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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K Moon Aug 07. 2024

사랑하는 순정에게

프롤로그 : 도대체 왜….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던 첫 기억은 내가 막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입학한 7살 때였다. 나는 번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 간판이 즐비한 거리를 걷다가 다음 순간에는 좁은 골목의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기억하는 그때의 내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직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골목 끝자락에 보이는 고층 건물들 뒤로 해가 넘어가면서 주위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길을 헤매고 다닌 지 시간이 꽤 지났다는 증거였다.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골목만 돌아서면 보일 거야. … 아, 아니구나. 그럼 저 골목. 저 골목만 돌면 부모님이 하시는 우리 집 식당 간판이 보일 거야. 조금만 더 걸으면 돼. 조금만 더.’


돌연 눈앞에 붉은 천에 흰 페인트로 ‘냉면’ 이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과 함께 부모님이 새로운 동네에 이사 와서 여신 식당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울컥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고 나는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라고 소리치며 뛰어들어가 길을 잃어버렸었다고 엄마 앞에서 눈물을 터트려봐야 적절한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길을 잃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공식적인 전학 기록만 4번이었는데 이사 횟수는 그보다 조금 더 많았을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논밭을 팔아 마련한 종잣돈을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 부모님은 구멍가게부터 식당까지 적은 자본으로 할 만한 고만고만한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엄마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아침에 도시락을 세, 네 개씩 싸고 여섯 딸을 키우고, 종종 아빠와 광폭한 부부싸움을 치르고, 매년 오르는 전셋값을 마련하지 못해 이사를 연중행사로 치렀다. 장사에 바쁜 엄마로서는 잠깐 짬을 내서 전학 수속을 밟는 일만 간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학교에서 이사 간 새로운 집을 찾아가는 일은 내 몫이었다. 여섯 딸 중 누구 하나를 잃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막내는 아직 혼자 집 밖을 걸어 다닐 나이가 아니었고 바로 위 언니는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초등학생 고학년이다 보니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서 길을 잃기 딱 좋은 딸은 다섯째인 나였다.


기억 속의 나는 언제나 복잡한 서울 시내 어딘가를 걷고 있다. 육교를 건너고 차도를 건너고 굴다리를 건너고. 어떤 날에는 친절한 아저씨가 쪼끄만 꼬마가 무거운 가방을 지고 다닌다며 내 가방을 번쩍 들어주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길가에 세워둔 오토바이 옆을 지나다가 마침 로데오 경기라도 하듯 기세 좋게 오토바이에 앉으려던 아저씨의 발에 배를 걷어차이기도 했다. 너무 아파서 바닥에 쓰러져 배를 움켜잡았다. 일어나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는데 어린 나이에도 뱃속에 창자라도 터졌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면서도 아저씨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전학을 자주 다니다 보니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내 경우만 해당되는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새로 전학 온 친구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 아이는 대부분 그 반의 아웃사이더들이었다.

한 번은 학교를 마치는데 한 아이가 다가와서 함께 감을 따러 가자고 말했다. 나는 물론 좋다고 말했다. 감을 따자니 그게 무슨 소리냐, 너희 과수원 하냐 그런 질문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은 나는 감을 못 먹는다는 불필요한 말로 그 친구의 호의를 무시할 생각도 없었다. 새 학기도 아니고 학기 중간에 전학 온 아이에게는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을 친구, 같이 화장실을 갈 친구, 체육 시간에 같이 짝을 해줄 친구, 같이 하교를 할 친구를 만드는 일이 일생일대의 고민거리였으므로 누군가 내게 손을 내민다는 건 뼈에 사무치게 감사한 일이었다.

그 아이는 나를 어느 집 담벼락 옆 감나무 아래로 안내했다. 감나무는 키가 컸다. 그새 꽤 감이 떨어졌었는지 나무 밑동에 썩은 감이 한두 개 보였지만 가지에는 아직 몇 개의 감이 매달려 있었다. 돌연 백발 머리를 비녀로 쪽 지은, 목소리가 기차 화통 같은 할머니가 작대기를 들고 나타났다. 친구는 날쌔게 도망갔지만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관객처럼 할머니의 등장을 지켜봤다. 할머니는 거센 아귀힘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잡았네! 드디어 잡았어! 내 감 따 먹은 도둑놈을 잡았어!”

친구의 감 따러 가자는 말은 그러니까 감서리였다

“이 감나무 봐! 여기 감들 다 어디 갔어? 너지? 네가 여기 있는 감들 그동안 다 훔쳐 간 거지? 네 집이 어디야? 네 부모한테 가자. 이거 다 네가 물어내! 다 물어내!”

그녀는 나를 바닥에 무릎 꿇리고 두 손을 들게 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는 것이 억울하다는 듯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억울한 것으로 치면 내가 더했을 것이다. 나는 감나무에 열린 감을 따기에는 내 키가 너무 작아서 손에 닿지도 않는다고, 실은 감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친구를 따라온 것은 맞지만 감을 훔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할머니의 거친 분노에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손을 들고 있으면서 처음의 두려움과 억울함은 곧 자책으로 바뀌었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감나무 아래 서 있으니 누가 봐도 감 도둑으로 보이잖아. 감서리를 하러 친구를 따라왔으니 나도 도둑이나 마찬가지야.’


간신히 할머니의 손에서 벗어나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대체 왜 할머니는 내가 감이 아니라 자신의 금이라도 훔쳐 간 것처럼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걸까? 도대체 왜 할머니는 내가 감을 훔치는 것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훔쳤다고 확신한 걸까? 도대체 왜 친구는 혼자도망간 걸까?”

내 어린 머릿속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세상이었다.

 

전학 간 또 다른 학교에서 만난 한 친구는 집에 가는 길에 내게 떡볶이를 사주겠다고 말했다. 우린 학교 앞에 있는 주황색 천막이 쳐진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불쑥 친구가 물었다.

“너 떡볶이 값 낼 돈 있어?”

“… 아니.”

친구의 얼굴에 잔인하면서도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내가 떡볶이 값 안 내고 사라지면 너 큰일 나는 거네?”

나는 체할 것 같은 떡볶이를 꿀꺽 삼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친구가 피식 웃었다.

“쫄기는. 농담이야.”

전학 간 또 다른 어떤 학교에서는 교실 내 파벌(?) 싸움이 극에 달아 있었다. 두 파 모두 새로 온 전학생을 자신의 파로 영입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저런 작은 소동 끝에 나는 결국 이쪽 파도 저쪽 파도 아닌 외톨이를 자청했고 외로움과 자유를 동시에 느끼다가 나처럼 아웃사이더였던 친구 하나를 사귀어 무사히 학교를 마쳤다.

집 밖에서만 길을 잃거나 친구를 잃으며 어리둥절한 채 산 것이 아니었다.

집 안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았다. 불시에 지뢰처럼 터지는 부모님의 다툼이 있었고 맞벌이 부모님을 둔 아이들이 그렇듯이 보호자가 없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비 오는 날에는 불쑥 한 사내가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허리 아래 중앙에 생전 처음 보는 신체조직이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가 하는 짓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짓이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그 와중에도 체면을 차리고 싶었는지 ‘아내가 도망갔다’고 말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그의 아내가 도망가서 그가 저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저런 상태여서 그의 아내가 도망간 것인지 어느 쪽이 먼저인지 궁금했다.

 

다행히도 중학교는 준 사립 가톨릭 중학교로 진학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을 아늑한 도서관과 계절의 변화가 아름다웠던 야외음악당과 자애로운 수녀님들과 막역한 친구들 사이에서 보냈다. 동화 같았던 나의 중학교 1년은 2학년 때 서울로 다시 전학을 가며 막을 내렸다.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본 세상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 시절 내 궁금증은 이런 것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 집은 가난한 걸까? 도대체 왜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할까?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도대체 왜 사람들은 그렇게 화를 내는 걸까? 도대체 왜 선생님들은 몽둥이로 우리를 때리는 것일까? 도대체 왜 이 세상은 이렇게 이상한것일까?”

그 후에도 종종 한숨처럼 ‘도대체 왜…’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세상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 후 어느 날인가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꼬마인 나는 어느 변태성욕자에게끌려가 악독한 짓을 당했을 수도, 길을 잃고 미아가 돼서 어느 보육원에 맡겨졌을 수도 있고,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동차에 사고를 당했을 수도, 누군가에게 유괴돼서 새우잡이 배에 태워졌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싹둑 도려내는 것에 실패하고 대신 모든 기억을 ‘나의 불우했던 유년기’라는 추상적인 문구 안에 처박아 두었다.

 

대학만 가면 살도 빠지고 예뻐지고 장밋빛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 모든 달콤한 말을 전부 믿은 건 아니지만 대학 입학이 유일한 희망이던 때였다. 진작에 수학을 포기한 나는 암기과목만 대충 외우고 시험을 쳐서 지방의 한 대학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베스트 프렌드이자 나의 소울메이트, 순정(가명)을 만났다.

 

순정과 만난 지 29년이 흐른 어느 날, 남반구의 한 섬나라에서 티 없이 맑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내가 불우했다고 생각한 나의 유년 시절을 포함하여, 중년의 나이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내 인생이 딱히 불행할 것도 그렇다고 특별히 행복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햇살이 부서지던 평범한 어느 날, 나는 장님이 눈을 뜬 것처럼 혹은 평생 3차원의 세상에서 살다가 드디어 공간과 시간 이동이 가능해진 4차원 세상을 얻은 것처럼 내 인생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걸 가능케 해 준 것이 바로 순정이다. 순정은 내가 종종 되뇌었으나 답을 알 수 없었던 질문, “도대체 왜 세상은…”에 대한 해답을 찾아주었다.

 

소설도 아니고 내 인생을 공개하는 것은 발가벗고 길에 나가 서 있는 것만큼이나 창피한 일이었고 전에는 감히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조차 못해 본 짓이었다. 그러나 순정이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이 책을 살아가면서 한 번이라도 한숨처럼 ‘도대체 왜 세상은…’이라고 내뱉어 본 사람들을 위해 바친다. 인간의 삶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신‘의 등장은 피할 수 없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일기처럼 쓴 내 글을 읽고 공개하도록 독려해 준 언니와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상기시켜 주는 남편과 우리 여섯 자매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 부모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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