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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K Moon Aug 07. 2024

제3화 천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 세 가지  


사랑하는 순정아,

내가 한국을 떠난 후 몇 해가 지나고 너는 내게 말했지.

“너가 IMF 직후 떠난 건 용감하고 현명한 결정이었어. 그때는 다들 놀랐지만 지금은 널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많아.”

이제 와 말하지만 그건 용기나 지혜가 아니었어. 그냥 생존본능이었어.

인간의 20여 년의 세월이 어느 대학에 입학했느냐로 판단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느 회사에 일하느냐에 따라 명확하게 인간 등급이 갈리는 사회에서 명문 대학을 나온 것도, 공무원 시험에 붙은 것도,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집안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경제적 안정을 꾀하면서 최대한의 행복을 산출해 내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어.

내 나름의 플랜을 짜야했어. 거창하게 비유하자면 영화, 설국열차에서처럼 뒷칸에 찌그러져 있다가 중간 칸으로 이동하려는 모든 노력의 부질없음을 진작에 깨닫고 열차에서 아예 뛰어내리기로 결정한 거야.

열차에서 뛰어내리면 눈 덮인 낯선 땅이지만 그곳에서는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이글루 집을 지어 살아도, 살이 닿았다고 치를 떠는 비좁은 열차 칸보다 행복할 것 같았어. 물론 눈 덮인 낯선 땅도 또 다른 열차의 내부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지만(까도 까도 나오는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뛰어내려도 또 다른 기차 안 어떤 칸이었던 거야) 그때는 내가 어떤 칸에 있는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어.

 

대학 졸업하고 일 년 후 내가 작은 카페를 열었던 거 기억하니? 그때 보험 아줌마가 찾아왔단다. 터무니없이 올라가는 임대료를 내느라 적자에 허덕이고 있을 때여서 적금 같은 걸 부을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그 아줌마가 자기 애까지 데리고 와서 밥을 사드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제일 부담이 적은 5년 만기 천만 원 적금을 부었었단다. 그게 1999년에 만기가 되었어. 그 돈으로 난 두 가지 계획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인생을 바꿔 볼 작정이었어.


첫째는 튀어나온 입을 집어넣는 수술을 하는 것이었어. 양악수술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기도 전이었지. 당시에 순정이 너는 내게 ‘넌 참 이국적인 외모를 가졌다’ 고 말했지만 난 알고 있었어. 너가 말한 이국은 아시아도 유럽도 남미도 아닌 동남이라는 사실을.

나는 항상 내 뇌와 내 얼굴이 매치가 안된다고 생각했어. 내 얼굴은 성격이 털털하고 어디서든 잘 먹고 잘 자게 생겼지만 실제의 나는 예민하고 깔끔 떨고 생각이 많은 편이니까.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육체를 가지게 되었는가 의문이었어.

아무튼 병원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원한다면 그날 당장 정밀검사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간호사가 말했어.

“결정하신 건가요? 비용이 대략 천만 원 정도 들 거예요.”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후 병원을 나왔어.

 

천만 원으로 인생을 바꾸는 내 두 번째 계획은 다시 대학을 가서 문예창작을 공부하는 거였어. 마침 시나리오 아카데미 동기가 한예종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참이었어. 심장이 두근거렸어. 그녀도 나도 비슷한 나이에 그녀도 나도 기혼인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서 척척 자신의 진로를 다시 선택한 거야. 천만 원으로 둘 중 어떤 선택을 해야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행복하게 바뀔까 고민했어.


순정아, 너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니?

나는 알아. 너라면 성형수술 따위에 그 돈을 낭비할 생각조차 안 했을 거야. 너라면 다시 4년 치 등록금을 내고 졸업한 후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한 사회초년생이 또 대학을 가는 일 따위 역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너라면 그 돈을 이자가 높은 정기예금에 넣고 미래에 급한 일이 생길 때 쓸 비상금으로 남겨두었겠지.

나는 그 돈으로 문예창작과를 가는 걸 선택할 수가 없었어. 뜻밖에 장애물을 만났거든. 그 장애물은 바로 내 안에 있는 목소리였어. 이 나이가 돼서 돌아보니 만 29살이라는 나이는 20살과 다를 바 없는, 뭐든 시작해도 출발이 전혀 늦은 나이가 아닌데 당시엔 그걸 몰랐어. 이런저런 사람들의 얘기들이 신경이 쓰였지만 무엇보다 나를 막은 장애물은 바로 내 안에 있는 목소리였어.

‘열심히 맞벌이해서 집 장만해야지. 언제까지 전세 살 건데?’

‘글 쓰는 거 그거 보통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거야. 네 주제에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돈 벌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지?’

‘남편이나 시댁에서 찬성할 것 같아?’

 

정확하게 말해서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나의 미래가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남편의 미래였어.

남편도 고민이 많았거든. 남편이라고 왜 인생을 다시 리셋하고 싶지 않았겠어. 그가 큰 마음을 먹고 시댁에 가서 시아버지께 말했어.

“유… 유학을 생각하고 있어요. 사진… 사진 공부하고 싶습니다.”

“유학? 결혼까지 해놓고 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지. 그럴 돈도 없고.”

시아버지는 당연히 펄쩍 뛰셨어. 그러면서 차라리 이민을 가라고 하셨어. 집에 돌아온 H는 체념하듯 말했어.

“이럴 줄 알았어. 우리 못 떠나. 유학이든 이민이든 못 떠나.”

“무슨 소리야? 유학은 반대하셨지만 이민, 차라리 이민은 가라고 하셨잖아. 이제부터 이민을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

남편은 기가 막힌 듯 웃었어.

“넌 우리 아버지를 몰라. 진짜 가라는 뜻이 아니야. 우리가 이민 못 갈 거 아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


나는 남편이 왜 우리가 이민을 못 갈 거라고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

광화문에 몰려있는 이민 회사들을 돌며 상담을 했어. 결과는 모두 부정적이었어. 미국은 당연하고 호주든 뉴질랜드든 어느 나라에서도 우리를 원하지 않았어. 당연하지. 나나 H나 기술 이민이 가능할 만큼 첨단 기술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투자 이민이 가능할 만큼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업 이민이 가능할 만큼 사업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모두들 ‘No’라고 하는데 단 한 군데서 ‘Yes’라고 하더라. 종로 뒷골목에 있는 작은 회사였는데 ‘피지 이민 5천만 원’이라는 광고지를 붙여놓았어. 나는 담당자에게 물었어.

“근데 피지 가서 무슨 일 해서 먹고사는 건가요?”

“글쎄요… 고기잡이 배 선원들 밥을 해줄 수도 있고… 또… 음….”

담당자는 내가 거절하길 바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어.

“사실 거기가 좀 그렇기는 해요. 수속하실 건가요?”

당시에 내가 생각하는 피지는 리조트가 줄줄이 늘어선 아름다운 섬이었기에 외국 자본이 들어가지 않은 피지 국내 사정은 내전과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어. 정말 수속을 밟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혹시나 해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협회에 메일을 보냈어. 피지 이민 계획 중인데 혹시 정보를 주실 수 있냐고. 수십 통의 메일 속에 내 메일도 묻혀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쪽에서 누군가 답장을 보냈어. 지금 피지 사정이 안 좋다, 차라리 뉴질랜드로 오시라, 이민의 문이 넓어졌으니 시도해 보시라, 는 내용이었어.

 

마지막이라고 작정하고 찾아간 신생 이민 회사 담당자는 내게 말했어.

“뉴질랜드 이민 가능할 것 같은데요? 시도해 보시죠.”

“근데 조건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그쪽에서 딱 잘라서 안 된다고는 안 할 거 같아요. 검토는 해보겠죠.”

헛웃음이 나왔어. 서류심사에서 떨어질 것이 뻔한데 이 사람들이 수수료 받아먹으려고 어리바리한 사람들의 희망을 담보 삼아 사기를 치는가 싶었어. 담당자가 말했어.

“심사도 결국엔 사람이 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모든 일에는 예외란 게 있게 마련이니까요. ”

이 사람, 다단계를 해도 성공할 사람이야 싶으면서도 나는 절반 이상 넘어가 버렸어.

“거기서 혹시 장사 같은 거 하면… 제가 잠깐 카페를 한 적이 있거든요. 거기서 카페 하려면 얼마나 들까요?”

“사업비자를 생각하신다면 그거 최소 기준은 5천만 원이에요.”

흠, 우리 집 전셋값이군.

“비자가 나오든 안 나오든 수수료는 내야 하는 거죠?”

“그렇죠. 먼저 서류를 접수해야 하니까요.”

“그럼 수수료는 얼마인가요?”

“천만 원이요.”

그렇구나, 입 집어넣는 수술도, 문예창작과 등록금도 아니고 이걸 위해서 5년 전에 보험 아줌마가 날 다섯 번을 찾아와 기어이 적금을 들게 했구나 싶더라.

천만 원으로 수수료를 내고 5천만 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은행 잔고(살고 있는 집 전세금을 미리 뺄 수는 없으니)는 친정아버지에게 부탁했어.


그리고 두 달 후 비자가 나왔어. 담당자가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어.

“이렇게 비자가 빨리 나온 건 처음입니다. 저희도 사실… 아무튼 축하합니다.”

남편은 진심으로 기뻐했어. 그동안은 ‘우린 못 갈 거야.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 없어’라는 태도였는데 비자가 찍힌 여권을 보자 그도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 나는 자못 자신만만하게 말했어.

“맨땅에 헤딩하는 것 정도는 아니야. 왜냐하면 일단 가서 뭐 할지가 미리 정해졌고 게다가 우린 애도 없잖아. 가서 잘살아 보자! 우린 할 수 있어!”

 

하지만 비자를 받은 순간부터 내 고민은 시작됐어. 머나먼 나라에서 사기를 당하거나 쫄딱 망해서 바다에 몸을 던진 한국인 아줌마로 해외 뉴스 토픽에 실리는 것은 아닐까, 그 나라 음식도 모르는데 카페라니, 영어도 안 되는데 손님이 음식이 잘못됐다고 화를 벌컥 내며 솰라 솰라 해대고 그 앞에서 울음이 터지면 어쩌지, 등등의 걱정거리는 남편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혼자 속을 끓였지.

 

그래서 순정아, 화내지 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생전 처음 점을 보러 갔어.

젊은 점쟁이는 남편의 사주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어.

“남편분은 아버지 손에 꽉 잡혀 있는 팔자예요. 벗어나야 앞 날이 좋아지는데 절대 벗어날 수가 없는 팔자죠. 그 정도로 아버지가 강하게 잡고 있기 때문에 절대 그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남편분이 아주 멀리 떠나요. 아주 멀리. 이럴 수가 도저히 없는 팔자인데 너무 이상해요. 혹시 나한테 얘기 안 하신 거 있나요?”

나는 외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점을 보고 와서 나는 가족들에게 그 얘길 했고 엄마는 당장 그 점집에 찾아갔어.

며칠 후, 엄마가 점을 보고 온 결과를 언니들과 내게 말했어.

“그 사람 완전 사이비여. 글쎄, 부부 금슬이 좋지 않은 게 다 니 아버지 탓이다 어머님은 그렇게 믿고 계시지만 실은 어머님 성격에도 문제가 많다 그 지랄을 하는 겨. 허이구….”

언니들은 “와아, 그 사람 진짜 용하네!” 감탄하더니 앞다투어 그 점집을 찾아갔단다.

 

드디어 한국을 떠날 날이 닥쳐오고 배로 부칠 짐을 다 포장한 날, 외출하고 돌아오니 집 현관문이 안 열리더라. 야밤에 열쇠 수리공을 부르고 집에 들어가 보니 집이 난장판이었어. 도둑이 든 거야. 경찰을 부르고 생선 처음 경찰차 뒷좌석에도 타보았단다. 경찰차 뒷좌석 차문에는 손잡이가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지. 값이 좀 나간다는 물건들, 결혼예물까지 모두 털리고 고국에 남은 미련까지 싹 다 털리고 우린 그렇게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떠났어. 그게 결혼 3년 차 때의 일이니까 아직 신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였지.


순정아,

우리 각자 결혼하고 초반 몇 년 동안 이런 대화를 나눈 적 있지?

“결혼식만 올린 것뿐인데 왜 이렇게 삶이 달라진 거야? “

“그러니까. 근데 왜 아무도 결혼생활이 이렇다는 걸 미리 얘기 안 해준 걸까?”

“어느 날 밤에, 옆에 남편은 곯아떨어져 있고 그냥 눈물이 핑 돌더라. 모르겠어. 부부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별다른 일도 없었는데 그 순간 깨달았던 것 같아. 내가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던 시절, 사랑과 설렘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한껏 품었던 그 시절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겠구나….”


그때는 인터넷 시대, 스마트폰 세상이 아니었잖아. 닫힌 대문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지. TV 속 세상에서는 언제나 3대가 모여 살았고 갓 결혼한 며느리는 앞치마를 두르고 두뇌의 특정 부분은 삭제가 된 사람처럼 미소를 지으며 ‘어머님 아침 드세요, 아버님 점심 드세요, 도련님 저녁 드세요’를 연발하고 있었어.

우유부단한 초식동물과 결혼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내적 고집이 센 육식동물이었고 남편 역시 순박한 코스모스와 결혼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는 잘난 체나 하는 억새풀이었던 거야.

결혼 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을 비단 우리만 느낀 건 아니었겠지. 남자들은 자신의 꿈 어쩌고 하는 소리는 진작에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알아채고 가장이라는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싫어도 괜찮은 척 매일 아침 집을 나서야 했을 거야. 때로는 어깨에 올려진 짐이 무거운 걸 부디 아내가 알아주었으면 싶기도 하지만 그걸 티를 내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새삼 엄마만큼 자신을 위해주는 여자가 이 세상에 없다는 진실을 깨닫기도 하고, 아내가 뱉는 말은 유난히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다는 것도 알게 되지. 시지프의 신화처럼 자신보다 더 무거운 바위를 끙끙대며 밀어 비탈길 정상에 올려놓자마자 미끄러지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끝없는 노동을 반복하다가 가끔은 심장병 혹은 뇌졸중으로 앞날을 마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치를 떨었을지도 몰라. 노동의 피로를 퇴근 후 한잔 술로 달래 보지만, 이 술이 결국 날 쓰러뜨릴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다시 술잔을 들게 되는 그런 나날이 반복되는 거지.


이렇게 얘기하니 우리의 삶이 꽤나 답 없어 보이지만 너도 잘 알잖아. 인간의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 강한 욕망 덕분에 우리의 삶이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는 것도. 우리는 지리한 일상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행복해질 기회를 만들어내고야 말지. 심지어 살고 싶은 욕망을 느끼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맛보는 취미를 즐기기도 하니까. 막상 먹어보면 별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몇 시간을 줄을 서기도 하고, 누군가의 팬이 돼서 그 혹은 그녀를 열렬히 사랑해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연애를 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기도, 아이를 낳기도 혹은 고국을 떠나 미지의 나라로 떠나기도 하지.

그렇게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뭐든 해보는 게 당연한 거지. 인간들에게 생존본능만큼이나 강한 행복 추구 본능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져.

 

순정아, 방이 어둑해졌어. 해가 지니까 마음이 서늘해진다. 오늘은 이만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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