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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이 Aug 09. 2024

ADHD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더운 날씨에 줄을 한참 섰어요. 줄이 길었어요. 그런데 몇 사람이나 친구 찬스를 쓰는 거예요.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어서 오라고. 그런데 새치기하는 운 좋은 그 사람들이 당당해 보이진 않더라고요. 미안해 보이던데요. 쭈뼛쭈뼛. 그런데 줄을 서던 모든 사람이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라고요. 그래서, 나라도 기다리고 있다 언니 가족이라도 늦게 오며 같이 들어가자며 부르겠단 생각이 들면서도 원래는 그러면 안 되겠단 생각이 동시에 들기도 하더라고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토요일 오전이다. 요즘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사교 모임을 나간다. 처음 나간 언어 교환모임이었다. 얘기를 시작했다. 나이가 좀 있는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티켓이 한정된 수량이라면 용납될 수 없고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괜찮을 것 같아요. 규칙이란 게 있지만 비행기에서 사고가 나더라도 노약자나 여자부터 구하기도 하잖아요”  


만족스러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브라이언은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전차 문제를 꺼냈다. 엔진이 고장 난 전차 30명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한 명의 아이를 살릴 것인가? 난 그것은 ‘공리주의’의 문제가 아니냐며 절대다수의 행복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고 모두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내 확언하는 투에 모두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처음엔 난 굉장히 들떠있었다. 하지만 모임장은 내가 불러일으킨 주제가 말레이시안 20대 여자에게는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주제 같다고 좀 그만 떠들라는 주의를 간접적으로 했다. 그 후론 입을 다물게 되었다. 또한 50대 여자가 뒤늦게 왔는데 쉴 틈 없이 말하는 여자였다. 사람들에게 말할 틈을 주질 않았다. 따분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얘기들, 또 문법도 엉망진창이고 그 안에는 깊이도 없는 그런 말들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처음부터 앉아 있던 밥맛인  검은 머리의 미시간 출신의 자칭 미국인의 나태한 마초 분위기, 또 입만 열면 지루한 말들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또 베로니카라는  여자는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앉았는데 목소리는 굵고 허스키했다. 마치 자신의 실수를 자기가 용납하기 어려운 것처럼 조금도 입을 열지 않고 있고 조심스레 냉소적인 표정만 지었다. 이 탁자의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난 슬그머니 엉덩이로 내 의자 바퀴를 뒤로 밀어냈다. 그리고 바로 옆의 테이블로 조심히 옮겼다. 자리를 옮기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숨도 안 쉬고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내가 옮긴 자리에 개나리 원피스를 입고 있는 피부색이 흰 나진 씨가 있었다. 앞머리가 곱슬곱슬 말려있었는데 귀여웠다. 그도 이미 지친 터였는지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하이, 좀 지루해서요. 듣기만 하고 있으려니 너무 지루해요. 조금 더 소그룹으로 나누면 어떨까 싶어요


나진 씨를 잠이 확 깰만할 정도로 매력적인 영국식 발음으로 날 놀라게 했다.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는 식이었다. 베로니카의 차가운 얼굴에 비해 나진 씨의 따스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 난 다시 그 그룹에서 날 소개했고 활력을 찾고 재미를 찾았다. 모두와 지극히 알맞은 속도로 순항했다. 인상적인 꿈에 대해 그것이 상징하는 것에 관해 얘기했는데 난 프로이트와 무의식에 관해 얘기했다. 또 한 번 모두가 조용해졌다. 어떤 분야에서는 내가 지적이라는 점이 뿌듯했다.  


아빠 생신이라 가족 모두가 모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모두 모여 얘기를 나누다 또 난 줄을 대신 서주는 문제에 관해 얘기를 꺼냈다. 아무 문제가 될 것 없다는 언어 교환 모임 사람들과 달리 우리 가족들 모두는 그건 아주 큰 문제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원칙주의자인가 싶었다. 사실 언어 교환모임에선 내게 다시 질문을 던진 사람도 있었다,


 "이 문제가 왜 문제가 되는 건가요? 왜 얘기를 나누고 싶은 걸까요? 그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좀 헷갈려서요. 줄을 대신 서주는 문제 같은 것에 어느 정도 관용이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 관용은 융통성인 것 같고 그런 게 크고 넓을수록 스트레스가 없고 건강한 삶을 사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삶이…. 참 복잡해요. 아까 우리 행복에 대해 말했잖아요. 행복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과 있을 수 있는 시간과 비례하기도 한다고요. 전 행복한 사람과 오래 있었는데 그는 직업이 없어서 절 일하게 시켰거든요."   


"아니… 그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데…."


브라이언 할아버지가 옆에서 속삭였다.  


"그래서 결국 전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과 같이 살면서 안전적이 삶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너무 헷갈려요”  

“그것도 행복한 삶이 아닌데…”


브라이언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봐요.”


갑자기 얼음공주 베로니카가 알 수 없는 말을 처음으로 했다. 못 알아들었다. 그리고 내게 왜 줄을 왜 대신 서준 문제를 꺼냈냐고 물었던 모임장이 이 주제는 인도네시아는 친구 나디아가 이해하긴 어렵다며 그만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난 후회했다. 어느 모임에 가도 남편 욕을 하다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인생 전반에 걸쳐 큰 고민이다 보니 자연스레 화두처럼 나온다. 사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은 무척 황당한 것이다. 그리고 줄을 대신 서주는 문제와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다. 자기 말만 숨 쉴 틈 없이 해대는 그 화려하고 정신없는 여자와 내가 다를 것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문득 ‘당신이 기억하는 최악의 순간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답한다면 떠오르는 답변이 있다. 시댁 식구들과 필리핀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내가 형부 욕을 하는 기억이다. 형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언니와 내게 똑같이 값비싼 샤넬 향수를 해줬다는 얘기였는데 난 얼굴을 찡그리며 그 냄새가 별로였다고 흉을 보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같이 특별한 날 왜 아내에게만 해야 할 특별한 선물을 처제에게도 똑같이 하는지 알 수 없다며 형부의 헤픈 씀씀이를 놀려댔고 언니에게 더 잘해야 한다며 걱정도 늘어놓았다. 게다가 넌지시 작은 형님에게는 당신의 동생은 몇 년간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은커녕 생일 선물도 해주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냐고 알렸다. 하지만, 이 경험이 왜 내게 최악에 상황이 되었느냐 하냐면 작은 형님이 내게 철저히 등을 돌리거나 무관심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응대했기 때문이다. 정말 관심이 없었다. 그냥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얘기를. 결국 허공에 대고 내게 마음을 써준 형부 욕을 싸지르고 공기 중에 남편 욕을 싸지른 격이 되었다. 그렇게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작은 형님은 인간관계의 달인이라고 불린다. 관찰 결과 형님이 쓰는 전략은 처음엔 무조건 아낌없이 주는 거다. 언제까지 주진 않는다. 요즘은 갱년기가 와서 차갑다. 처음에는 따스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아픔의 시기도 지나가겠지.


남편과는 일주일에 한 번 섹스하는 날을 정했다. 금요일. 당분간 그걸로 무마해 보기로 했다. 진짜 그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 모르겠다.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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