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딸에게 오늘 낮에 또 엄마를 만나고 오겠다고 했다. 함께 응원해 달라는 취지의 말이었는데, 딸은 엄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도 엄마를 만나고 싶다며 살짝 투정을 부렸다. 눈치 보며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는 딸을 보고 있자니 또 금세 눈물이 날 것 같아 황급히 출근길에 나섰다. 심각해 보이는 어른들 때문에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고, 어쩔 수 없이 철이 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했다. 딸에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답을 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딸의 말들을 곱씹으며 출근했더니 또 찔끔찔끔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며칠간 워낙 많이 울어서 나의 청승맞게 우는 꼴을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이렇게도 눈물이 많은 사람인가 싶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아내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한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반자동으로 차올랐다. 딸에게 엄마를 보여 주겠다는 약속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회사에 출근해서 평소 같으면 아내가 했을 딸의 유치원 모래놀이 신청을 하기 위해 유치원 앱을 켜놓고 대기했다. 유치원에서는 오늘 10시에 모래놀이 신청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나는 대학생 때 했던 수강 신청을 기대하며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10시만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아빠가 신청 기간을 놓쳐서 딸이 계속했던 모래놀이를 못 하게 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방지하고 싶었다. 떨렸던 나의 마음과는 달리 유치원에서 공지했던 10시가 되었지만 아무런 알림이 없었다.
함께 신청하기로 했던 V엄마와 카톡을 하면서 모래놀이 신청을 기다리고 있었다. 딸과 V는 성향이 비슷해서 친하게 지냈고, 유치원에서의 모래놀이, 토요일마다 하는 발레 문화센터,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숲 체험도 함께하고 있다. 아내가 G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다음 날에 V엄마와도 연락해서 우리 가족의 상황을 알려줬다. V엄마는 감사하게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했고, 나는 바로 모래놀이 신청에 대해서 구조요청을 했다. 나는 그동안 딸의 유치원 관련 업무들의 전권을 아내에게 위임한 상황이었기에 모든 것에 처음이고 일자무식이었다. V엄마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미안하면서 부끄럽기만 했다.
기존에 유치원에서 안내해 준 시간이 지나도 알림이 오지 않자, 나는 혹시 내가 모래놀이 신청을 놓친 게 아닐지 두려워 바로 V엄마에게 유난스레 걱정 가득한 카톡을 했다. 하지만, V엄마는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이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알고 보니, 유치원에서 모래놀이를 신청할 수 있는 게시글을 공지했던 시간보다 늦게 올린 것이었다. 게시글에 선착순으로 댓글을 달아서 신청할 정도로 낙후된 시스템은 아니었지만, 대학생 때 했던 수강 신청과 비교하면 훨씬 싱거웠다. 결과적으로 수강 인원도 다 차지 않아서 애초에 내가 걱정한 게 우스워졌다. 심지어, 신청하고 난 이후에 우리와 V네가 신청한 화요일 4시에는 수강인원이 우리밖에 없어서 3시 타임으로 변경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약한 저항을 해봤지만, 이내 굴복하고 3시 타임으로의 변경을 허락했다. 평소에 내가 대하던 거래 상대방들과는 너무 다른 수준의 행정력을 맛보면서 아내가 그간 이런 행태를 계속 상대했다고 생각하니 별안간 미안했다. 나만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오늘도 역시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제와 똑같이 3층 중환자실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그래도 닷새간 면역 글로불린을 투약했으니 어느 정도 회복됐기를 기대해 봤다. 오늘은 장인어른 대신 아내의 이모가 장모님과 함께 왔다. 아내가 이렇게 되고 난 이후로 장인어른이 잠을 설치고 식사도 잘 못 한다고 전해 들었다. 장인어른은 심혈관계 질환 지병으로 인한 부정맥 위험도 있어 운전을 최대한 자제하느라, 오늘 장모님은 이모가 운전해 주는 차를 얻어 타고 왔다. 우울하기만 했던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이모가 와서 모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걸어줘서 그런지 한결 가벼운 분위기였다. 나는 면회하기 위해서 어제처럼 일지를 작성하고 소독제를 손에 비볐다. 오늘도 감기 기운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회사에서 나오기 전에 가래약을 들이켰는데도 잔기침을 콜록콜록하고 있었다.
감기 기운을 마스크 아래로 간신히 숨기고 뇌혈관계 중환자실 2번 방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방 앞에 섰을 때 아내가 회복세에 접어들었을 수도 있다는 나의 조그마한 희망은 무참히 깨졌다. 기가 막히게도 아내의 상태는 어제보다 처참해 보였다. 잠들어 있지 않은 게 명확한데도 눈을 뜨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주식 시장에서 이틀 연속 하한가를 맞은 듯한 당혹스러움은 숨기고 어제도 그랬듯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해야 했다.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과 아내를 응원하고 도와주고 있으니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말만 영혼 없이 반복했다.
아내는 어제처럼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내가 당부의 말을 하고 나면 아내가 그래도 대답은 하고 싶었는지 아주 옅은 “으~” 정도 되는 소리를 간신히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면마비가 어제보다도 심해져서 눈 주위의 근육마저 힘이 들어가지 않아 눈을 뜨지 못했다. 동일한 말을 반복하면서 할 말이 떨어져 가고 있을 때, 마침 간호사가 들어왔고 그녀에게 평소에 아내와 의사소통이 되는지 물어봤다. 그래도 예/아니오 질문을 하면 간신히 의사 표현은 할 수 있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됨과 동시에 아내가 현 상황이 멀쩡하게 인지가 되는데 자기 몸 안에 갇혀 있는 거라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답답함 마저 느끼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이기적인 바람이었다.
간호사가 아내에게 기본적인 조치를 하는 동안에 어제 담당의가 언급했던 ‘하반신 마비’가 생각나서 시선을 아내의 발 쪽으로 돌려보았다. 이순태 교수의 ‘중증 장애’와 담당의의 ‘하반신 마비’가 내 머릿속에서 복합되니 과연 담당의가 말했던 ‘바닥’을 치고 오면 이 다리가 다시 움직일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됐다. 발과 다리를 주물러 주면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아내의 발을 만지작거려 봤다. 아내의 발 전체는 거칠었고 곳곳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아내와는 17년 정도 함께 지냈는데 아내의 발 상태를 아파야 비로소 알게 된 게 부끄러웠다. 아내의 발과 다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아까 건넸던 말들을 반복하다가 면회 종료 5분 전쯤에 아내와 여태껏 눈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가 나를 알아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내의 눈동자에 나를 담아두고 가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아내의 눈꺼풀을 들어봤다. 아내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동공이 풀려 있었으나 남편의 모습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아내의 풀려버린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것을 확인하며 내일 또 올 테니 조금만 힘내면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대책 없는 약속을 질러버리고는 아내의 힘없는 눈꺼풀을 다시 닫아주며 중환자실을 떠났다.
죽은 동료들을 전장에 두고 온 패잔병과 같은 심정이었으나, 장모님의 딸을 살려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약속한 사위로 돌아가야만 했다. 숙연하게 앉아 있던 장모님과 이모가 나를 맞아줬고, 오늘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며 아내의 상태를 설명했다. 오늘도 담당의를 만나고 싶었는데, 외래 진료가 있는 날이라 또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전담 간호사가 직접 내게 전화해서 점심 먹고 와서 외래 진료실이 아닌 중환자실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산송장 같은 아내를 본 나에게 이런 관심은 너무도 고맙고 소중했다. 장모님과 이모를 모시고 병원 푸드코트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1시쯤 중환자실 앞에 앉아 있으니, 담당의와 간호사가 함께 왔다.
모두 자리 잡고 난 이후에 담당의의 본격적인 설명이 시작됐는데, 나는 여전히 담당의의 열띤 설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모르는 말과 개념들이 즐비한 담당의의 설명은 진도가 계속 빠져서 일곱 번째 문장쯤 와 있는데, 나는 여전히 두 번째 문장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아내의 병은 아직 면역 글로불린에 반응하지 않고 있어 아직 회복세에 접어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내의 상태는 어제와 비교해 더 악화돼서 안면마비도 심해졌고, 어제는 오른쪽 다리에서 나타났던 마비 증세가 왼쪽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굳이 위안을 얻자면 그래도 오른쪽 다리의 마비 증세는 많이 완화됐다는 것이다. 오늘부로 면역 글로불린 투약은 마무리 짓고 내일부터 스테로이드 투약을 시작할 거라는 말도 덧붙여줬다.
아내에 대한 설명을 적당히 끝낸 담당의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담당의는 서울대학교병원의 이순태 교수 연구소에 의뢰해서 아내의 혈액 분석을 진행하여 자가면역뇌염 항체 검사를 해볼지 물어봤다. 나는 당연히 하겠다고 했는데, 담당의가 왜 조심스럽게 물어봤는지 곧 알게 됐다. 이 검사는 이순태 교수와 미국의 Mayo Clinic Laboratory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검사인데 비용이 무려 195만 원이고, 심지어 보험 적용 대상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금액을 듣고 검사를 진행하겠다는 의사는 전혀 바뀌지 않았으나, 당혹스러운 금액이긴 했다. 아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떤 병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병이 아닌지 확인하는 절차도 필요했기에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의 병이 몸을 뜯어볼 수 있는 게 아닌 신경계에 문제가 생기다 보니, 확실한 진단이 어려워서 소거법으로 접근하는 것 같았다. 의료진이 병명을 콕 집어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뇌 질환이 맞는 것인지 의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검사 비용 안내를 받으면서 M병원 응급실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딸의 검사 비용이 부담스러워서 응급실장과 실랑이를 벌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우리가 이 정도 검사 비용은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은 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금전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 되는 금액이 아니었기에 아내의 건강과 가정 경제 사이에서 잔인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고,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잔인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 상담이 완료되고 이모가 여의도까지 차로 태워준다고 하는 것을 마다하고 회사로 돌아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