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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이 Aug 09. 2024

키스

남편과 나는 사랑하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사랑하지 않았다. 


가시만 있는 물고기가 우주를 헤엄친다. 그 물고기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꼭 그렇다. 아무리 먹어도 뚫린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불행하게 난 가시만 있는 게 아니라 살집이 무섭게 불어났고 그게 참을 수 없었다. 


다시 정신과를 찾았다. 약을 먹었는데 덕분에 모든 욕망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성남도 열정도 모두.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편은 마치 시체 같다. 그의 기분이 독 기운처럼 공기 중에 퍼진다. 지난해는 다리를 삐꺽해서 깁스하고 집안을 돌아다니더니 이번 해는 직장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을 달고 다닌다. 언제나 나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남편에게 있다. 직장 상사는 퇴사를 권유하는 모양이고 밑의 직원은 남편을 인정하지 않고 따돌리는 모양이다. 남편은 눈물을 머금고 있다 퍽 터뜨리고 또 이내 컴퓨터에, 앞에 앉아 정신없이 직업을 찾다, 이민을 고려하다, 사업을 하자고 했다. 불안에 휩싸여 거침없이 질주했다. 내가 잔소리라도 하는 날에는 ‘죽고 싶어’라고 작은 소리로 외쳤다. 가슴이 철렁했다. 사랑을 구걸하다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다른 차원의 고민이 되었다. ‘나는 사랑을 바랄 수도 없는 처지에 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있구나’ 이런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음악치료 사라는 소명을 찾게 되어서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은 것이 없었는데 하고 싶은 것을 찾게 되어 정말 행복했었다. 하지만 남편이 직장 스트레스를 받자 내게도 타격이 전해졌다. 남편은 내게 영어학원을 차리라는 둥 돈을 은행에만 저축하고 있지 말라고 야단쳤다. 내 소명 따위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무시했다. 젊을 때 벌어야 한다면 기회비용 얘기만 해댔다. 난 남편이 너무 힘들어하길래 구인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원 입시 실기 연습에 대한 회피 반응이기도 했을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봤자 연습하고 있지는 않을 노릇이니 학비라도 벌어볼 요량이었다. 영어 시장에서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늦은 시간대의 일이었다. 희나와 함께 실컷 시간을 보내야 할 시간. 희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서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과외를 하기로 했다. 나의 적극적 구인 활동으로 인해 남편의 불안은 조금은 가라앉은 듯 보였다. 


“오빠. 너무 불안에 압도되어 있어. 다른 걸 못 보는 것 같아. 왜 이렇게 힘들어해…? 


“난 가장이니까. 너랑 희나를 부양해야지.” 


“우린 아주 괜찮아. 내일도 알 수 없는데 왜 10년 뒤를 걱정해? 지금 좋은 아빠와 좋은 남편이 되어주면 안 될까? 그냥 만족하면 돼. 편한 곳에 가서 행복하게 살자. 돈이 그렇게 좋으면 부자 여자를 만났어야지. 왜 돈 생기면 편안한 홈웨어만 사는 여자랑 결혼했어. 난 돈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 아니야.”  


얼마 전에 미국에 있는 남편의 회사 본사에 영어로 인사과에 메일을 하나 보냈다. 남편이 스스로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한 내가 끝내야 싶기도 했고 끝내더라도 억울하게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7년간 회사에서 잘 근무하던 남편이 새로운 상사 A 씨가 오고부터 가스라이팅을 포함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그래서 남편이 죽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른 직업을 찾는 등 불안한 행동을 한다고 우리 가정을 지켜달라고 보냈다. 남편은 내부 고발자는 되기 싫다면 내 이메일을 찾아서 내 아내가 오해해서 보낸 거니 철회해 달라는 이메일을 다시 보냈다.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인지는 몰라도 요즘에 A 씨가 잘해준다고 한다.  어제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를 비우는데 지독한 냄새가 났다. 남편에게 왜 그러냐고 그러자 갑자기 짜증스럽게 ‘네가 좀 알아봐서 청소기 청소해 봐’라고 했다. 남편은 원래 무언가를 채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도 짜증 내면서 요구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지 않은 지 몇 달이 돼가지만, 적대감이 서린 눈빛을 보내는 것도 낯설었다. 미움받는 것 같았다. 내 남편을 버리지 않는 유일한 이유가 그가 ‘화를 내지 않는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람’이란 거였는데… 점점 짜증을 내는 것 같다. 오히려 난 그가 목청 높여 내게 소리쳤으면 좋겠다. 케케묵은 감정을 꺼내 욕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난 매우 슬퍼지겠지만 그를 떠날 이유가 생기게 된다. 나를 묶어 놓은 단단한 쇠사슬을 부숴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공허한 눈빛, 산 송장 같은 걸음걸이, 억지로 떼는 묵중한 입, 의미 없는 대화, 도파민에 이끌린 삶, 사랑 없는 심장, 기능하지 않는 몸… 이 모든 것들을 과감히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다. 계속 내게 짜증과 화를 내라. 있는 힘껏. 나를 미워해라.  



여자 둘이 날개를 달고 두 손이 뻗쳐 빙빙 돌고 있다. 그 둘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한쪽 손과 발이 보이지 않는다.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반원형의 치마가 아름답다. 그리고 이어 귀여운 토끼 두 마리그다음은 묶여 있는 두 사람. 이어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이 수놓는 그림이다. 정신과 의사는 며칠 전 새로운 화두를 꺼냈는데 그게 ADHD의 가능성이었다. 어릴 적 별 계획도 없이 미국을 다녀오거나, 충동적으로 음식을 먹고 상담 중에 말을 자주 끊거나 성격이 급하다는 게 의사의 실마리였다. 별문제 될 것이 없으면 그냥 살아도 되지만 이것으로 인해 내가 많이 힘들어하는 게 보인다며 ADHD의 약은 진단을 받아야 처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난 심리검사를 받기로 했다. 집중력 검사에 왜 총체적인 심리검사를 다 치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여러 가지 도형이 검은색 바탕에 나왔다 금세 사라졌는데 엑스 표시만 스페이스바를 누르지 말라고 했다. 억제 검사라고 부르는 듯했다. 희한하게 손가락이 찔끔 자동 반사처럼 자판을 눌렀다. 하지 말라고 하는데 자꾸 눌렀다. 스스로 너무 이상해서 누가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몰래카메라인가도 싶었다. 또 어느 검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작업을 하는 거였는데 나는 이대로 병원을 박차고 나가 대기실에 앉아 있는 모델 같은 청년에게 키스를 퍼붓는 상상을 했다. 훤칠하고 덩치도 좋은 그 청년은 목요일마다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었다. 늘 알 수 없는 도형과 숫자가 적혀있는 어려운 노트와 묵직한 책을 펼쳐 놓고 그것을 암기했다. 티셔츠를 안에 입고 파스텔 색조의 셔츠를 열어 입었는데 그 청년이 들어올 때 셔츠가 바람에 휘날리는 게 너무 멋있었다. 나는 소파에 파묻혀 밀린 티브이 쇼 과정을 보고 있었는데 혹시 그 청년이 대기실 주위를 훑어볼 때 나도 한 번쯤 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봤을까. 나는 그 청년을 바라본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는다. 그 청년은 무슨 병에 걸렸을까 생각해 본다. 내게 집착해서 가정이 파탄 나는 상상을 해본다. 역시 정신과에서 만나 로맨스는 무리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도 멋진 남자와 한 번쯤 스쳐 지나가는 만남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쪽에서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만. 어느새 삐삐거리며 검사 종료 알람이 울린다.  



요즘 남편은 급격히 정신 상태가 좋아졌다. 아마도 내가 미국 본사에 보낸 호소문이 어찌하여 남편의 상사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게 남편의 추정인데 상사가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고 했다. 상사의 태도만 변해다 하면 남편은 정말 180도 다른 사람이 된다. 건강하다. 참 단순한 사람이다. 음악치료 대학원 면접을 보고 왔다. 남편과 희나도 같이 가같이 동행해 힘이 되어주었다. 다행히 면접번호가 5번이라 일찍 끝났다. 실기를 치르고 면접도 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보다 훨씬 나은 날이 되었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끝까지 시작점을 찍었으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잘 걸어 나갔으면 좋겠다. 이상하게 남편에게 애정을 구걸했다. 몇 달 동안 섹스도 하지 않았고 남편의 다정한 말도 그리웠다. 많이 칭얼거리며 사랑을 달라고 했다. 남편은 지독하게 소질 없는 연극배우처럼 대사를 읊더니 마침내 포기했다. 그리고 저녁, 나는 바람도 선선하고 모든 게 조화롭다고 여겼다. 남편이 먼저 샤워하고 내가 샤워하고 나왔다. 남편의 손에는 게임 컨트롤러와 한참 흥분된 눈, 그 앞에 현란한 게임이 있었다. 나는 그저 아무 말하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몸이 묵직해지고 걸음이 무거워졌다. 침대에 파묻혀 나오고 싶지 않았다.  


주말 아침에 우리 부부는 생지를 사다가 오븐에 구워 먹는 취미가 생겼다. 특히 남편이 피칸 파이, 크라 우상에그 타르트 등 갓 구운 빵과 블랙커피로 아침 식사하는 재미에 단단히 맛이 들었다. 별로 좋아하는 것이 없는 남편이 싱크대에 서서 뜨거운 빵을 급하게 한 입 먹을 때는 신기한 생각마저 든다. 빵 흘리는게 싫어서라지만 저 정도 식욕이라면 여자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덤벼들어 키스를 퍼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게 아이러니하다고 여겼다. 희나는 꼭 우유를 데워 달라고 한다. ‘우유 주세요’가 그녀의 첫마디다. 부스스 일어나 내게 폭 안겨 감은 눈을 억지로 떠하는 말이다.  희나는 위가 작은지 우유를 한 컵 비우면 아무것도 생각이 없는 눈치다. 옷을 혼자 입거나 깜깜하다고 혼자 들어가기 싫어하는 화장실을 혼자 다녀오거나 세수와 양치를 혼자 잘 해내면 나는 작은 젤리나, 비타민, 유산균 캔디를 준다. 교육에 보상 제도는 편리한 시스템이다. 남편에겐 어떤 상을 내려야 나를 욕망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섹스하지 않는 날들이 겹겹이 쌓여가며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내가 절대 원치 않았던 남남 같은, 그러면서도 죽을 때까지 못 헤어지는 한국 중년의 부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줌마는 남편을 귀찮아하고 아저씨는 젊은 처자들을 쳐다본다. 아줌마 아저씨는 집에서 신경전만 하며 목소리를 높이다 자녀들의 불안을 높이기 일쑤다. 물론 사이가 좋은 부부도 있겠지만 이게 내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부부의 모습이다. 내가 결코 되고 싶지 않았던. 낯선 곳에서 어떤 부부가 싸우거나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말 한마디 않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지겨웠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뭐… 요즘 또 혼자 하는 거야?” … 


대답이 없다.  


"어…. 대답이 없네…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아니… 사랑을 안 하니까.. “


"상황이 그러니까…" 


밤마다 오큘러스(가상 시뮬레이션 )를 하면 뭘 보는지, 하루 종일 인터넷으론 뭘 들여다보는지, 태블릿 피시론 뭘 보는지, 핸드폰으론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그게 기계만 달랐다 뿐이지 매한가지 비슷한 무언가를 보는 것일 텐데 궁금했다. 그리고 남편을 떠보는 듯한 질문 또한 무의미하다고 여기면서 얼마나 긴장하는지 모르겠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서 배신을 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압도된다. 남편이 회식하고 온 날은 웬일로 나의 발을 쓰다듬는 듯했다.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회식하면서 젊고 예쁜 여자들을 보고 달아올랐나라는 의심도 했다. 그는 오랜만에 저녁에 술집을 돌아다니니 모든 게 신기했을지도 모른다. 짧은 치마 아래의 탱탱한 여자들의 매끈한 다리, 몸에 착 달라붙는 옷, 허리가 드러나는 배꼽티, 그런 것에 성적 열망이 발동되어 내 발을 조금 만져 준 거라면 난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남편이 오랜 시간 끝에 나를 끌어안는 순간은 이보다는 특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낡은 잠옷을 입고 땀으로 젖은 내 체취를 끌어안는 그동안 우울함에 빠진 그를 전전긍긍 돌봐준 내게 고마움을 전하는 키스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잘 빗겨지지 않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내게 다정히 속삭이는 종류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성나있는 나의 마음을 단단히 위로해야 할 것이다. 사랑을 해달라고 수없이 외쳤고 난 비굴했고, 열심히 상담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나아진 게 없었다. 한 가정에서 부부란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등을 돌린 채 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해결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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