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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 Aug 25. 2024

절대 한국에 돌아가지 않으리!

평화롭고 행복할 줄만 알았던 미국 생활에 첫 위기가 찾아왔다. 생각보다 큰 위기였다. 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미국에선 병원 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해외를 나가기 전 꼭 병원을 들러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꼭 들려야 할 병원은 다 들렸다. 병원 투어를 돌고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미국에 왔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귀에 문제가 생길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고 그전에도 아팠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뭐가 문제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비행기에서 귀가 가렵다는 느낌은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조금 가려웠을 뿐 다른 이상은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뉴욕에 도착해, 한 일주일은 아무 문제 없이 지냈다. 문제는 3주 정도 되었을 때부터 귀속이 눅눅하고 노란 진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불편하다는 것을 감지하자 정말 빠른 속도로 문제가 심각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귀에서 흘러나온 노란 진물이 베개에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상생활도 불편하고 귀가 계속 붓고 간지러워 잠을 잘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한인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인 유학생들을 도와주는 센터를 찾게 되어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 계시는 선생님은 친절하게 한인 병원 몇 곳을 알려 주셨다. 유학 와서 병원에 가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다 보니 선생님도 어떤 병원이 좋은지는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타지에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것보단 다행인 일이니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한인 병원을 예약하는 것도 일이었다. 미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진료를 받으려면 무조건 예약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라 꼭 예약해야 하는데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겐 전화로 예약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같이 지내던 룸메이트 언니들이 예약하는 것을 도와줘 뉴저지에 있는 한인 병원을 예약할 수 있었다. 예약 당일 하필 전날 폭설이었던 뉴욕은 온통 눈으로 거리는 덮여있었고 매우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우버(택시)를 타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요금이 많이 나올 것 같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첫 뉴저지 병원 찾아 삼만리가 시작되었다.


집에서 나와 트램을 타고 반쯤 가다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조금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엄청 멀지도 그렇다고 엄청 가깝지도 않은 거리이지만 체감상으론 굉장히 먼 곳을 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지하철을 타고 내렸는데 이때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버스를 타야 하는데 한국처럼 버스 정류장이 잘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카드를 찍는 시스템도 아니었다. 표 사는 기계를 간신히 찾아 표를 사고 버스를 기다렸다. 표 사는 기계는 정말 다 망가져 가는 누가 봐도 고장 난 기계처럼 생겨 찾는 데 한참 걸렸다. 한국처럼 버스가 어디쯤 왔다는 표시를 해주는 그런 친절한 안내 서비스는 없었다. 그래도 버스는 금방 왔고 무사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를 타는 순간 내 눈을 조금 의심했다. 버스 좌석이 다 망가져 앉은 게 앉은 게 아닌 그런 이상한 버스였다. 바르게 앉으려 해도 계속 엉덩이가 미끄럼틀 타듯 밀려 내려와 결국 내 두 다리로 지탱하며 앉아야 하는 의자였다. 버스의 의자는 서로 마주 보고 앉는 구조였는데 모두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그런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쳐다 볼만도 한 것이 아시아인이 거의 없는 동네였기 때문에 내가 신기한가 보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때 난 온통 신경이 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원을 무사히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병원 근처에 내렸는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차로에 세워준 것이다. 말 그대로 도로 옆에 덩그러니 말이다. 그렇게 구글 맵을 켜고 병원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구글 맵이 미국에선 정말 유용하게 쓰였다. 한 10분 정도 걸어야 했고 그렇게 눈바람을 맞으며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아주 오랜만에 귀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도착했다. 나를 본 간호사들은 모두 이렇게 눈이 많이 오고 바람이 부는데 어떻게 왔냐며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Subway, Bus, Walk 이렇게 3 단어로 표현 가능한 답변을 마치고 간호사는 설문지 종이를 여러 장 주었다.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장의 설문지를 보고 당황했다. 설문지엔 내가 먹던 약은 없는지 앓고 있던 병은 없는지 등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고 파파고를 열심히 돌리며 설문지 질문들을 번역하며 써 내려갔다. 마침내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고 의사 선생님은 귀를 보시더니 일주일에 2번은 병원에 와서 진물을 빼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이염, 외이염 등 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병은 다 가지고 있다며 항생제와 귀에 넣는 약을 처방해 주셨다. 뉴저지 병원까지 매번 올 자신이 없어 간호사님께 맨해튼 안에 추천해 줄 한인 병원이 있느냐고 물었고 간호사님은 맨해튼 안에도 이 의사 선생님의 병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알고 보니 격일로 맨해튼과 뉴저지 병원에 계신다는 것이다. 너무 다행이다 싶어 바로 다음 예약을 맨해튼 병원으로 잡고 병원을 나왔다. 약국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주신 간호사님 덕분에 문제없이 약국에 갈 수 있었다. 약국 약사 선생님도 한국 분이셨고 약사님은 내가 유학생인 것을 한 번에 알아보셨다. 그러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번호로 전화하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나와 같은 나이의 딸이 있으셨던 약사님은 유학 와서 이런 고생하는 걸 부모님께서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시겠느냐며 너무 딸 같아서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번호를 주신 것이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은 건 처음이라 정말 감사하다며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약을 받아 집에 가려 나왔는데 온몸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도저히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갈 자신이 들지 않아 우버를 불렀다. 그래도 두 번 택시를 탄 건 아니니 괜찮다는 합리화로 마음이 편해진 나는 눈 내린 맨해튼을 보며 집에 가는데 이상하게 뿌듯하면서 감사한 감정이 훅 올라오는 것이다. 이 타지에서 나 혼자 무언가 큰 걸 해낸 느낌이었다. 병원 한번 찾아가는 것도 힘든 상황에 짜증이 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기보단 이렇게 좋은 병원에 무사히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주변에서 계속해서 도와준 일들이 떠오르면서 감사한 마음이 더 들었던 것 같다. 



이 시기를 생각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이 언니는 교회에서 만난 언니였고 난 이 언니를 알프스 천사 소녀라고 부른다. 병원에 다니며 귀를 치료하던 중 하필이면 병원이 문 닫은 날 귀가 또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만났던 언니가 혹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라던 말이 생각나 전화를 걸었고 언니는 도와주겠다며 바로 만나자며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언니를 만나 처음 알게 된 시스템인 한국의 보건소와 같은 개념의 Walk in 센터에 가게 되었다. 나도 이것이 어떤 개념의 병원인지는 잘은 모르겠다. 미국에선 병원은 조금 더 많이 아프고 심각한 상황일 때 가는 곳인 것 같고 이 Walk in이라고 불리는 센터는 치료보다는 점검 정도를 해주는 센터였다. 그렇게 언니의 도움으로 진료 접수를 하고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정말 말 그대로 점검을 하고 약을 받을 수 있게 처방전을 주는 센터였다. 별다른 걸 해준 건 없지만, 약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언니는 진료 내내 통역을 해주며 어디 다른 아픈 곳은 없는지 물어봐 주었다. 그러면서 밥을 사주겠다며 치폴레에(멕시칸 음식점) 데려가 밥을 사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언니는 중요한 사진 전시회를 준비 중이었고 사실은 그 중간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나와준 것이었다. 한 번도 싫은 티 내지 않고 정말 진심으로 하나하나 도와주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 너무 고마워 다음번에 밥이라도 사겠다는 말을 남기며 헤어지게 되었다. 


매우 추웠던 금요일 밤 예배가 끝나고 선물을 주려고 작은 마카롱 선물을 준비해 갔다. 예배가 끝나고 밖에 나오는 길에 언니를 만나 작지만, 그때 정말 고마워서 준비했다고 선물을 주었다. 언니는 자신이 뭐 한 게 있느냐며 이 작은 선물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밤 9시 뉴욕 건널목에서 억지로 손에 마카롱 상자를 쥐여주며 “언니 정말 고마워요”라고 했던 게 이 언니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이후 언니는 다른 주로 가게 되었고 인스타로는 근황을 간간이 보며 지내지만, 다시 만나거나 얘기해 본 적은 없다. 이 언니를 표현하자면 알프스에서 온 천사 소녀 같다. 맑고 투명하며 자연스러운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는 언니의 모습은 나에게 그렇게 남았다. 뾰로롱! 하는 효과음과 함께 나타나 뾰로롱! 하며 사라진 언니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병원에 다니는 와중에도 귀는 계속 아팠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교회에서 만난 언니들은 한국에 돌아가서 치료를 받고 다시 오는 게 어떻겠냐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절대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이곳에서 잘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던 것 같다. 그 정도로 난 뉴욕에서의 생활이 좋았고 이 좋은 경험을 이렇게 짧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힘들었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물론 아프긴 했지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매 순간순간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기억나는 뉴욕 생활 중 가장 고마운 기억이다. 다들 정말 뭔가 바라지 않고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날 도와주었다. 너무 고마워서 작은 선물을 주려고 해도 받지 않으려 했고 도리어 또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뿐이었다.


참 신기한 기억이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많은 도움을 한꺼번에 받은 기억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모두가 너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도 처음이라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뉴욕 생활이 끝날 무렵 교회에선 건축헌금을 받고 있었고 나는 내가 받았던 조건 없는 도움을 건축헌금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 후원금을 통해 내가 받은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마무리를 지을 수 있어 참 감사했던 순간이다. 마음은 돌고 도는 것 같다. 내가 받은 그 조건 없는 도움과 마음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채워졌으면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신 한인 병원 의사 선생님, 간호사님, 룸메이트 언니들, 교회 언니들, 약사님, 뉴욕센터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다. 


한국에 돌아와서 읽게 된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146~147쪽에 나오는 내용 중 하나이다.


이런 환대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언젠가 읽은 여행기에서 나는 답을 찾았다. 저자는 북유럽 여행을 하던 중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제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니가 버스 요금을 내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이 글을 읽고 내가 받은 도움들은 바로 환대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환대는 순환되는 것임을 경험한 나로선 믿지 않을 수 없는 글이었기에 멋진 글로 남겨주신 작가님의 글을 빌려왔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146~147쪽 내용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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