은 금세 촉촉하고 붉어지기 시작했다. 행여나 회사 사람들이 볼까 봐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가서 대변 칸에 앉아서 최대한 조용히 흐느끼며 거친 두루마리 휴지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안정을 되찾은 후에 자리로 돌아갔다. 본격적으로 울기 전에 도망갔기에 아무도 내가 울었다는 것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조용히 있던 J형이 말했다. 그 역시 내 눈은 보지 않고, 자기 책상의 모니터를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마음은 다 전달 돼.”


형도 다 봤지만 모른 척해줬던 것이다. 평소에 상냥하다기보다는 냉정한 사람이었고 낯 뜨거운 말은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말은 오히려 폐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그는 한 번씩 냉정하다 못해 차가울 때가 많아서 속상한 경우도 있는데, 사실 그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다. 나를 제외한 주위의 사람들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성향 파악이 가능한 상수라면 오히려 편하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한다는 가정하에, 변하지 않는 상수에 맞춰서 적절하게 대응하여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오히려 상수가 변하길 기대하는 내가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괜히 희망 고문하는 것이다. 딸기 맛 사탕에서 바나나 맛이 나지 않는다고 화낸다고 맛이 바뀌지 않는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변수는 나 자신이다.


항상 딱딱하고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형이 그런 말을 해주니 숙면을 취하다가 울린 모닝콜처럼 급작스럽게 현실로 돌아오게 해 줬다. 너무도 괴롭지만,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해 있었다. 물론 내가 각성한다고 해서 병원의 치료법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누워 있던 아내가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정신 차리고 해야 한다. 나도 응원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위로는 나중에 받아도 늦지 않다.


퇴근 후의 귀갓길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내가 오늘 본 아내의 상태를 딸에게 어느 정도 얘기해 주는 게 옳을까. 며칠 전에 딸에게 아내의 병에 대해서 그나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줬는데, 아내의 상태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려줘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평생 오답을 피하면서 정답만 찾는 데 익숙해진 나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언제까지 숨겨야 할지, 어디까지 숨겨야 할지, 숨기는 게 맞긴 한 지. 그 어느 것 하나도 명확한 게 없었다.


결국,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채로 귀가했다. 며느리 걱정에 기분이 잔뜩 처졌지만 아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기운 내며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넷플릭스를 보고 있던 딸이 나를 맞이했다. 예전에 아내가 저녁 약속이나 회식이 있었을 때와 동일한 인원 구성이었으나, 느낌은 180도 달랐다. 간단하게 씻고 환복 하면서도 계속 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성격이 급한 나는 결국 식사를 하면서 딸에게 오늘 만났던 아내의 상태를 설명해 줬다.


“오늘 낮에 엄마 잠깐 보고 왔는데, 아직도 엄마 몸이 엄마를 공격하고 있어서 그런지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어. 아빠가 불러도 대답도 잘 못 하더라고. 며칠만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으니 기다려보자.”


사실 이 말은 오히려 내가 나에게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엄마 만나러 가고 싶어.”

“아빠도 엄마 보고 싶어.”

“아빠는 엄마 보고 왔잖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딸의 말대로 나는 아내를 보고 오기는 했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눈물이 위태롭게 찰랑찰랑했던 저녁 식사는 어영부영 끝났다. 귀가하기 전까지는 아내의 남편이었던 나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서 엄마를 만날 수 없게 된 딸을 위해 양쪽 부모의 역할을 모두 채워보고자 하는 아빠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자기 엄마를 안심시켜야 하는 아들이기도 했다. 엄마에게 전달하는 아내의 상황은 긍정적일 수 없지만, 그래도 거짓말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덜 부정적으로 알려줬다. 내 이야기를 듣고 특별한 말을 하지 못한 엄마를 퇴근시켜 줬고, 딸과도 시간을 조금 보내다가 딸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고 재웠다. 딸이 엄마가 없어서 힘들어할까 봐 걱정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의젓하게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웠다. 만약에 딸이 계속 엄마가 보고 싶다고 보채기라도 했다면 외줄 타기 하듯 버티고 있던 나는 순식간에 무너졌을 것이다.


아내가 쓰러지기 전에 아내와 나는 딸이 매주 월수금에 다니던 영어 학원을 정리하기로 결정했었다. 지난 1년간 보낸 학원은 영어 교육 목적보다 다른 목적이 훨씬 컸다. 유치원 하원 이후에 딸을 돌보던 할머니들이 우리 가족의 저녁까지 준비하게 되는데, 딸을 영어 학원에 보내놓으면 마음 편히 준비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휴식의 시간을 확보해 주는 보육의 목적이 가장 컸다. 영어 학원에 딸의 친구들이 많이 다니는데 딸이 또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유대감을 쌓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거의 1년 만에 처음으로 딸이 영어 학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들여다보게 됐다. 회화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던 수업들이 교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교재를 조금 더 살펴보니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언어 교육용이었다. 미국의 어린아이들이 사용할 것 같은 영어 교재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모국어에 대한 이해가 체계적으로 증진될 수 있는 교육 과정이었다. 하지만, 딸과 딸의 친구들처럼 한국어가 모국어인 친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외국인 선생님도 계셔서 회화 수업도 있는데 딸의 영어 실력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당연히 글자 체계와 기본적인 어휘에 대한 암기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유기적인 성장을 추구한다면 결국 그 언어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하게 단어를 암기하고 문장 형태를 익히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평소에는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이런 행태를 지속한다면 수학 공식을 암기하는 것과 같이 암기할 내용이 그저 하나 추가되는 것일 뿐이다. 다른 언어로 사고하거나 생각하는 과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결국 말을 생산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야 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대화 상대방과 상호 작용을 하면, 어떻게든 의사소통하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노력을 할 테고, 그러한 노력이 계속되어 언어 생산 능력이 형성된다. 언어란 읽기, 쓰기보다는 말하기와 듣기 과정에서 길러지는 능력이다. 외국에 맨몸으로 나가서 몇 년간 살다 온 사람들이 그 나라 언어를 배워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영어 학원에 자녀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본인들이 받았던 형태의 영어 교육을 세습하고 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과 경험이 부족했고 영어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 안 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학원은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의 부모를 상대로 영업해야 하고, 그러한 부모들을 설득하려면 결국 그들이 익숙한 교육 과정을 제시해야 잘 먹힌다는 경험을 하게 됐을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어렸을 적에 미국에 살다 왔기에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 물론, 고등 교육과 직장 생활을 한국에서 한글로 했기 때문에 지금은 한글이 훨씬 편하지만, 영어 말하기나 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하지만, 나 역시도 만약에 딸에게 내게 생소한 언어나 기술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되면 다른 전문가들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학교에 다니면서 기본적인 영어 교육을 받았기에, 영어를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들을 가르칠 정도는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학원 선정을 할 때 까다로운 기준을 갖다 댄다.


내가 딸과 영어로 얘기해서 가르쳐도 되었지만, 딸이 어렸을 적부터 영어가 아닌 한글로 관계 형성을 한 탓에 영어로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아 영어 학원에 맡기게 된 것이 결국 지금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역시 직접 영어를 가르쳐 줘야 했는데 첫 발짝부터 잘못 내디뎠다. 1년간 영어 학원에 큰 기대감 없이 다녔지만, 그 작은 기대도 충족되지 않았다. 대안을 찾다가 친구에게 소개받은 영어 회화 선생님이랑 4월부터 수업하자고 약속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거기다가 월수금에 다니던 학원에 다닐 수 없게 됐으니 다른 요일에 새로운 학원에 등록해야 엄마들의 휴식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딸이 다양한 경험을 해 볼 수 있다는 것도 새로운 학원을 알아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결정적으로 딸이 영어 학원에 가는 게 힘들다고 직접적으로 말한 게 가장 중요했다. 약 1년 전 우리가 사는 곳 인근에 딸이 다니고 있는 영어 학원이 새로 생겼었다. 영어 교육은 하고 싶었으나 딱히 대안이 없었던 우리는 지난 1년간 딸을 영어 학원에 보냈었다. 딸은 지난 1년 동안은 나름 재밌게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학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반 편성이 진행됐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딸은 본인보다 훨씬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춘 친구들과 한 반이 됐고, 그들을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물론, 딸의 말만 듣고 판단한 내용이라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겠지만, 지금 내게 정확한 사실 파악보다는 딸이 느끼는 답답함이 더 중요했다. 이 영어학원에 계속 보낸다는 건 딸의 영어 교육보다는 부모의 불안감 해소를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 엄마가 없어서 불안한 딸을 스트레스받는 영어 학원에 억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노력을 통해 극복하는 경험도 부여하는 게 중요하지만, 엄마가 없는 상황에서 딸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영어 경험을 게을리시켜 준 아빠임을 반성하며 영어 학원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일복이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은 뚜렷하게 구분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 일복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의 걱정에 지배당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진행 방식만 옳다고 굳게 믿고 남들이 알아서 잘할 거라는 신뢰가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옳은 방식’을 행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여 자기가 일 처리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못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남들을 믿느니 내가 직접 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종종 도달하게 된다.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일의 처리 방법 중에서 ‘방치한다’는 선택지는 절대 없다. 불쾌한 채로 진행하더라도 그 일은 어떻게든 해낸다.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가 원하는 방식을 남들이 하게끔 유도하거나 강요하면서 갈등이나 타인의 불만을 야기하기도 한다. 일이 일복 많은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일복 많은 사람이 일을 찾는다. 남들에게 아니라고 하지만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영어 회화 선생님께 예약 취소를 통보하고 기존의 영어 학원을 계속 다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일복 많은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영어 학원에 딸을 계속 보내는 게 너무 미안했고, 그들의 무책임한 교육 행태도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딸이 예전부터 피아노도 배워 보고 싶다고 했기에 어떻게든 시켜주고 싶었다. 심지어 아내가 입원하기 며칠 전에 아내가 피아노 학원에 상담까지 받으러 갔다고 했었다. 전화 몇 통 넣고 일정 조정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딸의 학원도 아내가 전담하고 있었기에 나는 전혀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다. 모든 학원들에 연락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로 쑥스러운 안내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딸의 학원 일정을 조정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너무 답답했고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게 탄로 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사실 학원보다 중요한 것은 딸의 유치원이었다. 낮에 병원에 가는 택시 안에서 유치원에 전화해서 우리 가족의 상황을 대략 설명했고, 주 연락처를 나로 바꿨다. 학기 초라서 생각보다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3월이라 새로운 담임 선생님을 맞이하게 됐고, 딸의 상담을 위한 성장 카드나 선생님에게 공유하고 싶은 얘기들을 작성해서 보내야 했다. 평소라면 아내가 주도적으로 준비하면서 나의 의견을 청취하는 구조였을 텐데, 올해는 혼자 작성해야 했다. 의견을 물어볼 아내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이다. 딸을 키우는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부모의 의견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부부가 함께 논의했는데, 이제는 내가 오롯이 혼자서 우리 딸의 부모를 대변해야 했다.


비로소 밤 11시가 됐을 때 딸의 성장 카드 작성을 완료하고 처음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 시간이라면 함께 했을 아내가 내 옆에 없었다. 내게 말을 걸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고, 두 마리의 고양이만 빼면 우리 집은 불길하게 고요하기만 했다. 어두운 고독 속에 앉아 갖은 의무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나는 이를 거부할 권리 따위 없었다. 우리 가족을 지켜야 한다. 아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따뜻한 봄날의 청아한 하늘에 평화롭게 흘러가는 구름 떼를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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