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의 다락방은 아주 넓어서 릴리가 모든 곳을 가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릴리의 다락방에 있는 것은 커다랗고 편안한 침대와 책장에 릴리가 읽을 책들이 가득 쌓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단면으로 인쇄된 책의 페이지를 찢어 빈 페이지에 가끔씩 글을 적어 창밖으로 던질 뿐이었다. 릴리는 누군가가 읽어줬으면 하는지, 누군가에게 보낸 건지 자신도 잘 몰랐다. 책장 옆의 투명한 책장으로 사라진 릴리는 지금 책장 속 어느 책에 들어가 있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하지만 릴리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지 릴리가 사라진 후, 빈 다락방에 이따금씩 종이비행기가 날아오면 종이비행기에 적힌 글로 릴리의 근황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릴리가 보낸 종이비행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친구를 만났어. 은하수를 담은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호박 유령 친구야.'
… 기시감이 느껴진다.
릴리가 다락방에 같은 내용의 종이비행기를 날린 적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봐도 같은 내용의 종이비행기는 날아온 적이 없는데, 이전의 종이비행기를 펼쳐 봐야겠다. 이건 처음에 릴리가 날린 종이비행기의 내용이다.
-'파란 우산'
릴리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릴리가 사라진 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그저 릴리의 책장 옆에 있는 투명한 책장의 기록을 읽을지 고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종이비행기는 한 번 펼치면 투명한 책장에 내용이 기록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 번도 투명한 책장의 기록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나에게도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걸까? 그것은 릴리의 근황과 관련이 있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투명한 책장 속의 기록들은 릴리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담고 있었다. 그곳에는 릴리가 날린 종이비행기와 그녀의 잊혀진 기억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그 기록들을 읽는 것이 두렵다.
릴리가 사라지기 전 경험했던 감정들을 알고 싶지가 않다.
괴로워하던 릴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은 책장의 모든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아마도 책장의 책에 적혀있지 않은 잃어버린 페이지의 기록은 투명한 책장에 함께 기록되어 있는 듯하다. 내가 책장의 책을 읽는 동안 종이비행기는 쌓여갔고 잃지 않은 릴리의 소식이 다락방을 가득 채울 만큼 쌓여있었다. 쌓인 종이비행기 중 하나를 펼쳐 보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글이 아닌 영화의 한 장면을 접은 듯 한 종이비행기로 릴리가 보는 장면들을 보기 시작했다. 릴리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릴리가 보내주는 종이비행기를 통해서 릴리가 보는 것들을 나도 볼 수가 있었다.
마치 영화처럼 펼쳐지는 장면들은 소리 없는 채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릴리는 투명한 책장 속에서 꿈을 꾸는 것일까? 그렇다면 릴리가 꾸는 꿈은 전부 환상일까? 이렇게 생생한데.. 소리가 듣고 싶었던 나는 릴리의 책장에서 읽은 책들의 텍스트들을 적절히 사용해 릴리의 꿈의 조각에 스스로 소리를 입혀본다. 그리곤 간절히 바래본다. 릴리가 보는 장면들이 꿈이 아니길.. 꿈이라면 사실이 되길 원하다가도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또 시간이 흐른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릴리가 사라지기 전에도, 사라지고 난 후에도 어떻게 종이비행기를 날릴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이비행기가 어떻게 다락방에서 사라진 후 다시 창문 밖 정원으로 날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겠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혹시 이곳에 나와 릴리 말고도 다른 존재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알아봐야겠다. 한 번 읽은 릴리의 책장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몇 번에 걸쳐서라도, 반드시, 알아야겠어! 알고 싶어졌다. 내가 투명한 책장을 읽을 수 있을 때가 언제일지 알고 싶어졌어..생각을 마치고 숨을 고르니, 종이비행기에 적힌 내용과 투명한 책장의 기록이 미세하게 다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책장의 책을 읽는 순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다.
책을 읽는 순서가 있다!
그때였다.
시간이 소리와 함께 다락방으로 들어오기 전 릴리가 생각이 났다. 투명한 책장의 기록은 책장의 책을 읽는 순서를 정해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릴리가 느꼈던 감정이 투명한 책장에 기록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리의 감정이 시간이 멈춰있었던 다락방에서 시간 관계에 상관없이 기록이 된다는 것, 그리고 책장의 책을 투명한 책장의 기록에 맞추어 읽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시간을 제외하고 릴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던 릴리를 떠올리며 릴리가 처음 읽었던 책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책장 앞으로가 릴리가 보던 책과 같은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책의 제목이 생각이 나질 않아 곤란하던 차였는데, 문득 책의 표지가 생각이 나서 같은 표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제목은 '멘토 프로테제 출판의 비밀: 시간이 얼어붙은 공간에서 망각의 마지막 말'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한참을 이 책을 읽어보는데 나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러곤 릴리가 투명한 책장 속 어떤 책 속의 어느 장면을 여행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릴리가 사라진 후 날아온 종이비행기에는 호박 유령 친구를 만났다고 쓰여있었다. 그 이후에는 글자가 아닌 장면으로 전해져 왔었다.
나는 이 책에 쓰인 내용에서 릴리가 보내온 장면이 어느 시점인지 찾아보았지만, 여전히 찾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 한 번 펼쳐진, 장면을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는 사라지고 릴리의 감정만이 투명한 책장에 기록되어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릴리가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그 당시의 나의 생각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리곤 알았다. 아무래도 이건 나의 절망이 될 듯하다. 기억은 나질 않지만 투명한 책장의 느낌으로 때려 맞출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한 떨림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투명한 기록을 손에 붙잡고 틀릴까 불안해했다. 책은 아주 복잡해서 한 번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페이지 속의 미로를 탐험하는 듯한 이 기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릴리는 마음껏 여행을 하는 동안 스스로도 모른 채 흔적을 종이비행기로 날려 보내는 듯하다. 나는 아직 펼치지 않고 쌓아둔 종이비행기를 펼쳐 보았다. 종이비행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많은 친구들을 만났어'
이번 종이비행기는 글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절망했다. 이 책에는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장면이 너무나도 많이 쓰였기 때문에 특정한 장면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전에 다른 종이비행기를 보고 했던 생각과 같다는 것.
-'많은 친구들을 만났어'
책에 기록된 것과 릴리의 종이비행기를 통해서 특정 시점을 찾아보았다. 릴리가 만난 호박 유령은 이 책에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단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장면 중 한 군데를 따라가 봐야겠다. 마음의 방향을 정하고 투명한 책장을 다시 바라보니 흔들리는 한 권의 책이 느껴진다. 그동안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점점 선명해지더니 투명한 책장에서 떠올라 페이지의 장면들이 마구 넘겨진다. 눈 앞의 페이지는 릴리가 처음으로 읽던 책의 한 페이지임을 직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