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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08. 2024

근사하게

나의 글, 당신의 시간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을 때, 나는 지쳐 있었다. 고등학생이 지치는 이유는 생각보다 복합적이다. 그때의 나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나도 무미건조해서 이렇게 가다간 말라 버릴 것 같았고, 사람 간에 이어진 선이 잔뜩 꼬여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나의 미래가 막막했고 내 재능의 척도를 고민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릿속이 빽빽했다. 결국 노트북을 챙겨서 카페로 갔다. 애써 가지 않으면 가기 힘든 먼 카페였다. 가장 구석 자리에서 케이크를 먹으며, 혼자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상태와 만화 <4월은 너의 거짓말> 코세이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코세이가 악보가 머릿속에서 흩어져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처럼, 나의 모든 믿음과 반짝이던 언어가 날아가 버렸던 시간에 대해 글을 썼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주 짙은 글이었다.

 그러다가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문득, 나의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어 줬으면 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다른 구름이 뜨는 시간에서도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 줬으면 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확인시켜줬으면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제 언어가 아니라 내가 흩어질 것 같았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나라는 이상하고 묘한 존재가 있다는 걸 누군가가 막연하게나마 알아준다면, 적어도 나를 유지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작가 소개도 프로필 사진도 설정하지 않은 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기적이고 조촐한 시작이었다.

 일단은 글을 올렸다. 반응이 하나씩 올 때마다 몰래 기뻤다. 학원 쉬는 시간에 급하게 알림을 확인하고, 써 놓은 글을 틈틈이 수정했다. 글이라는 반경 안에 있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 틀은 너무나도 안온했다. 무작정 글을 쏟아내고 나서 천천히 그 모양을 살펴보는 것, 부드럽게 다듬는 것, 그런 과정은 지극히 세심해서 사랑스러웠다. 후련해지든, 생각이 더 많아지든, 괜히 후회하든 나는 일단 글을 썼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글을 몇 개 올리다 보니, 어느새 꽤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일주일에 두 개씩 올렸으니까, 한 달이 조금 넘은 셈이다. 그동안 나는 새로운 성분의 추억을 만들었고, 특별한 밀도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수능 원서를 썼다(월요일부터 수시 원서도 써야 한다). 그리고 친구와 카페에서 9월 모의고사를 채점하다가 숙연해졌다.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선생님이 종례 때 하시는 말씀에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무지 바꿀 수 없는 일에 압도되기도 했다.

 여러 일들이 있었고 전보다 글을 쓰는 빈도는 줄었다. 이제는 토해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지 모른다. 흩어지던 언어들이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면 좋겠다. 내가 소중히 모아 온 단어들이 나와 함께 있다는 뜻이라면, 그래서 글로 남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최선의 결말일 것이다.




 <4월은 너의 거짓말>에서 코세이는 결국 피아노를 계속한다. 그의 삶은 그 자체가 음악인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 말, 행동이 생동하는 음표이자 어떤 악장인 듯하다. 그는 이제 미리 정해진 악보가 아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로서 그는 카덴차(연주자의 기교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구성된 화려하고 자유스러운 무반주 부분)와 같을 것이다. 심장의 소리로 연주할 수 있는 그의 음악은 근사하다.

 나의 삶은 무엇일까. 너무 많은 글을 읽어 든 습관인지, 자꾸만 비유를 찾고 싶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나는 나의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사실은 계속 모르고 싶다.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다만 다른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깨끗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알고 있다. 그 느낌만큼 후련한(때론 힘들기도 하지만) 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좋아하고 싶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싶다.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고맙다는 말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가득 쟁여 두고 그것을 조심스레 꺼내어 주고 싶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아직 모르는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앞으로 달라지길 바란다. 이 글을 포함해 지금 내가 올린 9편의 글은 모두 나에 대한 것이었다. 나에 대한 글 말고는 쓸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어리고 얄팍한 영혼이라서 그랬다. 나에 대한 글이라고 해도 충분한 설명 없이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옮겨 놓은 것뿐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더 자라고 싶다고 느낀다. 더 좋은 글이라는 게 뭔지 몰라도, 그걸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그래서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글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남을 수 있는 글을 원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내가 모아 온 고맙다는 말을 여기 쓰는 것일 테다. 

 글을 올릴 때마다 반응을 남겨 주시는 모든 분들께, 잠시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저의 유치하고 진지한 고민을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내일의 행방도 알 수 없는 지금이지만, 느끼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을게요. 언젠가 심장의 소리로 사랑할 수 있기를, 한껏 자라서 근사한 글을 쓰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 이 시절을 기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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