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업 부서에 있던 시절 꽤나 여유로워 보이는 선배가 있었다.
모두가 정신줄 놓고 뛰듯이 일할 때에도 그 선배만큼은 마치 머리 위에 음표가 떠다니는 것 마냥 여유가 넘쳐 보였다. 그런데도 업무 기한을 넘기는 일은 절대 없었고,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새 결과물이 나와 있었다. 심지어 과제의 퀄리티도 좋아서 매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일단 일 머리 자체가 좋은 사람 임에는 분명했다. 복잡해보이는 과제를 단순화하고, 본인이 직접 할 일과 다른 부서 혹은 동료에게 부탁 할 일들에 대한 구분이 명확했다. 히스토리도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새로운 과제에 대한 선행학습이 매우 신속하게 이뤄졌다. 그렇기에 흔히 과제 수행 초기에 겪는 시행착오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짧았다.
게다가 그는 업무를 선택적으로 수행했다.
보통의 직장인들이 회의에서 과제를 부여받고 자리에 돌아오면 급하게 무언가를 찾아보거나 끄적거리기 시작한다. 손이 바쁘게 움직이는데, 사실 마음이 더 급하다. 그리고 어느정도의 초안이나 계획서가 나오면 곧바로 상사에게 현황을 보고하고 마감 기한을 재차 확인하거나 조율한다.
물론 그 선배도 초안을 보고하고 기한을 점검하는 과정은 남과 다르지 않게 했지만, 몇 가지 일들은 의도적으로 뭉개는 게 보였다. 더군다나 그가 미루는 일들이 때로는 결코 사소한 과제도 아니었다.
가끔 팀장이 그 과제의 진행상황을 점검하거나 다소 불만스럽게 재촉해도, 선배는 적당히 둘러댈 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신 거기서 확보되는 시간으로 다른 과제에 집중하곤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선배가 의도적으로 미뤘던 과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팀장이 업체를 새로 알아보고 바꾸라 했는데 알고보니 그 업체가 거래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거나, 어떤 스타일의 신규 상품을 개발하라고 했는데 빠르게 트렌드가 꺾여 오히려 만들었다면 생산 금액에서 손해를 봤을 경우 등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되려 결과가 좋게 흘러갔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일 머리도 좋고 신중한데다 촉도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여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약간의 저항이나 압박을 감수하면서까지 몇 가지 일들을 '뭉겠던' 점은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의도적으로 지연 작전을 펼치는 일은, 과제가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하는 의미도 있지만 내게 더 유리한 상황을 기다린다는 목적도 있다.
그러나 국가 혹은 한 집단의 존망, 생사의 갈림길이 오가는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러한 신념을 지켜내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울 것이다.
진시황(정확히는 통일 전이었으므로, 황제가 아니라 '진왕' 신분이었다)이 6국을 병합하여 통일 전쟁을 벌일 때, 먼저 진(秦)나라와 지근거리에 있었던 한(韓)·조(趙)·위(魏) 3국부터 차례대로 무너뜨리고 나서야 초(楚)나라를 노렸다. 초나라야말로 진시황의 진나라와 함께 중국 대륙을 양분하던 거대 세력이었던데다, 위치상 하북의 제(齊)나라·연(燕)나라와 함께 연합하면 진나라를 포위하여 압박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시황으로서는 동북쪽에 치우친 제나라와 연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남쪽의 초나라부터 공략하는 편이 전략적으로 옳았다.
사실상 천하 통일의 성패를 결정짓는 초나라 정벌에 앞서 진시황은 어떤 장수를 내세울 것인지, 병력은 얼마나 동원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이에 앞서 조나라와 위나라를 멸망시켰던 명장 '왕전(王翦)'을 불러 의견을 구했다. 왕전은 잠시 고민 끝에 병력을 60만 명은 동원해야 한다고 고했다. 60만 명은 사실상 당시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전체 병력이었다. 앞으로 초나라 뿐 아니라 제나라·연나라까지 공략해야 하는 진나라로서는 모든 병력을 여기에 쏟아 붓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명망이 높은 장수에게 나라의 병력을 통째로 맡겼다가 자칫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진압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가뜩이나 의심많던 진시황은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앞서 한나라 등 3국을 멸망시킬 때도 30만 명 이상 동원한 바가 없었다.
그 때 젊고 유능한 장수 '이신(李信)'이 씩씩하게 나섰다.
"초나라를 공략하는데 20만 명이면 충분합니다. 신에게 맡겨주소서."
진시황은 반색하며 재차 20만 명이면 충분한지 물었고, 이신은 초나라의 병력 역시 그 정도 수준일 것이니 충분히 가능하다며 다시 확고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왕전은, 여전히 초나라를 공략하려면 60만 명은 동원해야하며 그들을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된다고 간언했다. 이에 진시황이 화를 벌컥내며 말했다.
"장군도 늙었구려. 어찌 그리 적에게 겁을 낸단 말이오. 역시 이신 장군이 전부터 용맹하더니, 내가 옳게 보았소."
그러면서 진시황은 이신에게 20만 명의 병사를 주어 초나라를 공략하게 했다. 의견이 묵살 당한 왕전은 병을 핑계로 고향 땅으로 낙향해버렸다.
이신이 초나라로 쳐들어가자 초나라 역시 명장 '항연(項燕, 훗날 유방과 초한대전을 벌이게 되는 항우의 할아버지)'이 20만 명의 병력과 함께 대적해왔다. 병력은 비슷했지만 이신은 이미 전 중국 대륙의 과반이 훨씬 넘는 진나라의 국력을 믿었고, 겨우 5년 만에 수백 년 역사의 한·조·위 3국을 멸망시킨 진나라 병사들의 위력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신은 항연에게 패배했다. 서전에서는 기세좋게 승리했으나, 항연은 노련한 장수였고 창평군을 비롯한 초나라의 우국지사들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곳곳에서 떨쳐 일어나 이신의 후방을 괴롭혔다. 이신은 결국 항연에게 밀려 옛 한나라의 경계까지 추격을 허용했다.
다만 이신도 훗날 분발하여 제나라, 연나라를 공략하는데 활약한다.
이신이 허무하게 진나라로 돌아오자, 진시황은 크게 노하며 고향에 머물고 있던 왕전을 몸소 찾아갔다. 그리곤 왕전을 무시했음을 사과하며 그가 다시 돌아와 초나라를 공략해주길 부탁했다. 그러나 왕전은 왕의 간곡한 청을 거절했다.
"신은 이미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합니다. 달리 현명한 장수를 찾아보소서."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장군은 부디 이 사람의 청을 거절하지 마시오."
왕전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대왕께서 정히 신을 쓰고자 하신다면, 60만 명의 병사를 내어주십시오. 60만 명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진시황은 이를 곧바로 수락하고, 초나라를 향해 진격하는 왕전을 국경까지 전송했다.
그런데 왕전은, 출병을 하면서도 계속 진시황에게 많은 땅과 돈을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초나라 경내에 들어가 진시황과 멀어졌음에도 서신을 보내 거듭 포상을 달라 청했다.
진시황도 처음에는 왕전의 청을 들어주겠노라 하다가, 계속 그런 일이 벌어지자 의아하게 물었다.
"장군은 어찌 가난을 걱정하시오? 지금은 초나라를 공략하는 것만 생각하길 바라오."
이에 왕전은 이미 본인이 늙어 죽을 날이 멀지 않으니, 자손들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주기 위함이라 답했다. 그러자 진시황은 크게 웃으며 별달리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럼에도 왕전이 5번이나 사람을 보내 진시황을 재촉하자, 오히려 왕전 곁의 장수들이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며 왕전을 나무랐다. 그러자 왕전이 부하들에게 대답했다.
"모르는 소리 말라. 우리 대왕은 본래 의심이 많은 분인데, 지금 내게 온 나라의 병력을 다 몰아 주시지 않았느냐.
게다가 나는 지금 기세가 높은 초나라가 지칠 때까지 싸우지 않고 기다릴 작정이다. 대군을 움직이지 않고 머물고 있으면 도성의 대왕께서는 내가 딴 마음을 품었는 줄 알고 더 의심하실 것이다. 내가 이렇게 재물에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보시곤 오히려 안심하실 것이다."
왕전의 대답을 듣고 장수들도 비로소 납득하고 물러났다.
왕전은 초나라와 전면전을 최대한 피하고, 군영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 소중한 시간동안 초나라는 본국에서 병력을 더 모을 수 있었다. 항연에게도 어느새 왕전 못지 않은 60만 명의 병사들이 모였다. 진나라가 초나라로 쳐들어왔을 때는 양군 사이에 3배가 넘는 격차가 있었지만, 이제 병력 머릿수의 이점이 사라져버렸다.
처음보다 전황이 더 불리해진 셈인데도 왕전은 여유로웠다. 아니, 초나라 군사들의 숫자가 더 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오히려 더 흐뭇해했다. 진나라 장수들은 도무지 왕전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왕전이 부하들을 불러 물었다.
"지금 초나라 병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삼삼오오 모여 돌 던지기 놀이를 하거나 멀리 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때가 되었다."
왕전은 전군에 영을 내려 전투를 벌일 채비를 하게 했다.
설마 당시 복식이 이 정도로 화려하진 않았겠지.
왕전이 바랐던 것은 우선 적군의 기가 빠지는 것이었다.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모든 초나라 장정들이 똘똘 뭉쳐 진나라에 대적해왔다. 그리고 처음 침공해온 이신의 20만 명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거기까지도 이미 사기가 충만해 있었는데, 진나라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동안 그들 못지 않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애초 1대 3의 싸움에서 이제는 1대 1의 싸움이 된 것이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그런 자신감과 긴장감이 언제까지고 지속될 수는 없다. 아무런 싸움도 없이 1년동안 대치만 하고 있자니, 지루하고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이상 시간이 흘러가자 더 큰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이미 백 년 전부터 6개 나라를 상대로 통일 전쟁을 벌일 만한 역량을 쌓아온 국가였다(앞선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던 공손앙의 변법에 힘입은 바 크다). 이미 초나라의 몇 배에 달하는 국력을 지닌 나라였기에, 60만 명이라는 군사를 동원하고서도 그들을 보급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초나라는 총력전 상황이었다. 60만 명의 장정들이 논밭을 비우고 전쟁터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울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다. 군사들의 보급은 커녕, 백성들이 쫄쫄 굶어 죽어갈 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것은 초나라였고, 더 많은 병사들을 동원한 것이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왕전은 초나라 병사들이 늘어났다는 소식에 오히려 기꺼워했던 것이다.
초나라 대장 항연도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 조금씩 초나라 수도를 향해 철군하기 시작했다.
본래 전쟁터에서 제일 위험할 때가 적에게 뒷통수를 보이는 때다. 왕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초나라와 달리 배불리 먹어 힘이 넘치는 진나라 병사들이 맹렬하게 초나라의 후방을 공격했다. 무장에서도 진나라 병사들이 우월한 상황이었다.
이신의 20만 명을 막아냈고, 사실상 초나라에서 유일한 명장으로 남았던 항연도 그 한 번의 싸움에서 죽고 말았다. 초나라는 곧바로 수도 수춘성까지 함락 당하고 왕마저 포로로 잡히고 만다. 8백년 역사의 초나라는 그렇게 멸망했다(물론, 이때 살아남은 항연의 일족들이 수 십 년 뒤에 항우를 중심으로 진나라에 철저히 복수하게 되지만).
개선장군 왕전은 몇 년 뒤에 연나라마저 공략해낸다. 그리고 그의 아들 왕분은 최후에 남은 제나라의 항복을 받아내니 왕전-왕분 부자가 멸망시킨 나라만 해도 전국시대 6개 나라 중 5개 나라에 이르렀다.
본래 그처럼 강력한 군벌은, 통일 후에 왕의 견제를 받아 비참해지거나 심하면 목숨까지도 잃는 경우가 많았지만 왕전은 그 의심많고 포악한 진시황 아래에서도 천수를 누리고 편히 죽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은 현대 사회의 개인, 기업에도 통용된다.
구글이 스마트폰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일화도 유명하다.
구글이 안드로이드 OS를 통해 모바일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는 애플의 iOS와 블랙베리의 OS가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블랙베리는 특유의 쿼티 자판을 내세운 편리한 입력 방식과 강력한 보안 기술, 자체 OS의 우수함을 내세워 한 때 '오바마 폰(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애용하던 휴대폰)'이라 불릴 정도로 시장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보다 쾌적한 영상 시청을 위해 더 큰 화면을 원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애플은 발전된 터치 스크린 기술을 적용한 아이폰을 2007년 출시했다.
화면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거대'하고, 자판 입력 방식도 되려 블랙베리의 기계식 자판보다 편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애플의 아이폰은 금새 블랙베리를 몰아내고 스마트폰 시장을 점령해 나갔다.
이미 세계 최고의 온라인 서비스 회사이자 IT 회사인 구글이 적극적으로 모바일 시장에 진입하지 않는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애플이 무섭게 시장을 장악해 나가다가 결국 구글이 진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그러나 구글은 단순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블랙베리와 애플의 다툼, 그리고 새로이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열을 올리던 한국의 삼성전자의 행보까지 모두 눈여겨 보고 있었다.
구글은 냉정하게, 자신들의 하드웨어 기반이 애플이나 삼성전자에 비해 열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자신들과 반대로 하드웨어 기반은 출중하지만 자체 OS 개발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삼성전자와 제휴하기로 마음 먹었다.
스마트폰 시장이 결국, 아이폰과 블랙베리의 하드웨어 다툼에서 이제는 소프트웨어인 운영체계의 싸움으로 번져간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리고 구글이야말로, 웹을 기반으로 한 운영체계 생태계 구축에 가장 강점이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하드웨어는 가장 건실한 제조사인 삼성전자에 맡기고 거기에 자신들의 운영체계인 '안드로이드'를 탑재하여 시장을 잠식해 나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국내 첫 안드로이드폰인 삼성전자의 '갤럭시A(Android에서 A를 따왔다)'
물론, 안드로이드 자체는 구글에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인수합병을 통해 확보한 것이다. 또 최초 안드로이드는 2008년에 이미 출시했었고, 본래 블랙베리 OS 스타일을 모방한 모델이었으나 블랙베리가 실패하는 것을 참고하여 애플의 iOS 방식으로 선회했다.
안드로이드 체계가 본격적으로 빛을 보게된 것은, 역시 2010년 삼성전자의 '갤럭시 A'가 출시하면서부터로 봐야한다.
현재 모바일 운영체계 시장은 2021년 기준,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72% 점유율로 압도적 1위이며, 애플의 iOS가 27%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즉, 두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99% 이르는 극도의 과점 시장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갖고 있는 애플에 대해 아직 분명 미련은 있지만(그래서 구글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하드웨어가 Pixel 6이다), 후발주자로서 신중히 선행학습하며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려 최선의 방식으로 시장에 진입했기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 같다.
2010년대 이후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직급 체계 폐지' 열풍이 분 적이 있다.
완전히 직급 구분 자체를 없애는 파격적인 사례, 혹은 5단계를 3단계로 축소하거나, 호칭만 변경하고 별도의 레벨은 비공개로 운영하는 경우 등 회사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과거의 직급 제도를 변경해왔다. 운영 방식은 저마다 달랐지만, 결국 '수평적이고 창의적인 조직문화 구축'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게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그게 트렌드였다.
직급 체계 폐지는 분명히 장점이 있다. 다만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기에 지금 상황에서 과거 제도와 비교하여 어떤 효과나 문제가 있는지 논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열풍 와중에도 여전히 과거 직급 제도를 고수하거나, 직급을 폐지했지만 1~2년 이내 다시 재빨리 원복시킨 기업들도 일부 있다. 그들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제도를 개편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항상 빨리 움직인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매사 빠른 것보다는, 적절한 상황이 왔을 때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좋다.
물론, 그 적절한 시점이라는 게 언제일지 판단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리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조급하게 재촉하는 주변인들 속에서 적절한 시점까지 버티며 기다릴 줄 아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그럴 때 흔들리지 않고 휩쓸리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계획과 준비'에 달렸다.
모든 사안에 경주마처럼 무작정 달려 나가기보다, 사안에 따라 계획과 준비를 충실히 해두자.
그렇게 된다면, 장기전에 취약한 초나라에 대해 의도적으로 장기전을 계획하며, 진시황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준비해뒀던 왕전처럼 겉보기에 더 열악해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나 홀로 웃을 수 있게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