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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이 Aug 13. 2024

똘레랑스 연습

말귀를 못 알아듣는 병에 걸려있었는데

대학원 첫날, 설레는 마음은 아침 햇살처럼 투명하게 맑았고, 그 기쁨에 밥도 잘 안넘어갔다. 15명의 동료와 60대의 여성 교수님이 있었다. 그녀는 세월을 초월한 듯한 우아한 자태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강의실을 채웠다. 그녀의 긴 다리는 홍학처럼 우아하게 뻗어 있었고, 나이의 흔적을 잃어버린 작은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이어지는, 스파르타식 여정이 시작되었다. 음악치료사에게는 졸업 후 인맥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학우들과의 관계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는 우리에게 소개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조심스러운 음악교사, 알파고 같은 반주자, 익산에서 온 왕눈이 성악 전공자, 지휘 전공의 어벙이, 제주 소년, 그리고 10년 전 영어를 가르쳤던 학생의 학부모까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무턱대고 공지사항을 전달만 하면 될 것 같아 기수를 이끄는 기장을 자원했었다. 첫날부터 내게 주어진 일들은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교수는 한 학기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 과정은 주로 치료사로서 실기 연습을 하는 과정이었다. 교수는 6개월 된 손녀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노래를 잘 불러주었기에 손녀가 안정되어 보였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진심을 담아 그 목소리가 정말 예쁘다고 칭찬했다. 교수는 얼굴이 붉어지며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고, 나의 칭찬에 행복해했다. 그러고는 내가 수업 시간에 물었던 ‘강화재’에 대해 다시 설명하며, 나를 수도 없이 칭찬했다. 그 칭찬 자체가 '강화재'라니 재밌다고 생각했다. 이어 교수는 환자를 진단하고, 목적과 목표를 세우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설명은 어딘가 허술했고, 기대에 못 미쳤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치료 대학원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설명은 마치 평생 기계적으로 원고를 읽어온 사람의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교수는 당황한 듯 보였고, 점점 내 질문에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터키에 주재원으로 있는 한 학생이 음악 활동을 궁금해해, 살짝 비디오를 찍고 있었는데, 교수는 찍지 말라고 했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7시간이 지나자, 하이라이트가 찾아왔다. 교수는 1학기 과정을 정리하며 설명하던 중 갑자기 발표 계획을 수정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은 설명을 이해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나도 교수의 말이 마치 다른 나라의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됐고요. 기장만 알아들으면 돼요. 기장한테 설명 들으면 돼요. 알아들었죠?”


갑자기 모든 책임이 내게로 쏟아졌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병에 걸려있었는데 ADHD였다. 실수를 저지르는 병도 함께 있었다. ADHD.


“못 알아들었는데요?”


교수는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졌다. 차분하고 우아했던 그녀가 한순간에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은 마치 예고된 재앙처럼 다가왔다.


“안되는데… 기장은 모든 걸 다 알아들어야 하는데.”


“아닌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모든 걸 빠르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걸 저한테 이해시켜 달라고 묻진 말아요.”


“네, 그래도 이해가 빠른 친구들에게 물어서라도 다 이해해서 전달할게요.”


그때쯤, 이해하지 못한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내가 과제에 대해 이해했으니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교수는 불안해 보였는지 부기장을 뽑기도 했지만, 부기장은 나보다 더 이해력이 부족한 말 많은 음악선생이었다. 교수는 나중에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기장은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전달하며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나는 사실만 잘 전달할 것이고, 주관을 담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만약 모두가 괜찮다면 기장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욕심은 없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친하게 지내자며 옆에 있던 꿈 꾸는 꺽다리 공주 수연에게 말했다.


“기장 단아 줄까?”


“네. 줘요.”


“뭐라고? 진짜? 나 정말 안 될 것 같아?”


해리의 커다란 눈이 허공을 맴돌았고, 눈 밑의 작은 살이 경련을 일으켰다.


“단아야. 너 할래?”


“네, 할게요.”


단아는 대단했다. 자신은 대학원 생활을 해봐서 잘 안다고 했지만, 집에 와서 조별 과제를 정리하고 오늘 일정을 정리하는 모습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녀는 진정 기장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럼 애초에 기장을 모임 후에 정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왜 모임 전에 정해서, 나의 마음만 다치게 했을까? 교수님은 나를 이해력 없는 사람, 기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권위를 무시하는 폭력적인 사람으로 봤겠지. 첫날부터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도대체 무슨 상을 받으려고 이런 시련이 계속되는 걸까. 결국 원하는 것을 연습하면 된다는 말이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것을 연습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너무 관용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한 치의 손해도 보려 하지 않고, 양보도 없다. 실수에도 관용이 없다.


특수 환자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음악으로 소통해야 하는 치료사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관용 아닐까? 배움의 첫 단추를 끼우는 과정에서 과제 발표를 언제 누가 할 것인지 정하는 문제가 얼마나 어긋날 수 있었을까? 15명 중 13명이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교수는 왜 나를 그렇게 참을 수 없었을까?

교수는 강의를 시작하며 말했다. 환자와 자신의 삶, 그 두 가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고.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냉철함으로 다시 무장하기로 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맞는 말일 테니까. 나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기로 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니, 그렇게 연습하기로 했다.



지난주 금요일, 남편과 난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오늘 새벽, 남편이 샤워를 하러 나갔는데, 샤워실엔 없었다. 보통 그 시간에 나는 희나와 침대에서 자고 있었지만, 오늘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어둠 속 소파에 누워 있었고, 그의 손에는 어색하게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샤워 전에 자위를 하려 영상을 보려던 걸까? 내가 나오자 재빨리 숨긴 걸까?

내 편집증이 시작된 걸까?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무엇을 하든, 내가 무엇을 하든, 한자리에서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다. 섹스도 내가 원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나는 연습하기로 했다. 의심하지 않기로, 남편을 믿기로. 그런 사람이 되자고.




"엄마. 어제 이렇게 슬픈 일이 있었지 뭐야"


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었다.


"교수가 설명 못하고 너보고 뭐라고 그랬네. 제이야.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닌데, 잘난 줄 알아도, 그냥

어디 가서 누굴 따라가는 게 얼마나 편한데? 그냥 좀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살면 편해"


마음이 편하다.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어보기로 했다. 그러기로 연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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