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에 고마움을
"나는 그냥 재밌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다들 나를 싫어하는 걸까?"
엄마에게 내가 말했다.
"그저 즐겁기만 하면 되는데... 사실 그렇지 않잖아. 가끔은 날카로운 말을 내뱉기도 하잖아."
엄마는 또 내게 말했다.
"하긴 그래. 내가 먼저 지나치지 않지. 왜 그러냐고 따져 묻기도 하고."
"사람들은 다 알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 내가 생각해 봐도 그런 사람들은... 으, 정말 싫어. 사이코 같고, 신경질적이야. 내가 그렇다고? 오, 정말 고쳐야겠어. 방금도 희나 친구 엄마를 만나서 애정 결핍 티만 다 내고 왔잖아. 정말 왜 그러는 걸까. 그 엄마는 아무 신경도 안 쓰더구먼. 결국 나만 바보가 된 거야."
“그래, 엄마도 널 열심히 키웠는데, 왜 그런 대접이나 받고 다니냐고. 아빠도 마찬가지야. 왜 동네 앞 슈퍼를 가서는 슈퍼 주인과 이 말 저 말 주고받는지 모르겠어. 결국 19,000원짜리 아주 큰 수박을 사셨지. 너무 무거워서 들고 올 수가 없더래. 그래서 몇 천 원짜리 더 사서 배달시키라고 했지. 2만 원부터는 배달이 되니까. 그랬더니 주인이 ‘그 정도면 그냥 들고 가지 그러냐’며 비아냥거리더래. 그래서 ‘왜 애초에 수다를 떨었냐’고 아빠를 핀잔줬어. 사람이 말이 많으면 누구든 가볍게 대하는 법이야.”
그렇다. 나를 싫어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모든 이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나는 끝없이 상처받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인생 40여 년간의 교훈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면, 이제 남은 40년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자. 80살이 되면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까? 첫 번째로 내가 조건 없이 사랑을 나눠줄 사람은 남편과 딸이다. 그리고 가족들. 두 번째는 가까운 친구들과 이웃들. 세 번째는 동료들과 만날 환자들. 네 번째는 모든 사람들이다.
언어 교환 모임에서 잠시 스친 두 사람이 생각난다. 마노지는 동그란 두 눈을 반짝이며 웃던 사람이다. 어렸을 때 버스를 타고 쇼핑몰에 갔다가 돌아오는 버스가 없어, 30킬로나 되는 길을 밤새도록 걸어 집에 돌아왔다는 인도 사람이었다. 10년째 한국에 사는 삼성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 했다. 자전거 여행이 취미라던 그는, 여행 중 늦은 밤 산길에서 큰 사고를 당했는데, 여관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돌아온 말이 ‘외국인은 받지 않는다’였다고 한다. 다행히 그 옆 숙소에서 자전거 쉼터를 소개받아 쉴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웠다. 그와 같은 사람과 연애를 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그는 유머를 아는 사람이니, 함께 있으면 항상 웃음이 가득할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와 함께라면 자주 밖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밝은 에너지가 샘솟을 테니, 그의 곁에 있으면 나도 덩달아 밝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운다 했고, 그 부분은 좀 꺼려진다. 체취 문제는 당장은 모르겠지만, 키스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또 한 명은 제인라는 중년 여성으로, 그녀는 산만한 면이 나와 닮았다. 중학교 영어 교사라고 했고, 우리 모두에게 탱고 수업을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성형수술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예쁘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화사하게 빛나는 분홍색 옷과 반짝이는 가방이 그녀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음 모임에서도 그녀 옆에 앉고 싶다. 그녀는 목소리가 작거나 1분 이상 말이 이어지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딴청을 피운다. 한마디로 매너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말할 때도 그렇다. 그녀는 자기 핸드폰을 본다. 한마디로 정신없는 유형이다. 이 모임에 오면 온갖 별난 사람들이 다 있어 재미있다. 이 모든 사람들을 과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로 연습해 본다. 너무 야한 상상은 이제 그만두기로 한다. 야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도 연습하기로 한다.
아빠는 막내였다. 위에 큰형이 6.25 전쟁 때 전사했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늘 우셨다고 했다.
” 쓸만한 놈은 죽고 쓸모없는 놈들만 남았네”
평생 이 말씀을 하시며 울면서 술주정을 하셨다고 했다. 아빠는 누가 우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술주정을 하며 때려부셨다. 늘 사랑에 목말라했고 엄마에게 늘 ‘당신은 나뭇가지 같은 정이 없는 여자야’라고 했다고 한다. 아빠는 얼마나 사랑에 굶주려 있었던 걸까? 지금도 그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엄마의 인정을 언제나 원한다. 5살짜리 아이가 무심코 던진 말에도 온종일 누워 삐져있을 수도 있는 사람이 아빠다. 엄마는 엄마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아빠, 그리고 그런 그에게 사랑받는 여성스러운 언니가 있었다. 엄마는 스스로 자신이 닭고기의 껍데기가 진짜 맛있어서 껍데기를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얘기를 우리에게 할 때는 울면서 했다. 자신이 성격이 무던해서인지 자신이 자신을 푸대접해서인지 자신을 희생한 건지 막 대한건지 헷갈려했다. 성격이 대장부였는데 시골에서 똑똑했고 잘 나갔으나 타지에 나와 자신감을 상실했고 결혼하고 나서 자식을 위해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나는 오랜 시간 아팠다. 끊임없이 발버둥 쳤고, 때로는 내팽개쳐졌으며, 좌절의 나락에서도 간신히 일어섰지만 또다시 무너졌다. 희망이 보일 때도 있었으나, 그것조차 허망한 그림자일 뿐, 낙담이 따라왔다. 비관의 끝에서 눈물에 잠긴 채 숨어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깨달았다. 내가 꿈꾸는 나의 모습을 향해 걸어가는 것,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답이라는 것을.
오늘, 우연히 핀터레스트에서 음악치료사의 사진을 보았다. 기타를 든 치료사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는 모습이었다. 그 음악은 고통 속에 울려 퍼졌고, 마침내 내 귓가에도 닿았다. 삶이란 고통의 연속일지라도, 그 안에 음악처럼 아름다운 것이 있기에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끝에 무엇이 있을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삶에 감사하다.
남편을 떠나지 않기로 해서 다행이다.
나는 안녕하다.
Gracias a la vida, 생에 고마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