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눈두덩이가 자주 뜨겁다.
평소 잘 붓지 않던 눈이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남의 눈처럼 생소하게 부어 있다.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내 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마음이 아프고 편치 않으면
먼저 두통이 생겼고,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는
배고픔이라는 본능조차 느껴지지 않았었다.
몸이 먼저 알고, 마음은 한참 뒤에야 따라왔다.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순 없어요. 지금이 최고의 컨디션입니다.
앞으로 점점 나빠질 겁니다. 감기에 걸리면 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그러다 돌아가시는 거예요.”
의사의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선고에 가까웠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잠을 더 자지 못했다.
눈을 뜨면 눈이 뜨거웠고, 눈을 감으면 그 말이 맴돌았다.
괜찮다.
괜찮다.
지금만 생각하자.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살지 말자.
스스로를 달래고 애써 외면해 보아도
그 문장은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나를 지배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헤어짐을 먼저 아는 사람.
“누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지는 것이니 그리 슬퍼 말거라.”
이런 뻔한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결국은 이런 말로 마무리하게 된다.
나는 헤어짐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상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예전처럼 긴밀한 관계는 아닐지라도 손만 뻗으면 닿을 거라 믿었던 거리.
조금만 노력하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건,
슬픔이 되기도 하고, 우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배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늘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관계를 맺는다.
내 직업의 특성상 만남에는 언제나 끝이 따라붙는다.
슬픔이 익숙해질 리 없는데도 나는 익숙한 사람인 척한다.
담담한 얼굴로, 쿨한 말투로 헤어짐의 순간을 빠르게 통과하려 한다.
그런 나를 보며 상대는 울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덜 슬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슬퍼하는 방법을 조금 일찍, 남들보다 자주 배웠을 뿐이다.
시한부처럼 정해진 이별의 날짜를 알면서 애써 모르는 척하기도 하고, 알고 있기에 그 관계에 더 최선을 다하기도 한다.
이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세며 우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쁨과 행복으로 채우는 일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도
나는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끝을
이미 들은 사람의 자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아침에도
눈은 이미
많은 것을 본 것처럼
뜨겁게 부어 있다.
아무리 웃음과 즐거움으로 시간을 채워도,
아무리 담담하고 산뜻하게 이별 인사를 건네도
마음속 한 켠에는 슬픔이 켜켜이 쌓인다.
나만 아는 슬픔.
나만 견뎌야 하는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