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 장 후회(6)
십 년이 가까운 세월 만주 곳곳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아저씨는 대전자령이라는 곳에서 동민 형을 만났다. 봉오동, 청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독립군은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하지만 동민 형도 전투가 끝나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오랜 세월 열악한 환경에서 전투를 계속 치러 왔던 동민 형의 몸은 약할 대로 약해져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한의사 선생에게 배운 의술로 부상자를 치료하고 가난하고 병든 근처 한인들을 돌봤다. 동민 형까지 떠나보낸 장순 아저씨는 슬픔을 머금고 자기 자신에게 결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만주의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지만 아저씨는 끝까지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 부대를 습격하고 돌아오는 산속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는 젊은 여자를 구해냈다. 아직 앳된 얼굴의 그녀는 이제 막 16살이 되었다. 함경도가 고향인 그녀는 13살이 되던 해 물을 길어 간 마을 우물가에서 무장한 일본군에게 납치되었다. 이후 이곳 일본군 막사로 끌려와 성노예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루에 몇십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으며 군인들은 칼로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학대를 하였다. 그 학대의 흔적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그녀는 몸의 이상함을 느꼈다. 임신을 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그녀의 몸속에 있는 태아를 지워 버린다고 하였다. 도저히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탈출 기회를 보고 있었고 습격을 틈타 그곳을 도망쳐 나오다 아저씨를 만났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지켰지만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인지 아이를 낳고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이 곁을 떠났다. 아저씨는 남겨진 아이를 자신의 친손자처럼 키웠다.
출생 전부터 엄청난 고난과 위기를 이겨낸 아이는 만주의 추운 겨울에 태어나 무사히 잘 자랐다. 독립군 막사에서 아저씨와 함께 지내는 아이에게는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래도 다행히 잘 버텨 주었다. 아이는 어느새 여덟 살이 되었고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이제는 제법 부대에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려고 하는 순간 다시 한번 그들에게 위기가 왔다. 일본군의 습격으로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남양 군도의 어떤 섬으로 강제 징용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들은 쉬는 시간 없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쉬는 날도 없이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견뎌야 했다.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식량이 주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쳐갔고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들을 감독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란 없었다. 감독관들은 아주 잔인했고 무서웠다. 조금이라도 쉬거나 힘들어하면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됐다. 병들고 아픈 것조차 죄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맞아서 죽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그곳의 노동자들은 더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 머리 위에서는 폭격기들이 날아다녔고 낮에 폭파된 군사 시설을 바로 그날 밤에 복구해야 했다. 복구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의 머리 위로 다시 폭탄이 떨어졌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노동자는 많지 않았다. 일본이 패배를 하고 아저씨와 아이는 일본군 포로로 취급되었다. 그렇게 캐나다에 있는 일본인 포로수용소에 오게 되었다.
아저씨의 얘기를 듣고 느낀 감정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죄책감, 미안함 이런 표현으로는 내가 느꼈던 감정을 전부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 받았던 충격으로 한동안 먹는 것조차 어려웠다. 아저씨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을 무참히 살해하고 민족을 핍박한 무리들과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일본이 저지른 많은 만행을 직접 겪으면서도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슬펐다. 아저씨의 손자는 내 아들과 같은 나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다섯 살은 어려 보였다. 제대로 먹고 자랄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궁핍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부끄럽게 재산을 모은 난 너무도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미안했다. 난 아저씨에게 같이 살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내가 도쿄에 간 사실은 말하지 못했다. 그 어느 날보다 나 자신이 부끄러운 날이었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30년 만에 겨우 들었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조차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독립군 최고의 저격수. 자랑스러운 내 아들.’
피에 얼룩져 있는 빛바랜 쪽지에 쓰인 글귀가 내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아버지는 항상 이 쪽지를 품고 다니며 하루에 몇 번씩 되뇌었다고 했다. 드디어 주인에게 전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장순 아저씨가 놓고 간 쪽지는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했던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아주 추악한 배신자가 있을 뿐이었다. 사실 나는 아버지를 찾는 것이 두려웠다. 시연이와 마찬가지로 결국엔 슬픈 결말을 맞이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실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그 끝은 이런 결말이었다.
아저씨와 같이 산지도 이 년이 지났다. 얼마 전 두 아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 장순 아저씨의 손자는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해서 나갔고 그 쓸쓸함이 가시기도 전에 장순 아저씨가 사라졌다.
‘꼬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얼마 전에 너의 과거에 대해 우연히 들었다. 너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너의 입장도 조금은 이해되지만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난 더 이상 너와 함께 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것이 평생을 독립군으로 살아온 나의 신념을 지키는 일인 것 같구나. 비록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장순 아저씨가 남기고 간 그 편지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