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제이 Aug 09. 2024

폭식의 재발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설날 아침, 시댁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음식의 향기를 찾았다. 엄마는 희나를 반기며 손길을 내밀었고, 남편은 쉴 자리를 찾고 있었으며, 언니와 형부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빠는 몸이 좋지 않아 조용히 쉬고 계셨다. 나는 감자 과자를 정신없이 먹어 치우고, 엄마표 오징어김치를 즐겼다. 부엌을 분주히 돌며 음식을 꺼내는 손길이 바빴다. 목이 마르면 무알코올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혼자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입에 넣었다. 정신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된 줄 알았던 폭식의 문제가 다시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어린 시절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 주셨다. 계란 냄새가 살며시 나는 갓 구운 카스텔라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언니와 남동생, 나는 과자를 더 좋아했다. 과자 상자를 선물로 받은 날의 행복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고향에 와서 엄마를 만나면 과자를 꼭 먹고 싶어졌다. 아작아작 씹어가며 목구멍으로 넘길 때면, 어린 시절의 기쁜 순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배가 불러야만 숨을 고를 수 있었고, 그제야 안전하고 완전함을 느꼈다.

남편은 감기에 걸려 3일 동안 동굴에 숨어 있었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대답조차 없었고,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그의 모습에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희나와 단둘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희나가 아플 때, 나는 악착같이 병원에 데려가고, 약 먹기 싫다며 토하는 희나를 걱정하며 혼자서 다 해내야 했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침대에 누워 수다를 떨었다. 나는 말했다.


“난 우리 집이 싫어. 식기세척기, 건조기, 음식물 처리기가 다 갖춰진 편리한 집이지만 따스함이 없어. 이렇게 가족들을 만나니 사람 사는 집 같아.”


엄마와 언니는 몇 년 전부터 남편의 우울증을 걱정하며 조언해 주었다.


“조금 힘들더라도 잘 해줘.”


엄마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며 남편의 불쌍한 처지를 걱정했다. 나는 따지듯 말했다.


“어떻게 나만 돌봐줘야 해? 난 너무 지쳤어.”


고독과 쓸쓸함,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희나가 일찍 잠들었기에, 친정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최근 며칠간 희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고열에 시달리며 방 한가운데서 소리쳤다.


“아니야. 하지 마. 싫어.”


나는 희나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답답했다. 다리를 주물러주려 해도, 안아주려 해도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란을 피웠다.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와 거세진 울음소리에 당황했다. 엄마가 잠결에 방으로 들어와 몇 분간 희나를 달래며 말했다.


“그래… 아니야. 병원 안 가. 약도 안 먹어.”


희나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누그러지며 소리를 잠재웠다. 


“안아줘”


라는 말과 함께 엄마와 나, 그리고 방금 일어난 남편이 희나에게 두 팔을 벌렸다. 희나는 할머니에게 폭삭 안겼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찌릿해졌다. 엄마가 희나의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이해해 주는 모습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특히 내가 언제나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나지막이 위로해 주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무뚝뚝한 사람 같지만, 언제나 나를 깊이 위로해 주었다. 친구들에게 배신당하고 혼자 남은 고등학교 졸업식 때도, 연극영화과 입시로 고생하던 겨울에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첫 남자친구 지석이가 떠날 때는 함께 가슴 아파해 주었다. 명절에는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짭조름하고 감칠맛이 가득한 음식들에 멈출 수가 없었다. 쉽게 3킬로그램이 늘었다. 


상담사는 자극과 반응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훈련을 하자고 했다. 스트레스와 폭식 사이를 바라보는 연습이었다. 이번에는 음식과 허기 사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지만, 그 시간은 무색하게 나는 음식의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사랑이 고파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100킬로그램이 되어도 여전히 부족한 음식과 함께 블랙홀로 빠져버리고 싶었다.



아빠는 명절에 아팠다. 집에 있는 약으로 호전되지 않자, 가족들은 응급실에 가라고 했다.


“단성약국, 거기는 휴일에도 열더라고. 거기 약이 나랑 맞아.”


나는 재빠르게 단성약국을 찾아 전화로 영업 여부를 확인하고, 아빠의 약을 사러 나갔다. 내가 살던 고향은 이제 이국적인 동네가 되었다. 태국어 간판의 식당, 중국어로 된 작은 슈퍼, 캄캄한 밤을 수놓은 불빛들 속으로 지름길을 빠르게 걸었다. ‘이곳은 사진관이었고, 저곳은 소방서가 있던 자리, 그리고 저 건물 지하에는 교회가 있었지.’ 어릴 적 기억이 세세하게 떠올랐다. 동네 곳곳이 내가 좋아할 이유가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내가 자란 이 동네를 구석구석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물놀이하며 웃던 기억, 엄마가 땀을 흘리며 머리를 땋아주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은 비틀거릴 때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였다. 사이 좋은 세 남매는 아니었지만, 학교에서는 똑똑하고 심성이 바르다는 칭찬을 받았다. 엄마가 동네 사람들과 수다를 떨던 때, 무릎에 누워있던 기억도 떠올랐다. 상담하며 불행했던 과거만 생각했지만, 동네를 걸으며 내 과거가 그렇게 암울하지만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말이 서툴러 자주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술로 밀어두었던 말들을 쏟아내고, 대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받은 화를 가족들에게 행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엄마와 나, 언니, 동생은 한껏 울고 나서도 다음 날을 잘 살아냈다. 우리는 학교에 빠진 적이 없었고, 엄마는 도시락을 한 번도 빠트린 적이 없었다. 슬픈 가족사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내고 싶었던 것 같다. 식탐도 없었고 외모 콤플렉스도 없었다. 엄마에게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 내가 나를 놓기 전까지는 잘 살아냈던 것 같다. 아빠는 내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대로 어떻게 살겠어요? 전 그냥 정말로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라고 토로했던 어떤 날, 상담사는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본인 스스로 안정적으로 된 사람이 되세요.”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내 불안함이 관계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전 02화 정신과 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