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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친일파2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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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리 Oct 14. 2024

괜찮습니까?

제10 장 후회(7)

 가족들을 설득해 다 같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갓 성인이 된 아들과 캐나다 생활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두고 올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는지 나중에야 깨달았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문득 신홍의 생각이 났다. 지금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의 뜻을 이루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내가 그와 함께 떠났다면 나의 삶이 어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아주 잠시지만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장순 아저씨를 캐나다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찌 되었을까라는 상상도 해봤다. 아마도 또 다른 계기가 생겨 같은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과거는 잊히지 않는다. 일본이 망하고 또 다른 대립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미군정과 새롭게 세워진 정부는 과거를 잊어도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과거는 잊히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분명히 남을 것이다. 과거가 없는 민족은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 기억에 잊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던 나는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국은 비참했다. 그 속의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 군수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경험과 자본을 바탕으로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다. 군사 고문 시절 인맥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성공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그것이 나의 잘못을 사죄하는 길이라 믿었다.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죗값을 치러야 했다. 이제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시간이 흐르고 여기에서 삶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 번은 경상도 방면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쉬려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하판락이라고 합니다.”

 노덕술과 더불어 독립투사에 대한 고문으로 유명한 고등 경찰 출신 하판락이 날 찾아온 것이었다. 주사기로 피를 뽑아 상대에게 뿌리는 착혈고문으로 유명한 그였다. 그는 지방 선거에 출마를 한다며 나에게 후원을 부탁했다. 그는 여전히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자꾸 저의 과거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언론을 조금 조용히 시켜주십사 하고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비굴한 표정의 그의 말이 역겨웠다.

 “과거가 부끄럽긴 하나 보군요.”

 냉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박사님이나 저나 과거에 대해 알려져서 좋을 것이 있겠습니까? 서로 비슷한 처지끼리 돕고 살자는 것이지요.”

 교활한 그는 나의 과거까지 끌어들였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이런 놈들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이고 사죄를 할 것이다. 그것이 내 죗값을 치르는 방식이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 살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과거가 밝혀지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평생 숨기며 불안감과 두려움에 떠는 것이 그의 죗값을 치르는 방식일 것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를 무시하고 올라오는 길에 우연히 안동에 들렀다. 그곳에서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임청각이라 불리는 조선 중기에 지어진 고택은 그 세월만큼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영남산을 등지고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그 고택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임청각과 낙동강 사이에 철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철도가 고즈넉한 고택의 평화를 깨고 있었다. 철도 건설을 위하여 임청각의 일부를 허물어야만 했다. 고택의 주인은 석주 선생이었다. 석주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신흥 학교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나에게 역사를 가르쳐주고 민족의 의미를 가르쳐 주신 분이었다. 서간도를 떠날 때 그가 보여줬던 따듯함을 난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집이 일제에 의해서 훼손되었다. 그리고 일제가 떠난 지금까지 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원하던 일제로부터 독립이 되었지만 많은 것들이 잘못된 채 유지되고 있었다. 여전히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하판락과 평화를 잃어버린 임청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문득 기차를 처음 타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재 선생을 보러 가기 위해 우당 선생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이었다. 좋은 어른으로 성장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그 기차 안이 떠올랐다. 

 ‘난 좋은 어른이 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당 선생님!’

 우당 선생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에 대한 내 마음의 빚은 평생 짊어지고 갈 것이다.

 마지막에 그 둘이 보였던 편안한 표정이 너무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별을 알면서 슬픔 대신에 보였던 편안함. 그것은 올바른 신념을 가진 자들의 표정이었다. 아무리 힘들지라도 진정해야 할 일을 위해 당당하게 나서는 그런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함이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미리 알았다면 나도 그들처럼 살 수 있었을까?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매국하면 삼대가 잘 산다라는 말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빈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부와 지식을 축적할 수 없었고 그들의 힘든 삶은 자식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일제의 밑에서 지식을 쌓고 식민 사관 의식을 가진 자들이 교수가 되었다. 그들의 제자들은 잘못된 역사관을 이어 나갔다. 잘못된 역사 또한 대물림되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이런 것들이 존재하였다. 난 그것들을 바로잡고 싶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 내가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나의 존재 자체가 잘못된 역사였음으로. 

 시간이 흘러 나도 이제 노인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낳은 자식은 나와 비슷한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아들은 손자를 데리고 바로 떠났다. 그 녀석도 힘들었던 것이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에 그 녀석 또한 마음 편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친일파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자신의 뿌리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에 그 녀석은 불안에 떨어야만 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녀석의 아이 또한 같은 길을 가야만 할 것이다. 

 지독한 외로움, 두려움, 불안감, 이것들은 이제 나의 숙명이다. 행복하게 살라던 시연이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그때의 선택이 너무나 후회가 된다. 난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잠시의 편안함을 위해서 신념을 버린 나의 선택이 너무 후회가 된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일기는 끝났다. 



 그리고 최근에 쓴 것처럼 보이는 쪽지가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진 것일까? 이제는 환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내가 잠시 잠이 들어서 꿈을 꾼 것인가? 실제인지 꿈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이 흐릿해져 가고 있다. 이제 나도 평생 짊어진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의 삶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딱 한 번만 선생의 따뜻한 손을 잡아보고 싶다고 평생을 원했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을 수 없이도 했었지만 그 이후 선생께서는 단 한 번도 꿈에라도 나타나 주지 않으셨다. 그런 선생께서 조금 전 처음으로 와주셨다. 그리고 처음 만난 그날처럼 내게 손을 내밀어 물어보셨다.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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