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교실에서의 수학 교육
한국 부모님들이 처음 영국에 아이들을 보내면 가장 의아한 부분 중 하나가 아이들이 교과서가 없다는 부분일 거에요. 도대체 뭘, 어떻게 배우고 있는건지, 교과서가 없는데 우리 아이가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까 싶기도 하고 한국에서 자란 우리에게 교과서 없는 수업은 상상하기 어렵죠. 영국 학교에는 국가에서 발행하는 국정 교과서가 없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영국 선생님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수업을 준비하는 건지 오늘은 영국 초등학교 수학 수업의 비밀에 대해 현직 교사의 시선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영국 공립 학교의 모든 수업은 '내셔널 커리큘럼(The National Curriculum)'이라는 국가 교육 과정을 기준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이 학년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이 반드시 성취해야 할 목표 리스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맡고 있는 Year 2의 경우, 커리큘럼에는 "덧셈과 뺄셈의 관계를 이해하고, 이를 이용해 검산을 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교사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유롭게 수업을 구성합니다. 교과서의 1페이지부터 끝까지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좋은 재료를 교사가 직접 찾아 요리하는 셰프가 되는 셈이죠.
수학 내셔널 커리큘럼이 궁금하다면 링크를 클릭하셔서 key stage별 커리큘럼을 확인해 보세요.
하지만 매시간 모든 자료를 0부터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학교마다 '스킴(Scheme)'이라고 부르는 시중의 수학 프로그램을 선정해서 가이드라인으로 삼습니다.
대표적으로 White Rose Maths, Maths No Problem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 서점이나 인터넷에서 들어보셨을 겁니다.
* 여기서 잠깐! 왜 아이들은 이 책을 집에 안 가져올까요?
이런 스킴들은 학교 예산으로 구입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비용이 상당히 비쌉니다. 그래서 학교의 재정 상황에 따라 활용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학교는 전교생에게 워크북을 사주기도 하지만, 많은 학교들이 교사용 자료만 구독해서 스마트 보드(칠판)에 띄워 수업하고, 아이들은 공책에 풀거나 선생님이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사용합니다.
즉, 아이 가방에 책이 없다고 해서 수업 교재가 없는 게 아닙니다.
학교마다 사용하는 수학 프로그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어떤 스킴을 사용하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학교 웹사이트에서 확인하거나 교사에게 문의해 보세요.
그렇다면 모든 학교가 유명한 스킴을 그대로 따를까요? 저희 학교의 실제 사례를 들려드릴게요.
저희 학교도 원래는 싱가포르 수학으로 유명한 Maths No Problem을 사용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과감하게 이 스킴을 내려놓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문제가 너무 길고 복잡하기(wordy)'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아이들이나 문해력이 발달 중인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수학적 사고를 하기도 전에 긴 영어 지문이 장벽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학교는 국가 수학 교육 센터인 NCETM(National Centre for Excellence in the Teaching of Mathematics)에서 제공하는 공신력 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딱 맞는 수업을 직접 디자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교과서도, 스킴도 없이 선생님 혼자 매일 수업을 다 짠다고요?" 라고 놀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는 '멀티 아카데미 트러스트(Multi-Academy Trust)'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여러 학교가 하나의 재단으로 묶여 있는 형태죠.
제가 속한 재단(Trust)에는 총 12개의 학교가 있는데, 그중 5개 학교의 Year 2 선생님들이 뭉쳤습니다.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집단지성을 발휘합니다.
Zoom 회의: 정기적으로 줌 회의로 모여 다음 단원의 큰 그림을 그립니다.
역할 분담: "이번 덧셈 파트는 A학교 선생님이, 도형 파트는 제가 맡을게요."
자료 공유: 각자 맡은 파트를 NCETM 자료를 바탕으로 심도 있게 구성해 오고, 이를 서로 공유합니다.
한 학교에서 준비하면 부담이 많지만 서로 나눠서 하기 때문에 자기가 맡은 부분만 하면 되니 부담이 적기는 하지만 선생님들의 수준에 따라 수업 자료의 질이 달라져서 제가 속한 학교는 다시 또 자료를 보며 수정 작업을 합니다. 지금은 초기이기 때문에 우선 수업 자료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지만 자료가 다 만들어지고 나면 내년에는 수업 자료 질의 편차를 줄이는데 집중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훨씬 퀄리티 높고 창의적인 수업 자료를 만드는 셈이죠.
이 모든 수업의 바탕에는 'Mastery(숙달)'라는 영국 수학 교육의 핵심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을 주도하는 곳이 앞서 말씀드린 NCETM입니다. National Centre for Excellence in the Teaching of Mathematics 이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는데, 한국어로 풀자면 '국립 수학 교육 우수성 센터' 정도가 되는데, 영국 정부(교육부, DfE)의 자금 지원을 받아 설립된 공신력 있는 기관입니다. 링크를 클릭해서 밑으로 스크롤하면 학년별 커리큘럼 구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학부모님들이 이 기관을 아셔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① 교과서 위의 교과서 (The Architect): NCETM은 교과서를 파는 출판사가 아닙니다. 대신 "영국 아이들이 수학을 잘하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를 연구합니다. 싱가포르나 상하이 등 수학 선진국의 교수법을 연구하여 영국 실정에 맞게 도입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Mastery(숙달)' 교육 과정입니다. 시중의 유명한 문제집들(White Rose 등)도 결국 NCETM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② 선생님을 가르치는 학교 (Maths Hubs): NCETM은 단순히 자료만 홈페이지에 올려두지 않습니다. 영국 전역에 40개의 'Maths Hubs(수학 허브)'를 운영합니다. 이곳에서 지역 학교 선생님들을 모아 훈련시킵니다. 저를 포함한 영국의 교사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숫자를 암기가 아닌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토론하고 배웁니다.
③ 속도보다는 깊이 (Teaching for Mastery): NCETM이 가장 강조하는 철학은 'Deep Understanding(깊이 있는 이해)'입니다.
과거: 공식을 빨리 외워서 정답만 맞히면 넘어갔습니다.
현재 (NCETM 방식): 진도가 조금 느리더라도, 한 개념을 완전히 씹어 먹을 때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탐구합니다. (심지어 5+5=10 하나를 배우더라도 블록으로, 그림으로, 스토리로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저희 학교가 유명한 시중 교재 대신 NCETM 자료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화려한 문제집보다 수학의 본질에 가장 충실하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로 오후 시간에 10~15분 정도 짧고 굵게 진행하는데, 이 시간의 목표는 복잡한 문제 풀이가 아니라 '수 감각(Number Sense)'과 '유창성(Fluency)'을 기르는 것입니다.
저학년 (Reception ~ Year 2): 한국의 주산과 비슷한 'Rekenrek(수구슬판)' 같은 교구를 사용해 숫자의 구조를 눈으로 익힙니다. 예를 들어 7+6을 할 때, 손가락을 꼽지 않고 "5와 5가 만나 10, 남은 1과 2를 합쳐 13!" 하는 식으로 이미지를 그리며 순식간에 답이 나오도록 훈련합니다. 덧셈과 뺄셈의 기초 체력을 기르는 과정이죠.
고학년 (Year 4 ~ Year 5): 최근에는 고학년을 위한 프로그램도 도입되었습니다. 고학년은 곱셈과 나눗셈에 집중합니다. 단순히 구구단을 달달 외우는 것을 넘어, 곱셈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자동으로 튀어나올 수 있게(Automaticity) 훈련하여, 더 복잡한 수학으로 나아갈 준비를 시킵니다.
이 짧은 10분이 매일 쌓여, 아이들은 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튼튼한 '수학적 근육'을 갖게 됩니다.
학교에서 이렇게 촘촘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가정에서의 서포트도 중요합니다. 영국 수학 교육에 도움이 되는 팁과 리소스를 알려드립니다.
① 추천 프로그램: Numberblocks (넘버블록스)
영국 BBC에서 만든 Numberblocks는 단순한 만화가 아닙니다. 영국 수학 교육 과정(Mastery)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낸 최고의 교육 자료입니다.
숫자 '5'가 블록 5개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이 '2'와 '3'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체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에게 "그냥 봐"라고 하지 마시고, "어? 5가 2랑 3으로 나눠졌네?"라며 옆에서 거들어 주세요. 수의 개념을 잡는 데 이보다 좋은 시청각 자료는 없습니다.
짝수, 홀수 구별법도 재미있는데
짝수 (Even): 블록들이 두 줄로 섰을 때 머리 위가 평평합니다 (Flat Top).
홀수 (Odd): 블록 하나가 짝을 찾지 못해 머리 위에 '톡' 튀어나와 있습니다 (Odd Block). 아이와 함께 "얘는 머리가 평평하네? 짝수일까?" 하고 모양을 보며 이야기해 보세요.
② 추천 웹사이트/앱
Oak National Academy (온라인 무료 자료 및 수업): 영국 정부가 지원하는 온라인 학교입니다. 원래는 코비드 기간에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자료들이 업데이트되고 있어 현재도 유용한 학습 리소스로 많이 사용됩니다. 이곳에서 아이 학년에 맞는 수학 자료를 찾아볼 수 있으며, 학교에서 사용되는 NCETM 커리큘럼을 기반으로 한 수업 영상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학교 수업을 결석했거나 특정 단원을 어려워해서 집에서 복습하고 싶다면, 유튜브나 다른 사설 강의 대신 이곳의 영상을 참고하는 것이 학교 수업과 가장 유사한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Topmarks - Hit the Button처럼 구구단(Times tables)과 수의 짝꿍(Number bonds)을 게임처럼 연습할 수 있는 무료 웹사이트/앱입니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합니다.
White Rose 1-Minute Maths (App): 무료 앱으로, 짧은 시간 동안 수 감각을 익히기에 좋습니다.
③ 집에서의 대화법
Number Bonds 놀이: 차 안에서나 목욕할 때, 퀴즈처럼 10, 20을 만드는 짝꿍 수 찾기 놀이를 해주세요. "10을 만들려면 3한테 친구가 몇 개 더 필요할까?"
과정을 물어봐 주세요: 답이 틀려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답이 나왔어?라고 물어봐 주세요. 아이가 "아까 학교에서 배운 블록 생각해서..."라고 설명한다면 폭풍 칭찬을 해주셔야 합니다.
영국의 교실은 눈에 보이는 교과서가 없는 대신, 선생님들의 치열한 고민과 협업(Zoom 회의), 그리고 아이들의 기초를 탄탄히 다져주는 프로그램(Mastering Number)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가방이 가볍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아이들의 수학적 사고력은 그 누구보다 단단하게 자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