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힘을 잃고 쓰러지거나 밑바닥으로 내려앉다
갑작스럽게 그는 내게 번아웃이 온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삶에서 중요한 걸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그땐 이 말이 정신 나간 소리인 줄 몰랐다.
열심히 하는 만큼 그의 사업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 같아 나도 속상했다.
금전적인 것과 별개로 매일 고민하고 열심을 다하는 그에게
성취감이 있고 보상이 있길 바랐다.
그동안 열심히 일을 달려왔지만 번아웃이 온 남편이 안쓰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지만,
나에게 갑자기 너무나 차가워진 그의 눈빛과 모습에 나는 눈치를 살피게 됐고
남편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마음을 회복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한 번도 변함없이 내 옆에서 미소 짓고 바라봐 주던 그 사람을 다시 기다렸다.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언제나 당신 편이라는 것을,
나도 든든히 당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챙기며 기다림으로 표현하는 방법뿐이었다.
출근 준비 후 집을 나서기 전,
빈 속에 출근하지 않도록 도시락 통에 과일을 담고 포스트잇에 짧게
그의 하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과
내가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작은 메시지를 붙이고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돈 때문에, 사업 때문에 그가 스트레스받지 않길.
내가 그 사람한테 바라는 건 다른 무엇보다 그의 행복이었다.
그리고 늦은 오후, 나의 퇴근을 앞두고 그의 퇴근 시간을 물었다.
그동안 알던 그와는 너무 다른 말투에 나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조심스레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남편은 대전에 미팅이 있어서 다녀온다고 답했다.
차갑게.
'지금 출발해도 도착이 8시일 텐데.'
여러 가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물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힘들 그에게 서운한 내색 없이 잘 다녀오라고 답장했다.
여느 날과 다를 거 없이 퇴근 후 집 청소를 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방치된 듯 놓여있던 그의 애플 워치를 충전기 자리에 놓았다.
내 손이 뒷면 워치 센서에 닿아서였을까?
갑자기 워치가 작동되듯 여러 개의 알림이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여자의 촉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나 보다.
9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여다본 적 없는 그의 카톡을 우연을 빙자한 이유로 보게 되었고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여자와의 대화가 있었다.
강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