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와 기괴 사이
오늘은 러시아의 초기 영화들 가운데 하나를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1916년 영화라 흑백 영화일뿐만 아니라 무성 영화인데요. 2시간이 안 되는 영화 분량인데다 긴박감이 넘치고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연출이 100년전 영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라 꼭 한번 소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러시아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구요. 저는 소련 영화사 시간에 이 영화를 보았는데요. 당시 고딕 문학과 관련된 영화를 쭉 수업해 왔었는데 최근에 또 고딕 문학과 관련된 훌륭한 감독들의 훌륭한 작품들이 꽤 나오고 있어 <스페이드 여왕>이 꽤나 많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브런치에도 자주 소개되곤 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이나 곧 공개될 로버트 애거스 감독의 <노스페라투>가 그렇습니다. 특히 <노스페라투>는 리메이크작이고 원작이 위대한 영화인만큼 영화사적으로 <노스페라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노스페라투는 다른 뱀파이어들과 어떻게 다른지 공부하고 가신다면 영화를 더욱 깊고 다층적으로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페이드 여왕>은 제가 앞서 말한 영화들의 시초와도 같은 영화이구요.
아마 아무도 보신 분이 없으리라 생각되어 줄거리를 제가 다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냉철한 게르만은 늙은 백작부인이 카드놀이에서 반드시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백작부인의 피후견인인 리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합니다. 리자는 사랑에 빠져 게르만을 백작부인에게 인도하지만 게르만이 총을 겨누며 협박하자 충격을 받아 죽고 말죠. 리사는 게르만을 떠나고 게르만은 백작부인의 유령을 만나 3, 7, 에이스를 차례로 내면 카드놀이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거액을 건 카드놀이판에서 게르만은 에이스 대신 스페이드의 여왕을 내버리고 맙니다. 죄책감과 충격에 미쳐버린 게르만이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결말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만약 아래의 글을 읽으시고 재밌는데? 싶으셨다면 유튜브에 Queen of spades 1916 version이라고 치시면 무료로 공개된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줄거리는 단순하죠? 이제 해당 작품이 영화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해볼까합니다. 먼저 초기 소련의 영화들은 연극을 단순히 촬영한 것을 영화관에 상영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당연히 돈도 많이 안 들었구요. 영화사들은 연극을 단순히 며칠 안에 바로바로 찍어 극장에 올리기에 바빴습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유튜브 쇼츠의 개념이었을 것 같아요. 당시 영화는 예술과는 상관없는 산업의 일부였던 셈이죠. 당시의 역사는 현대의 영화에도 남아있는데요. 대표적으로 미장센이나 프로시니엄 아치 쇼트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미장센은 연극적 장면의 배치를 뜻하고 프로시니엄 아치는 연극적 공간을 뜻합니다. 둘 모두 현대의 거장 웨스 앤더슨 감독이 능한 분야이기도 하네요. 그런데 야콥 프로타자노프는 영화를 예술로 보았습니다. 거액의 돈을 들여 세트를 만들고 당대 최고의 배우 이반 모주힌을 캐스팅합니다.
쿨레쇼프 효과라고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쇼트와 쇼트의 관계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이론으로 소련의 이론가이자 영화감독 쿨레쇼프가 주장했습니다. 쿨레쇼프는 한 배우의 모표정한 얼굴을 찍고 다른 대상을 촬영해 두 개의 쇼트를 이어붙히면 다른 감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몽타주의 시초인 셈입니다. 소련이 이데올로기적 특징을 가진 영화들을 미장센과 몽타주를 사용해 그려내는 감독을 많이 배출한 것과 미국이 편집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감독들을 많이 배출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소련의 잉마르 베리만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미국의 데이비드 핀처와 크리스토퍼 놀란처럼요. 여튼 이반 모주힌은 쿨레쇼프 효과 실험에 활용된 배우로 아주 잘 알려져 있어요. <스페이드 여왕>의 엔딩에서도 1900년대 초기의 몽타주와 쿨레쇼프 효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스페이드 여왕>은 카메라를 움직인 최초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해요. 무슨 이야기지?라고 물으신다면 지금이야 카메라가 움직이며 쇼트를 찍는 것이 흔하지만 초기의 영화들은 대부분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찍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이드 여왕>의 클라이막스에서는 카메라가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채로 움직인답니다.
그렇다면 인물과 각본은 어떨까요. 당시에는 낭만적인 주인공을 등장시킨 환상적인 작품이 유행했습니다. 마치 조선에서 박씨전과 홍길동전이 유행했던 것처럼, 대중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작품이 인기를 끌었죠. <스페이드 여왕>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대의 기조라고도 볼 수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으로 넘어가는 시초격인 작품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게르만은 환상문학에 자주 등장했던 영웅적인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름부터 게르만, 독일인인데요. 독일인은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고 게르만은 그 편견에 부합하는 인물로 의도적으로 그려집니다. 또 여주인공 리사는 왕자를 만난 공주가 아닙니다. 냉정한 야심가 게르만에게 버림받는 역할을 맡고 있으니까요. 특히 담당 배우인 이반 모주힌은 게르만을 연기할 때 나폴레옹 특유의 팔짱 낀 자세를 따라해 고압적인 태도와 오만함, 고뇌를 동시에 드러내었습니다. 지금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클리셰를 벗어나는 포인트들이 <스페이드 여왕>을 빛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정점은 <스페이드 여왕>의 결말입니다. 게르만이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환각 증세를 겪는 결말은 영화에 환상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요소인 백작부인의 유령이 게르만의 환상일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몇몇 소련의 이론가들은 <스페이드 여왕>과 이후 고딕 문학과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환상성이 꿈이거나 환상이 아닐 가능성을 은근히 암시하는 요소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괴물론을 내세웠습니다. 괴물론에 따르면, 뛰어난 작품은 반드시 경이와 기괴를 넘나들어야 합니다. 기괴는 환상성이 거짓이라는 증거들을 통해, 경이는 환상성이 진실이라는 증거들을 통해 확보된다고 하죠. 단지 이론일 뿐입니다만 현대의 내로라하는 걸작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론입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셔터 아일랜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21세기 최고의 작품으로도 여러번 거론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그렇습니다. 현대적으로 괴물론을 풀어 해석한다면, 걸작들은 다면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최소한의 깊이를 가져야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오늘은 1916년에 나온 <스페이드 여왕>을 살펴보았는데요. 너무 역사와 용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읽는 분들이 지루하셨지는 않을까 죄송하기도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남기며 글을 마칩니다.
경이와 기괴를 넘나드는 영화, 흑백영화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음산하고 신비로운 영화.
야콥 프로타자노프의 <스페이드 여왕>이었습니다.
평점 3/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