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아빠 품은 싫어. 답답해. 난 엄마 품이 제일 좋아”
아빠가 재워주는 게 싫다며 내게 애원하는 것이 희나의 목소리다. 답답하다는 소리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바닷속에 갑자기 잠겨버려 온갖 소리가 먹먹해지는 기분, 먼 우주에 갇힌 기분이 그럴까? 남편과 있으면 그랬다. 그걸 세 살이 갓 넘은 희나가 느끼며 말하다니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재우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눈을 감고 누워 있다. 책을 읽어 달라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에게 세이펜(책에 갖다 대면 소리가 나는)으로 읽으라고 하고 묵묵부답한다. 아이는 몇 번이고 아빠에게 애걸복걸하다 세이펜으로 책을 들척이다 잠을 들기 일쑤였다. 어느 날부터 희나는 방 밖으로 나와 나를 찾았다. 내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았다. 둘이 유대감을 쌓으라고 내준 시간이었는데 결국 수포로 돌아왔다.
“희나는 아빠가 왜 싫어?”
“희나는 매일매일 엄마랑 놀아. 아빠랑은 안 놀아”
긴 시간이 흐른다. 먼지는 쌓이고 그걸 치우면 기분이 좋은 대로 두면 찝찝하다. 몸도 방치되면 온통 울퉁불퉁하다. 얼마나 고통스러워야지 뱃살이 없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편은 주중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듯 회사를 갔다 집에 돌아온다. 저녁에는 아무 말도 없다. 희나는 늘 즐겁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늘 나와 놀고 싶어 한다. 주중에 남편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거나 사고 싶은 물품을 온라인으로 쇼핑한다. 하루 종일. 남는 시간엔 게임을 한다. 그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 목적지도 없이 ‘어디를 나가자’라고 한다. ‘어디를?’ 하고 물으면 ‘몰라’라고 하여 대부분 무산된다. 내일은 음악치료학과 대학원 실기 시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한 달 동안은 좋았다. ADHD를 진단받고 많이 놀라기도 했지만, 오히려 감격했다. 용서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이 대견했다. 장애를 견디고 버텨온 삶이라니 꽤 잘 살아온 것 같았다. 콘서타라는 약을 처방받았는데 약발이 잘 받았다. 음악치료 대학원에 합격했고, 영어 독서지도사 자격증 수강을 등록했다. 영어 공부방을 연다고 사업자등록증이며 공부방 허가서 그리고 홍보를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 밀어 놓았던 그림책 만들기, 음악 작곡까지 신나게 했다. 시간이 나면 틈틈이 온라인으로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했고, 주말에는 북클럽이나 영어 소통에 나갔다. 눈 뜨면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일을 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 경이로웠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일 이 있을 때도 밀린 작업을 하며 기다리느라 지루하지 않았다. 남편이 게임하고 있었고 대수롭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감격하고 놀라웠다. 방구석에 앉아 누군가 이끌어주기만을 바라는 의존적인 사람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능동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 싶었다.
희나와 엄마를 데리고 셋이 하는 여행을 계획했다. 바다는 썰물에 메말라 있었고, 계곡도 시원치 않았다. 숙소에선 에어컨이 침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너무 세서 끄면 덥고, 키면 추웠다. 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없는 여행이었지만 자발적으로 나서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것은 앞으로의 가능성을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두발을 땅 위에 드디어 내려놓고 서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첫걸음마를 뗀 것 같았다. 희망차게 집으로 돌아왔다. 2박 3일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희나 가 잠들었고 차에 짐이 많아 남편에게 전화했더니 2번이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흐트러진 옷가지, 어두운 욕실,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줍고 있는 남편이 화들짝 놀란다. 샤워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한다. 남편의 얼굴에 핑크빛이 감돌았다. 전에 보지 못한 환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헤죽헤죽 웃어대며 나를 반겼다. 그의 행복에 나는 왜 이렇게 무너질까? 그는 희나 와 내가 부재한 2박 3일 동안 얼마나 즐겁게 지냈길래 저리 행복해 보이는 걸까? 어두운 거실 빛나는 스크린 은밀한 여자. 그를 자극하는 어떤 자극적인 것들과 사랑을 나누며 자유로웠을까 생각했다. 미칠 것 같았다. ‘난 아직도 자유롭지 않구나. ADHD의 진단으로 괜찮아지지 않았구나’ 싶었다. 희나 와 나의 시간에 남편이 필요 없고, 남편의 시간에 우리가 필요 없다. 서로의 부재에서 훨씬 자유롭고 행복하다니. 씁쓸했다. 이후로 난 별것 아닌 것에도 극도로 화가 났다. 남편의 말투가 조금만 짜증스러워도 두 배로 갚아주었다. 이제 정말 우리 관계가 마지막을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하려던 참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나는 멈춰서 말했다. 게임을 멈추게 하고 듣게 했다.
“우리가 헤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뭘까? 사실… 희나랑 여행할 때 오빠 없어도 괜찮았어. 그리고 돌아와 보니 … 오빠도 너무 행복해 보이더라…. 그리고 무엇보다 더… 오빠가 내 몸은 건드리지 않고 다른 여자들만 쳐다보며 자위하는 상상 때문에 못 견디겠어.”
남편은 말했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노력해 보지 않겠냐고 그게 최선이냐는 추궁에도 한참이 지난 후에도 끝끝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마치 우리 관계를 놓아버린 것 같았다. 이젠 어쩔 수 없어 보였다. 따스한 포옹과 어루만짐이면 되는데 그토록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그게 어려운 사람이다. 아마 희나 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정말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심리 상담사를 바꾸고 세 번째 상담이다. 눈은 동그랗고 피부색은 어둡다. 가금 혀 짧은 소리가 난다. 항상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다. 다른 상담사들과 달리 자신을 교수라 명명한다. 과거를 캐묻지 않는다. 오로지 현 상황에 집중하는데 단점은 내가 했던 말을 자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가끔 유머가 있어 재밌다. 웃기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유쾌함이다. 폭식, 남편과의 성관계에 대한 불만족, 이혼 준비 등이 주요 토픽이다. 첫 번째 상담사가 내게 제안한 기발한 생각은 남편과의 문제에서 시선을 돌릴만한 일을 하라는 것인데 나에게 있어선 친구와의 관계에 신경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소원해진 이웃들과의 만남. 그래서 몇몇 안 좋게 헤어진 이웃들을 다시 만나보았다. 한동안은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을 만나면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존중받고 인정받으며 지구라는 울타리에 속해있는 기분 말이다. 하지만 일이 바빠지면서 사람 만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두 번째 남편과의 이혼 준비에 대해서 마음을 단단히 하는 건에 대해선 ‘찬물에 들어가기 전에 갑옷을 입어야 해요.’라고 했다. 준비도 안 된 채로 위험에 처하지는 말란 얘기를 했다. 하지만 결국 남편에게 이혼 얘기를 꺼냈다. 어쩌면 내가 먼저 이혼을 당할지도 모르겠다. 벌거벗은 채로 말이다. 생각보다 너무 의연한 남편의 태도에 소름이 끼친다.
“선생님. 도대체 남편은 무슨 의도로 제게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라는 말한 걸까요”
“글쎄요. 전 남편분을 잘 모르지만, 추정하건대 첫 번째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 부인분과 딸이 자신의 삶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고, 둘째, 부인분을 정말로 사랑해서 잘 살길 바라서일지 모르겠고요”
“흠…. 두 번째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지만 둘 다 인 것 같기도 해요”
이혼 문제에 대해선 상담사는 두 가지 입장인 것 같다. 첫 번째로 남편이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나와 격차를 좁힐 수 없다면 헤어지는 것이 맞다고 보고 있으며, 두 번째는 남편이 내게 애정 표현을 엄마에게 투정 부리듯이 잘 못 하고 있다면 헤어지기 전에 심리 상담을 받아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편은 줄곧 우리가 헤어지면 자신은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난 그게 무서워 남편을 정신과로 끌고 가 우울증 검사를 받게 했다. 건강한 사람이란 결론이 나왔다. 상담사가 죽기 전에 상담 한 번 받아보라 했더니 상담은 이제 힘들다며 안 받겠다고 했다. 이제 정말 그 사람이 떠나간다는 생각이다. 지겨운 여름에 우리의 지긋지긋한 관계도 끝나려나 보다.
"헤어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그 사람이 없으면 불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무서워요. 제가 불안형 애착이라 그런 거지요? 이게 다 제가 자신감이 없어서 그래요. 그렇죠?"
난 마지막으로 상담사에게 불안한 내 마음을 전했다. 내 뒤틀린 마음을 상담사가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날 때리고 다음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폭력 남편과 다를 게 없는지도 모른다. 난 그 사랑의 테두리 밖을 벗어나기 힘들어할 뿐일지도. 내게 폭력은 그의 무관심과 방치다. 하지만 그의 보호 속에 나를 두는 것, 그 안정은 내게 사랑인 것이다. 비록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울타리는 아직 썰물처럼 삐쩍 마른 계곡처럼 완전하지 않다. 마치 지금 막 자라나는 연약한 새싹 같은 것이겠지. 내가 나를 보호한다면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때는 내게 관심을 두고 나를 어루만지고 꼭 끌어안을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