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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한석사 Aug 06. 2024

어린왕자 in SEOUL(#01프롤로그)

어릴 때 나는 특이? 특별? 독특? 4차원? 지금 생각해 보면 하여튼 평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종말론을 믿었고 귀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사후 세계는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믿고 Y2K에 벌벌 떨었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믿었고 외계인은? 당연히 있다. 어느 날은 배가 고파서 제일 친한 친구에게 텔레파시를 보낸 적이 있는데 정말로 밥을 사줬다. 게다가 돈가스라니. 그동안 얘기나 들어봤지, 먹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자 친구니까 부담 없이 즐겼다. 하지만 다음 날 그 친구는 죽었다. 그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텔레파시를 절대로 보내지 않았다. 오래전 일이고 어릴 때 기억이라 그때 친구에게 보낸 텔레파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좋아하던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을 그만둘 정도였다면 분명 엄청난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 집은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평범하지도 않았다. 남들은 다 있다는 용돈도 나에게는 없었기에 필요하면 돈을 달라고 했고 준비물을 사려고 해도 눈치를 봤던 것 같다. 문제집도 돈 주고 산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학교 성적이 좋았다. 공부는 못했다. 머리가 좋다고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 듯했다. 아무튼 미화부장이라 학교 소각장에 자주 갈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항상 선생님들이 버린 문제집이 한가득했다. 비록 답이 적혀 있는 문제집이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출판사에서 선생님에게 문제집을 공짜로 주고 아이들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미리 알았다면 선생님에게 달라고 했을 것이다. 아니다. 달라고 못 했겠다. 지금이야 달라고 했겠지만, 그때는 그저 어린애일 뿐인데 용기가 있었을까?     


용기가 있었다면 고등학교 때 명찰을 달지 않았다고 엎드려뻗쳐 시키고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찬 선생님에게 대들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장난도 잘 치고 친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피자도 사주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명찰 달지 않았다고 그동안은 뭐라 안 했는데 그날은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교장선생님과 함께라는 것이다. 어른이란... 


어른을 혐오했는지 지금은 영재교육 전문가로 강의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다행히 컨설팅 한 번 하는데 몇십만 원씩 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을 참 좋아한다. 아마 그때 그 소각장에서 발견했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각장에는 문제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도 있었는데 그날은 노랑머리의 외국인이 그려져 있는 책을 주웠다. 외국인이 그려져 있길래 공상과학책인 줄 알았는데 어린 왕자였다.


문제집처럼 집에 가져가기는 했는데 역시 문제집처럼 꺼내 보진 않았다. 책상에 꽂아 놨다가 여름방학이나 돼서야 읽어봤다. 만화책인 줄 알았다면 바로 읽어봤을 텐데. 만화책이란 것을 알고부터는 낡아빠진 그 책을 수백 번 읽었을 것이다. 어쩌면 천 번도 더 읽었을 수도 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만화책은 그게 유일했으니까.     

나중에는 글로 되어 있는 어린 왕자를 사서 읽었지만, 그 책은 한 번만 읽고, 읽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을 글로 써 놓은 것뿐이니까.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도 어린 왕자 이야기만큼은 머릿속에 한 평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뇌의 면적이 대략 2,500제곱센티미터니까 계산하면...   

  

어린왕자를 천 번 읽어 본 사람이 있을까? 비록 만화책이지만 전 세계에서 어린 왕자를 천 번 넘게 본 사람은 내가 유일할 듯하다. 그래서였을까? 믿지 못하겠지만 실제로 어린 왕자를 만났다. 손도 잡아봤고 목소리도 들었다.     


정말 오랫동안 어린 왕자와 이야기했고 같이 여행도 갔다. 당연하겠지만 그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죽기 전에 혹시 유언으로 남길 수는 있겠지만 그전까지는 이름을 밝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릴 때 텔레파시를 그만뒀던 이유와 같다.     


내가 어린 왕자와 만났다는 것을 아직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너무나 말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과연 그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있을까? 입만 아프고 시간만 아까울 뿐이다. 나만 우스운 사람만 될 뿐이다.  

   

어른이란 그런 것이다. 본인이 직접 겪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 누가 주식이 오르니 사 놓으라고 하거나 어느 지역 땅값이 오른다고 하는 말은 철석같이 믿는다. 어른들의 생각은 그저 그 사람이 겪어 온 환경, 자라 온 역사 밖으로는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     


태어나서 전 세계를 다 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의 어느 도시를 다 둘러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 세계의 사람들 모두와 말을 나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른의 생각은 태어난 곳에서 고작 본인들이 듣고 본 것들로만 구성된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린 왕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어른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을 테지만 혹여 나처럼 어린 왕자를 천 번을 읽었다는 아이가 있다면 그때는 말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그 아이는 내 말을 믿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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