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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가르 파르하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나의 진실과 그대의 진실. 그 무관함에 대하여

by 도연호

저는 경영학과 생도라 회사법을 배웁니다. 비록 아주아주 미미한 양의 법 공부이기는 하지만요. 처음 법을 공부하기 전에 가진 편견이 하나 있다면 판결하는 일은 무지 쉬울 것이라는 편견이었습니다. 지금보니 허무맹랑한 편견이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형량과 죄의 경중을 가리기가 어려울 뿐이지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는 불 보듯 뻔해 법이 아닌 도덕성만으로 쉽게 판별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사람을 죽였어? 죄를 지었지. 안 죽였어? 죄를 안 지었지. 그러나 세상은 그처럼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황금곰상을 받은 이란 영화입니다. 뭐랄까, 지금 할리우드가 영화 산업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란 영화가 최고의 국제 영화상을 받았다는 것은 특이합니다. 정치인들의 압력으로도 무마할 수 없을만큼 영화 완성도가 높아서 상이 수여되었을 수도 있고요, 혹은 완전히 반대로 정치적인 이유로 상이 수여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될 만 하겠죠. 제가 직접 본 입장에서 전자에 가깝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보았던 영화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들만한 뛰어난 영화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들고 다닌다고 해도 아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도 꼭 봐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아마 보시지 않으셨다면 이후의 글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보셨다면 제 글을 기대하고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파르하디가 보여준) 진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특별한 점은 차분하고 담백한 눈으로 연출되었다는 점입니다. 여러 인물들의 시선을 복합적으로 담아내어 관객들이 스스로 영화에서 일어난 사건을 판단하도록 객관적인 시선으로 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편집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사건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화양연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의 배우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영화는 제목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임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들이 별거하는 이유를 끝끝내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영화 내용도 별거에 대한 내용이 아닙니다. 영화 내용은 남편 나데르가 자신의 치매에 걸리고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침대에 묶어두고 몰래 나간 간병인 라지에를 쫒아내다 라지에를 유산시키며 벌어진 법적인 공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적인 공방을 통해 영화는 관객들이 판단해야 할 진실을 두 가지로 한정합니다. 하나는 나데르가 간병인 라지에를 실제로 유산시켰는가?에 대한 진실입니다. 두번째는 나테르는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는가?에 대한 진실이죠.


이 진실들은 의도적으로 관객이 보지 못하도록 숨겨졌다가 후반부가 되어서야 드러납니다. 이 진실이 드러나는 영화의 구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걸작 <라쇼몽>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죠.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은 진실을 조금씩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나데르는 라지에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데르가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살인죄로 3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할 형편이었고 씨민과 별거하고 있던 그는 딸과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거짓말을 했죠. 반대로 라지에는 나데르의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가자 그를 보호하려다 차에 치인 사실을 숨겼습니다. 유산은 나데르가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었죠. 씨민은 나데르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이를 법정에서도 심지어 나데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계급


진실은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더 다루도록 하고, 이 영화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법은 계급입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딸은 페르시아의 계급도를 달달 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데요. 씨민과 나데르 가족이 하나고, 나머지 하나는 라지에와 호잣 가족입니다. 두 가족은 여러 면에서 대비됩니다. 씨민과 나데르 가족은 꽤나 부유하죠. 나데르는 재판 과정에서 항상 예의바르게 상대방을 대하려 노력합니다. 심지어 호잣의 구금을 막으려 선처를 부탁하기까지 하죠. 호잣과 라지에의 딸에게도 자상하구요. 반면 호잣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성을 함부로 드러냅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딸 학교에 찾아와 고함을 지르는 행패를 부립니다. 이에 나데르와 씨민이 고용한 가정교사는 조심스럽게 호잣이 라지에를 폭행해 유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할 정도이죠.


영화는 이렇게 상대적 하층민에 대한 편견을 영화 내부로 한정짓지 않습니다. 의도적인 편집으로 호잣을 악인으로 씨민과 나데르는 선인으로 보이게 합니다. 결말부 독실한 신자인 라지에가 결국 코란에 손을 얹고 거짓말을 하기를 거부하며 진실이 들통나자 무언가 깨지고 때리는 소음이 들립니다. 관객은 결국 호잣 이 쓰레기가 아내를 패는구나 지레짐작하죠. 그런데 호잣은 스스로를 탓하며 자신을 마구 구타하고 있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둘러싸인 채로요. 그는 부당하게 해고당했으나 법은 가난한 이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나데르와 라지에의 법적 공방에서 법원이 라지에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처럼요. 영화를 보는 관객들조차도 라지에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이 참담한 현실을 감독은 치밀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고발합니다.


이 영화에는 눈치채기 어려운 뛰어난 시퀀스가 여럿 존재하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라지에가 나데르에게 밀쳐져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입니다. 임신한 라지에는 씨민과 나데르의 집을 오르는 길고 높은 계단을 밟으며 어지럼증을 호소합니다. 나데르가 돈을 훔쳤다고까지 모욕하자 그녀는 집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지만 밀쳐지고 계단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고 <하녀>와 <기생충>이 문득 생각이 나더군요. 두 영화에서 계단이 활용된 방식과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계단이 활용된 방식은 일치합니다. 상대적 하층민이 상대적 상층민의 집에 침입하고 끝내 밀쳐져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져 파멸을 맞는 것입니다.




관계


이 영화를 바라보는 세번째 방식은 관계입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의 관계가 있을 것이구요. 또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있습니다. 씨민과 나데르를 아주 세밀히 뜯어보면 두 인물은 기본적으로 선하지만 결점이 있는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씨민은 우유부단하고 결단을 미룹니다. 자기 의견을 전달하는데 어려움을 겪죠. 나데르는 자상하고 따뜻하며 결단력도 있지만 반대로 독선적이고 오만합니다. 둘이 별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관객은 위의 법적 공방 사건을 살피며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어떤 그 관계의 모호성과 무너짐을요.


관계의 모호성과 무너짐을 다루는 영화의 특징적인 연출이 있다면 창문입니다. 흐린 창문을 통해서 서로를 바라보는 씨민과 나데르. 둘의 사이는 오프닝부터 창문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엔딩에서도 법원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 다른 공간에 앉아있죠. 하지만 창문은 인물을 단절시키는 기능 외에도 다른 기능을 소화합니다. 보호하는 기능이죠. 부부가 자식이 부부 싸움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문을 걸어잠그는 장면. 아버지의 상처를 입증하려 아버지의 단추를 풀다가 아버지의 맨몸을 의사에게 보이기 싫어 다시 잠그는 나데르. 딸이 벗은 아저씨의 몸을 못보게 하려 화장실의 문을 닫는 라지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려 나에게서 단절하는 행위의 이중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또 이 영화에서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방식도 주목해볼만 합니다. 양 부모들은 표면적으로는 딸을 위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지만, 결국은 이기심으로 똘똘 무장한 자신의 과오에 대한 하나의 변명으로서 딸들을 이용합니다. 호잣과 라지에는 결국 아이를 유산시켰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죽은 아이를 이용해 씨민과 나데르에게서 합의금을 얻어냅니다. 나데르와 씨민은 딸의 교육을 위한 문제로 다투며 별거를 선택했지만 정작 감정 싸움을 시작하자 딸은 뒷전이었고 두 부모의 피터지는 싸움에 딸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관객에게 숨겨진) 진실


이 영화가 진실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있다면 이는 진실을 향한 열망입니다. <조디악>의 그것과 비슷하죠. 나데르와 라지에는 각자가 알고 싶어하는 진실이 있습니다. 나데르는 자신이, '자신이' 라지에의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라지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진실한지 종교를 통해 알아내려 합니다. 하지만 둘이 알아내려 하는 진실은 다른 중요한 진실들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후반부 관객에게 라지에는 차에 치여 유산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그것이 어떤 차이를 불러왔나요. 죽은 아이가 살아돌아왔나요? 혹은 라지에가 왜 유산했는지 알게 되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결국 우리가 알아야할 단 한가지의 사실은 '라지에의 아이가 죽었다‘는 겁니다.


나데르의 진실에 대한 집착적인 태도와 그의 독선을 보여주는 한가지 복선이 또 있어요. 주유소 시퀀스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실 것이라 믿고 넘어가겠습니다. 따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나데르는 잔돈을 딸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나데르는 이처럼 하나의 단어로는 정의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입니다.


영화의 엔딩은 진실에 대한 맹목적 추구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마지막에 결국 이혼하게 된 씨민과 나데르의 앞에서 판사가 딸에게 묻습니다. 누구랑 살고 싶은지 정했어? 딸은 눈물을 철철 흘리고 씨민과 나데르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딸의 대답을 보여주지 않고 매듭지어집니다. 딸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철철 흘리게 된 딸 앞에 고개를 숙인 부모들의 이미지가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죠.


영화가 표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다른 몇몇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적을테니 각자 스스로 답을 해보시면 영화를 더 흥미롭게 관람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돈을 누가 훔쳤는가?입니다. 답을 말씀드리자면 씨민이 들고 가서 인부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사를 돕던 인부들이 추가적인 돈을 요구하자 나데르가 이유가 없다면 줄 수 없다는 고집을 뿜어낼 것이 뻔히 보인 씨민은 그냥 자신이 인부에게 돈을 건네버립니다. 그대로 씨민이 별거해버려서 나데르는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었죠. 이는 나데르의 독선과 씨민의 우유부단함을 지적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두번째는 왜 씨민은 이민을 가려 했는가?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딸의 유학을 위해서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닙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씨민이 나데르의 아버지를 간병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나데르는 자기 아버지가 똥오줌 못가리는 것도 모르고 있어요.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여러 질문들과 진실들을 통해서 감독은 궁극적으로 씨민과 나데르가 별거하게 된 이유를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들이 별거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작은 시퀀스들과 대사들에 숨겨둠으로서 관객들이 더 깊게 사유하도록 유도 하는 셈이죠.


진실과 법, 종교 그리고 관계에 대한 사유를 담은 뛰어난 영화.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입니다.




평점 5/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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