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떠난 어린 왕자는 한참을 걸었다. 서울의 불빛은 여전히 밝았지만, 조금씩 조용해지고 있었다. 차 소리는 줄어들었고, 대신 바람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발걸음이 더 또렷해졌다. 걷다 보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졸졸, 작고 얕은 소리였다. 어린 왕자는 발걸음을 멈췄다.
“또 강이다.”
그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강보다 훨씬 작았지만, 물은 분명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가로등 불빛들이 길게 늘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어린 왕자의 눈이 커졌다.
“여기는… 별이 더 많네.”
물 위에는 점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줄지어 있었다. 흔들리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어린 왕자는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청계천이었다. 그는 물 가까이에 앉았다. 손을 내밀자, 차가운 물이 살짝 닿았다. 동그랗게 파문이 퍼졌다. 빛도 함께 흔들렸다.
“여기 별은… 만질 수 있어.”
그가 작게 말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하아…”
한 남자가 계단에 털썩 앉았다. 정장이 조금 구겨져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손에는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캔이 들려 있었다. 어린 왕자는 고개를 기울여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남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
“조금… 힘들어 보여요.”
남자는 캔을 들어 올렸다.
“이거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눈을 깜빡였다.
“그건 뭐예요?”
“술.”
어린 왕자는 천천히 그 단어를 따라 말했다.
“술…”
남자는 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마시면… 좀 덜 생각하게 돼.”
어린 왕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을 줄여주는 거예요?”
“응. 아니지 기분 좋게 해줘.”
어린 왕자는 잠시 생각했다.
“좋은 거네요.”
남자는 웃었다.
“그렇지. 그래서 다들 마셔.”
잠시 바람이 스쳤다. 물 위의 별들이 흔들렸다. 어린 왕자는 다시 물었다.
“그럼 계속 마시면 계속 좋아져요?”
남자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음 날 더 힘들어.”
어린 왕자는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술이란 것은 먹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술에서 깨면 엄청 고통스러워.”
어린 왕자는 조용히 말했다.
“술에서 깨는 것이 무슨 말이에요?.”
남자는 어린왕자의 말에 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술이 날라가는 거지. 술이 몸에 있는 동안은 기분이 좋은데, 술이 사라지면 고통스러워져. 원래대로 돌아와.”
“고통스러운 것인데 왜 먹는 것이에요? 나는 예전에 소혹성에서 술주정뱅이를 만난 적이 있어요. 부끄러운 것을 잊어버린다고 했어요. 그리고 부끄러움을 잊어버리려 술을 마신다고 했어요.”
남자는 어린왕자의 말에 답했다.
“그렇지 부끄러움것을 잊어버리려고 술을 마시기도 하지.”
“그런데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서 술을 마신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린 왕자의 말은 조용했지만,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 남자는 잠시 웃으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게… 좀 이상하지?”
“네. 조금 이상해요.”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빙글 돌렸다.
“사람은 가끔 자기 자신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어.”
어린 왕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에 안 들면… 고치면 되지 않아요?”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
“왜요?”
남자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잘 안 되니까.”
어린 왕자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열심히 해도 안 되고, 계속 떨어지고, 남들은 다 앞으로 가는 것 같은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고…”
남자의 말은 점점 작아졌다.
“그러다 보면… 내가 좀 싫어져.”
어린 왕자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거예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깐이라도 괜찮아지니까.”
“그럼 괜찮아져요?”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조금은.”
“조금이면 충분해요?”
남자는 어린왕자의 말에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충분하지 않아…’
중얼거리는 소리에 어린 왕자가 다시 물었다.
“왜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운 데 술을 마실까요?”
남자는 어린 왕자의 질문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잘 안 멈춰져.”
어린 왕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멈추고 싶은데 멈추지 못하는 거예요?”
남자는 작게 웃었다.
“응. 알면서도 하게 돼.”
잠시 바람이 스쳤다. 물 위의 별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시고 나면… 후회해.”
“그럼 안 마시면 되지 않아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렵다니까.”
어린 왕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후회하는데 또 하고, 또 후회하는 거네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물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럼… 부끄러워서 마시는 게 아니라, 부끄러움을 안 보려고 마시는 거예요?”
떨리던 남자의 손이 잠깐 멈췄다. 어린 왕자는 이어서 말했다.
“눈을 감으면 안 보이니까요.”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근데 눈을 감으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물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별도… 흔들려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응.”
“근데 없어지진 않아요.”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네…”
어린 왕자는 물 위를 가리켰다.
“눈을 감으면 안 보이지만… 그래도 있는 거죠?”
남자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래서 더 무거운가 보다.”
어린 왕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거워요?”
“응. 안 본 척한 게… 쌓이거든.”
어린 왕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보면 되겠네요.”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조금만?”
“네. 다 보려고 하면 힘드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 위의 별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다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오늘은… 조금만 봐야겠다.”
어린 왕자는 환하게 웃었다.
“여기 별이 많아서… 연습하기 좋을 거예요.”
남자는 피식 웃었다.
“…이상한 애네, 너.”
어린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한숨처럼 웃음을 내쉬었다. 잠시 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겠다. 첫차 타야지.”
어린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가세요.”
남자는 몇 걸음 올라가다가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야.”
“네?”
남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오늘은… 술보다 별이 더 낫다.”
어린 왕자는 환하게 웃었다.
“별은 안 취해도 보여요.”
남자는 웃으며 돌아섰다. 발걸음이 천천히 멀어졌다. 어린 왕자는 다시 물을 바라봤다. 빛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봐도… 괜찮구나.”
그리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