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 전쯤, 우리나라에서 아직 골수이식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 '성덕 브라이언 바우만'이란 사람이 있었다. 한국 미혼모 소생으로 4살 때 미국으로 입양되어 공군 사관학교 생도가 된 그가 갑자기 백혈병 진단을 받아 투병 중이라는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그의 양부모들이 골수이식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골수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람은 직계 가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였다. 미혼모 소생이기에 혈연을 아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의 이야기를접한 미국 CNN과 입양 단체 등이 한국 KBS에 알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혈연은 아니었지만 유전자가 일치하는 골수 기증자를 찾아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다. 그 과정들이 고스란히 다큐멘터리로까지 방영됐었다.
당시 무척 신기하게 보였던 것은, 골수이식 수술을 통해 성덕 바우만의 혈액형이 골수 기증자와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그 때 골수에서 우리 몸의 피를 생산하는 것도 알게 됐지만, 혈액형이 바뀌면 본래의 성격도 바뀔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물론, 혈액형과 성격 유형을 연결 짓는 것이 철 지난 떡밥이며 무식의 소치라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흔히 '피는 못 속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이미 한참 전에 옛말이 된 셈이다.
그런데 골수이식 수술 따윈 없었던 19세기에 아예 그 핏줄조차 바꾸려던 나라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일본이다.
19세기는 전세계적인 격변기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유럽에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인 성장이 이뤄졌다. 유럽 각국은 자국에 풍부한 원자재를 공급해주면서 때로는 생산된 공산품을 소비해줄 식민지 개척에 경쟁적으로 눈을 돌렸다. 이른바 제국주의의 시작이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우선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처럼 상대적으로 문명이 덜 발달된 곳이라 판단되면 무력을 앞세워 진출한 뒤에 총독을 파견하여 직할지로 다스렸다. 반면 그보다 인구가 풍부하고, 유서깊은 역사와 문명을 지녔던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엔 직접 통치에 반발할 가능성이 커 좀 더 정교한 방식을 썼다.
약간의 군사적 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무력이 한참 우위에 있음을 확인시켜준 뒤에, 개항과 더불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황제나 천황과 같은 해당 국가 최고 지도자의 권위를 겉으로나마 유지시켜주고 자치권도 인정해주는 셈이어서 직접적인 반발은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양 국이 합의한 불평등 조약을 통해 경제권을 잠식하고, 일정 지역을 조차지(租借地, 가장 유명한 조차지가 영국이 100년 간 다스렸던 홍콩임)로 할양받아 치외법권으로서 군사·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게 영국이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에 진출했고, 미국이 '쿠로후네 사건(흑선도래, 미국 검은색 군함 4척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벌인 사건)'을 통해 일본을 열어 젖혔다.
물론 조선에도 프랑스와 미국이 비슷한 방식으로 진출하려 했었으나, 처절할 정도로 강한 저항에 부딪혀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인데, 이 때 어설프게 막아낸 것에 고무되어 이 땅 곳곳에 세워졌던 것이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척화비(서양 오랑캐와 교류를 금한다는 글이 새겨진 비석)'이다. 조선은 어찌됐든 서구 열강의 무력 진출 시도를 자력으로 막아냈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그다지 매력적인 원자재나 소비시장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두 나라에 비해 개국이 늦어지는 결과를 빚는다.
저 때 배에 걸려있던 성조기를 약 90년 뒤 태평양 전쟁 항복 조인식 때 다시 들고와 굴욕을 준 미국의 예능감이란...
아무튼, 일련의 사건 이후 중국-일본-조선 3국의 변화에 대한 대처 방식이 모두 달랐다.
세 국가 모두 서양 세계의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맛보고 충격에 빠진 것까지는 동일했다.
먼저 중국은, 중화사상에 젖어 자신들 외엔 모두 오랑캐라 얕잡아 봤었지만, 자칫하면 서양에 통째로 잡아 먹힐 수 있음을 깨닫고 양무운동이라는 근대화 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극적인 변화에 그치고 말았다. 애초에 중체서용의 의미부터가, '중국이라는 본체를 유지하되 서양의 문물만 이용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사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군 대포의 위력을 체감한 중국은 부랴부랴 영국산 대포를 도입한다. 그러나 한편, 전장에서 그 대포를 운용할 장수를 선발하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궁술'이 주요 과목으로 남아 있었다. 장수들이 먼저 선진 무기 운용법을 터득하고, 그를 활용할 군사들을 육성하여 여러 병과가 유기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술·전략을 개발해야 하는데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조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예 개국 자체가 동북아시아 3국 중에 가장 늦기도 했지만, 중국의 중체서용을 본 받아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다. 동양의 우월한 정신(道)은 그대로 지키며, 서양의 편리한 물건(器)만 쓰겠다는 건 중체서용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조선은 중국보다 훨씬 빈곤해서 제대로 된 무기 하나 들여오지 못하고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일본은 달랐다.
본래 근본적인 변화는 위에서부터 시작해 아래로 내려와야 순조롭게 진행된다. 즉, 권력의 주체가 변경되어 주도하든 그 주체가 스스로 변화를 주도하든 해야 하는 것이다.
개화를 시도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황제가 존재하고, 왕이 유지됐던 중국·조선과 달리 일본은 최고 권력자가 쇼군에서 천황으로 교체됐다(기존에도 명목상 최고 권력자는 천황이 맞았지만, 12세기 가마쿠라 막부가 설치된 이래 수 백년 간 실질적인 권력자는 쇼군이었다). 그리고 새로이 전권을 갖게 된 천황 스스로가 머리를 자르고 서양식 옷을 입으며 신식 교육을 받았다. 그 천황이 바로 메이지 천황이었고, 그가 추진한 개화 운동이 '메이지이신(明治維新)'이었다.
일본은 일찌감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하드웨어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부터 바꿔야 한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서양 문물을 들여오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해외에 인재들을 파견하여 교육부터 받도록 했다. 그렇게 성장한 이들이 이른바 '유신지사'였고, 그들이 일본의 개화를 주도했다.
그런 유신지사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입구(아시아의 미개한 나라들을 배척하고 서구 열강과 가까이 지내자)'라는 보다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지도층 사이에서 아예 '동양의 서양인'이 되고자, 일본인의 핏줄에서 열등한 동양인의 피를 빼버릴 수 있도록 서양인과 적극적으로 혼인하자는 인종개량론까지 등장했다. 그래도 서양보다는 동양의 정신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던 중국·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였다.
일본이 본인들이 개국할 당시 미국에게 당했던 방법(쿠로후네 사건, 1853년)을 배워 열강이 된 뒤에 조선에 그대로 써먹은 것이 바로 '운요호 사건(1875년)'이다. 즉, 일본이 강제로 개항 당하고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뒤 절치부심하여 서양 열강에 뒤지지 않는 제국주의 국가로 올라서기까지 불과 22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동안 완전한 변화를 일궈낼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핏줄까지 부정할만큼 강렬하게 변화를 갈망했기 때문일까?
앞서 <꼭 새롭게 바꾸는 게 최선인가?>라는 글에서, 조참의 사례를 언급했던 바 있다. 변화를 감당할만한 능력도 없고, 상황에 맞지 않은 변화를 시도하느니 그나마 본래 갖고 있던 좋은 것들을 유지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메이지이신 시절 일본은 완벽한 변화관리를 성공시킬 수 있을만한 상황과 역량을 모두 쥐고 잇었다.
우선 변화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차이나 반도-중국까지 진출해 있던 상황이었다. 굳이 공을 들여 그보다 먼 일본까지 접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 다음가는 열강이었던 러시아는 우선 부동항(不凍港, 얼지 않는 항구)이 없었던 데다 일본에 진출하기에는 중국을 접수한 영국과 충돌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이미 유라시아 대륙 동서 끝을 경계로 러시아와 영국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는 냉전을 벌이고 있던 참이다.
그나마 태평양 건너 미국이 일본에 진출하고자 쿠로후네 사건을 벌였지만, 미국 본토와 일본 사이에는 넓디 넓은 태평양이 자리하고 있었고, 쿠로후네 사건 직후 미국은 남북전쟁에 휘말려 일본을 공략할 여유가 없었다.
즉, 일본으로서는 개항 당하는 위기까지는 맞이했지만 본격적인 제국주의 침탈은 겪지 않은 채 개화를 추진할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다.
또 일본은 본래부터 서양의 문명을 수용할만한 역량을 갖고 있었다.
이미 14~15세기 전국시대 때부터 각 가문이 서양과 교역하며 서양의 우수한 무기와 의술 등을 도입한 바 있다. 비록 통일 후에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며 쇄국정책을 펴긴 했지만, 막부 정권 역시 바깥 세계와의 채널을 완전히 차단하진 않았다.
특히 네덜란드와는 적극 교류하여 '데지마(네덜란드 상인, 외교사절들이 거주하던 인공섬)'를 중심으로 '난학(네덜란드의 서적을 연구하는 학문)'이 성행하기도 했었다. 그 결과 이미 18세기에 '해체신서'라는 서양식 의술 서적을 번역하여 펴내기도 했고, 일본의 도자기와 그림이 유럽에 수출되어 '자포네스크' 사조가 유행할 정도였다.
19세기에야 본격적인 개국·개화를 했다곤 하지만, 이미 수 백년 간 서양 문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왔던 것이다.
대정봉환, 즉 쇼군의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겠다는 서약. 일본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는 위정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협력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과 경쟁 속에서 성공적인 변화관리가 보장되어야 조직이 살아남는다.
일본의 성공적인 변화관리 사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 우선은 위로부터의 변화를 위해 리더는 변화주도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본인은 변하지 않으면서 아래로만 변화와 쇄신을 외치다가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대포의 시대에도 '궁술'로 장수를 선발했던 중국의 이야기를 잊지말자.
또한, HR은 조직 내에서 변화촉진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 리더의 변화 의지, 변화 방법이 조직원들에게 전파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처럼, 조직적 차원에서 변화에 대한 지식과 경험치가 축적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백 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 더군다나 한국인으로서는 온전히 받아 들이기 힘든 일본의 성공 스토리이지만 VUCA의 시대이기에 더 되새겨 봐야할 생존 스토리로 읽히길 바란다.
변화해야하는 상황이고, 변화를 감당할 능력이 있다면 그 시절의 일본처럼 모든 것을 바꿀 각오로 덤벼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