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순정아,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너는 무엇이 떠오르니? 대학 입학? 취직? 결혼? 집 장만?
나는 감히 세상에 태어난 내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을 꼽고 싶다. 내가 ‘감히’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야. 미숙하고 불안정했던 엄마를 만났던 아이를 향한 죄책감. 지금은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 나는 쉽게 행복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없었어.
2002년 11월의 어느 날 A시 국립병원의 분만실에서는 금발 머리 미드와이프(midwife: 산파)가 산통으로 오락가락하는 내게 ‘뷰티풀, 어메이징, 그레이트’ 등을 연발하고 있었어. 실습 나온 인턴들은 내 발치에 둘러서 있고 남편은 반쯤 넋이 나간 체 침대 옆에 서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어. 30여 시간의 산고 끝에 자연분만으로 우리 아들 D를 낳았어.
빨갛고 주름진 우리 아기. 흰 천으로 동여매져서 한 덩이 연약한 생명체로 내 옆에 뉘어졌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자랑스러웠어. 서른한 살 동안 지구에서 뭐 하나 이득 될 일 해놓은 거 없었던 내가, 내 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고 고맙고 자랑스러웠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세상의 비밀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
벅찬 감격은 순식간에 다른 감정으로 대체되었어. 간호사가 샤워를 시켜주고, 병원에서 나온 토스트와 샐러드를 먹고, 해가 지는 병실에 누워서 세상모르고 자는 D를 보았을 때, 어두워지는 병실만큼 내 마음에도 불안이 내려앉았어.
다음날, 퇴원하라고 아이를 내 품에 안겨주고 간호사가 말했어.
“굿럭.”
행운을 빈다고? 그 말이 그렇게 무책임하고 얄밉게 들릴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 나는 ‘이게 끝이에요? 매뉴얼은요? 당연히 전 세계 엄마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 키우는 법’이라는 매뉴얼을 받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이 작은 생명을 꺼뜨리지 않고 키워낼 수 있겠어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 나는 무서웠어.
‘이제 이 아이는 내 책임이야.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접어든 거야. 이 아이는 이제 나와 눈을 뜰 때나 눈을 감을 때나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 할 거야. 그러니 애가 아파도 내 책임, 다쳐도 내 책임, 밥을 잘 안 먹어도 내 책임, 공부를 못해도 내 책임, 모든 게 내 책임이야.’
아이가 콜릭(Colic) 때문에 모유를 잘 먹고 나서도 얼굴이 홍당무가 돼서 자지러지게 울면, 아이를 안고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만 흘렸어. 아이 피부에 작게 아토피가 올라오면 사람들이 말한 그 끔찍한 아토피와의 전쟁이 시작되는가 싶어 훌쩍 눈물이 났어.
여섯 자매가 떠들썩하게 사는 서울에서 아이를 키웠다면 외로움도 두려움도 불안도 덜했을 텐데 한인교회도 안 다니고 사회활동도 안 하고 친구도 가족도 없이 아이와 단둘이 집에 있었던 나는 그야말로 아이와 함께 무인도에 버려진 심정이었어. 그렇게 버려진 절간처럼 조용한 집에서 아이를 두 살까지 키웠을 때 남편은 새 직장으로 이직했고 집도 회사와 가까운 동네로 이사했어.
남편이 새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우리 부부 사이는 그리 화목하지 못했어. 남편은 나와 우연이 몸이라도 닿으면 화들짝 놀라며 침대 끝에 가 달라붙어서 잤고 평상시 분위기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차가워졌어. 남편이 그때 날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나중에야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단다.
당시에 남편 회사에는 남편을 연모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와 남편은 매일 회사에서 함께 티타임을 하고 점심을 먹고 회사에서 생긴 문제를 함께 의논하며 헤쳐나갔어. 그녀는 그러니까 요샛말로 남편의 오피스 와이프였던 거야. 회사에서 보는 것도 모자라 회사 직장동료인 J라는 남자와 셋이서 일주일에 한 번 저녁 식사를 하는 모임도 만들었어. 속된 말로 남편과 그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남편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 건 사실이야.
남편은 내게 그 얘길 몇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했단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을 때 남편은 웃으며 말했어.
“아이고, 그 아줌마 너도 봤잖아.”
남편은 절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녀는 남편보다 나이가 많았고 언듯 봐도 인상이 좋아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어.
나도 알아, 순정아.
세상에는 아내보다 예쁜 여자와 바람피우는 남자도 있고 아내보다 못난 여자와 바람피우는 남자도 있고, 남자의 바람과 여자의 외모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내가 남편에게 제기했던 의혹은 육체적 외도가 아니었어. 우리는 모두 이성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는 정서적 감정적 욕구도 있는 거잖아. 이성의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은, 특히 상대방이 자신에게 고백까지 할 정도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고 언제든 두 팔을 벌려 자신을 받아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들뜨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질 거야. 남편은 이성을 통해 채워야 할 정서적 감정적 욕구를 그녀를 통해 모두 채웠던 것 같아.
바로 그 시기에, 항상 저녁 식사 모임을 하던 그 회사 동료 J가 남편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하는 일도 일어났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남성과 여성 두 명으로부터 그런 애정을 받아왔으니 남편에겐 그때가 리즈시절이었던 셈이야.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 사이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6년의 세월이 지나서, 그녀가 마침내 페이스북으로 첫사랑을 찾아 가정과 회사를 동시에 떠난 후야.
그 시기를 지나는 동안 나는 밤에 자려고 누우면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나기도 했어. 패밀리 닥터를 찾아갔더니 anxiety attack(공황장애)의 증상 중에 하나라고 하더라. 다행히 공황장애 증상은 심해지지 않았지만, 그때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서 머리털이 한 줌씩 빠지더니 결국에는 혹이 생겨 수술을 받았어. 위염 증세가 심해서 내시경을 두 번이나 받은 것도 그때야. 가장 나중에 생긴 병은 하루에도 몇십 번을 화장실에 가는 예민성 방광 신디롬이었어. 몸이 총체적 난국이었는데 그 모든 질병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우울증이야.
예민성 방광 신디롬 때문에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엔 가격이 비싼 특별한 약을 처방받았는데 그 약은 먹으면 졸음이 쏟아지는 부작용이 있었어.
그래서 나는 약을 먹는 걸 중단하고 무조건 밖에 나가 뛰기 시작했어. 뛰면서 오줌을 싸지는 않았으니까.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미친 척 밖에 나가 무조건 뛰었어. 처음에 5분을 달렸을 때 이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어떻게 인간이 10분 이상을 달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달리기는 오직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운동이구나 생각했어. 포기하려다가 5분을 뛰고 쉬었다가 다시 6분을 뛰고 쉬고 그리고 10분, 15분, 30분 그렇게 시간을 늘려나갔어. 그렇게 시작한 조깅은 2년 후에는 하프 마라톤대회에 나갈 정도가 되었어. 2시간 30분을 뛰고 나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은 나를 보았을 때 나도 비로소 그 특별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러자 달리기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이런 식으로 하면 결국엔 해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어.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들을 체념과 시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신 나도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뎌보면 일등은 아니어도 무엇을 그래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 거야.
순정아,
그래서 내가 남편을 원망하는지 묻고 싶지? 아니, 절대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나는 남편의 힘든 회사생활을 버티게 해 준 그 친구들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야. 사랑받는 느낌이 우리에게 얼마나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너도 잘 알잖아. 그 힘 때문에 남편은 회사 생활을 버텨나갈 수 있었을 거야. 나는 남편과 살면서 그가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 것을 본 적도 없고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어. 그는 성실함, 책임감 그리고 인내심의 아이콘이고 나보다 인성이 훌륭한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내 마음이 바다같이 넓어서가 아니야. 인생의 기쁨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고통 역시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지.
사실 내 우울증의 시작은 아이의 병 때문이었어.
아이가 세 살 때, 남편이 새 직장으로 옮기고 우리 집도 남편 직장 근처로 옮기게 됐어. 새로 이사를 왔다니까 한국에서 시부모님이 겸사겸사 놀러 오셨어.
짐을 푸시는데 여행 가방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오더라.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즉시 방역회사를 불렀어.
집을 소독하고 며칠 후부터 아이의 코가 막히기 시작했어.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은 그게 만성 비염이 되었고 아이는 감기만 걸려도 숨소리가 이상해지고 밤에 자다가 경기를 하듯이 울며 깼어. 아이를 안고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고 그런 난리 끝에 천식이라는 진단을 받았어. 네 살 아이가 천식이라니.
카펫 문화인 뉴질랜드에서 천식은 흔하다며 의사는 마치 감기 진단이라도 내리듯 말하더라.
그 어린것이 숨을 못 쉬어서 놀란 얼굴로 내게 뛰어오면 나는 급하게 서랍에서 스테로이드 흡입약을 스페이서에 연결해서 애 입에 갖다 대는 거야. 그런 날들이 일상이 되고 코가 막히고 숨이 힘드니까 아이는 항상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어.
나는 아이가 비염과 천식에 걸리게 된 것이 모두 내 탓이라는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 방역을 하고 바로 그날 아이를 집에 재우는 바보 같은 엄마가 세상에 또 있을까? 소독 후 주방 살림과 바닥만 닦고 커튼, 옷, 이불, 카펫 등은 빨지 않았던 것 같아.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
어느 날 밤, 고열과 함께 숨을 쉬지 못해 헐떡이는 D를 안고 달려간 병원 복도에서 남편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어.
“그러게 내가 애 낳지 말자고 했잖아.”
사실이야. 결혼 후 남편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았어. 남편에게 세상은 그렇게 살만한 곳이 아니었어. 자신은 태어났으니까 살아가지만 선택이 있다면 굳이 새로운 생명을 이 악한 세상에 내던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랬던 그가 이민을 오면서 생각이 달라졌고 그래서 결혼한 지 5년 만에 우리 D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거야.
아이의 유치원 시절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니. 그런 시기는 정말 축복이고 행복인데 아이가 아프다고 우울해하며 그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지 못한 게 지금도 후회가 돼.
뉴질랜드는 만 5세에 학교에 들어가는데 천식 흡입기를 달고 살면서도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초등학교 내내 성적이 좋았어. 한의 공부를 했다는 어떤 분이 D를 보더니 그러시더라.
“안타깝네. 비염, 천식만 아니었어도 더 크게 될 아이인데. 자기 딴에는 지금 그런 몸으로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거지. 쯧쯧.”
내 집 마련에 아이 출산에 남편의 새 직장까지,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행복한 일만 있다면 그건 인생이 아닌 거였어. 물론 행복한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집에 우환이 있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난 마음이 항상 좋지 않았어. 아이가 자다가도 숨을 못 쉬어서 어떻게 될까 봐 아이의 기침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였어.
아이가 한동안 괜찮다 싶어서 흡입기를 지참하지 않고 놀러 간 어떤 날에는 갑자기 차에서 어택(attack)이 와서 아이가 숨을 못 쉬겠다고 했어. 시골 동네 약국을 찾아 흡입기를 살 때까지 심장이 얼마나 조여들었는지 몰라.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켜 놓고도 혹시나 아이가 학교에서 급작스럽게 숨을 못 쉬게 되는 건 아닌가 싶은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어. 행복은 자려고 누웠을 때 아무 근심이 없는 상태라며? 만약 그게 행복이라면 나는 행복하지 않은 채로 십여 년의 세월을 보낸 거야.
2012년 아들이 만 10살이 되던 어느 날, 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뒷자리에 앉아있던 D가 말했어.
“엄마, 저게 뭐야?”
“뭐?”
“저기 동그랗고 하얀 거.”
“어디?”
“저기 눈앞에.”
“엄마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디에?”
“엄마, 나 눈앞에 동그란 빛들이 보여.”
그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운전대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괜찮아, 별일 아닐 거야, 괜찮아’를 되뇌었던 그 순간이.
아들을 데리고 안과 전문의를 찾아갔어. 눈 검사를 마치고 나서 의사가 말했어.
“경미한 백내장입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어. 의사가 물었어.
“천식 흡입기를 얼마 동안 사용하고 계신 거죠?”
“…6년이요.”
“드물지만 이런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스테로이드 제제 천식약을 장기간 사용하면 생기는 부작용 중의 하나가 백내장입니다.”
“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치료법은요?”
“치료는 힘들어요. 일단 천식약을 끊으세요. 백내장이 심해지면 인공수정체 이식 수술을 해야 합니다.”
아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난 정말 그 자리에 쓰러져서 울고 싶었어. 미칠 것 같은 심정을 추스르고 패밀리 닥터를 찾아갔어. 스테로이드 성분 대신에 다른 성분이 든 약한 노란색 천식 흡입기를 처방받았어. 대신 스테로이드 흡입기보다 매일 시간을 맞춰서 더 자주 흡입해야 하는 약이었어.
그해 겨울, D는 감기에 걸렸고 천식 아동들이 그렇듯 감기에 걸렸다 하면 가장 심하게 공격당하는 건 폐였어. 밤에 누워있으면 옆 방에서 D의 발작하듯 터지는 기침 소리가 들렸어. 나는 벌떡 일어나서 서랍에서 초록색 흡입기를 꺼내 손에 쥐고 D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어. 다행히도 D는 그렇게 심한 기침을 하면서도 평소와는 달리 숨을 못 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옆에선 남편이 자고 있고 나는 D의 발작적인 기침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우는 날들이 계속됐어. 새벽 2시에 귀신처럼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백내장에 관해 검색했어. 그때 어떤 외국 사이트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어.
‘… 동물의 백내장을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안약이지만 저희 할머니께서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며 시도해 보시겠다고 해서 안약을 구입해 눈에 떨어뜨렸습니다. 그 후 할머니의 백내장이 좋아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사용할 시 실명이라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저의 할머니는 병으로 실명하느니 차라리 약을 써보시겠다고 해서…’
나는 구매 버튼을 눌렀어.
날이 가도 D의 기침은 멈추지 않았어. 기침 소리를 오랫동안 들어서 나는 편두통이 생길 정도였어. 학교도 못 가는 아이가 집에서 TV를 보는데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끼기를 반복하더니 내게 말했어.
“엄마, 창문 커튼 닫아주세요. 빛이 안 들어오게요. 자꾸 그게 보여서 이상해요.”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어. 아예 바닥에 납작 엎드렸어.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비명처럼 튀어나왔어.
“하나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 그저 토해내듯이 그렇게 부르짖었어.
“하나님, 제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도, 내 책임과 의무와 사랑을 모두 쏟아부어도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었어. 그걸 이제는 인정해야 했어.
“하나님, 이번 한 번만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주세요. 우리 D 도와주세요. 당신께 제가 바라는 건 단 하나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백내장과 천식을 사라지게 해 주세요. 한 번만 제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다른 거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하나님, 우리 D, 아직 너무 어려요. 저처럼 부족하고 엉망인 엄마에게서 태어나서 … 제가 그 어린것을……”
내 눈에서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어.
“하나님, 제발 당신께 매달리는 저를 외면하지 마시고 한 번만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나님, 제발…”
D의 기침은 2주간 계속되었고 내 처절한 기도도 2주간 계속되었어.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돌연 그의 기침이 멎었어.
나는 D를 데리고 이번에는 다른 안과 전문의를 찾았어. 안과의사는 D의 눈을 검사하고 나서 D에게 물었어.
“지금도 그 해일로(halo)가 보이니?”
D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어. 의사가 나를 보았어.
“원래 어디서 잘 보인다고 했죠? 빛이 있는 데서요?”
“네, 원래 창문에서 제일 잘 보인다고 했어요.”
의사가 D에게 말했어.
“저기 저 창문 봐봐. 그게 보이니?”
“아니요. 안 보여요.”
의사는 나를 보았어.
“처음에 진단한 의사가 누구죠?”
“우리 동네에 있는 전문의인데…”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어.
“검사를 해봤는데요. 아무리 봐도 정상이에요. 백내장 증상이란 건 발견할 수가 없는데 왜 그런 진단을 내렸는지 모르겠네요.”
순정아,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이 되니? 그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환희와 감동이었어.
그날 이후로 D는 눈앞에 이상한 것들을 보지 않았고 천식 흡입기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어. 병원에서 돌아온 그날, 선반을 열었다가 아직 뜯지 않은 인터넷에서 주문했던 그 동물용 안약을 발견했어. 나는 손을 떨면서 약을 집어 쓰레기통에 버렸어. 만약 그 약을, 실명할 수 있다는 그 약을 D의 눈에 내 손으로 떨어뜨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순정아,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듯해.
‘예수님! 감사합니다. 너가 드디어 예수님을 체험하게 됐구나. A.K 가 드디어 신앙을 갖게 됐구나!’하고.
미안하지만 순정아,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더라.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더니. 인간이 아니, 내가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지. 감동과 기쁨은 이내 의심으로 바뀌더라.
‘처음 의사가 오진한 거지.’ ‘눈에 보인다는 그게 실은 D가 자기 눈썹 끝을 빛에 반사된 그걸 보고 착각한 걸 거야.’ 그렇게 말이야.
순정아, 생각나니? 대학 때 넌 내게 교회를 다니라고 말했어. 나는 내가 유물론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네 말을 듣고도 웃어넘겼지. 어느 날엔가 너는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어.
“A.K, 넌 분명히 안 믿을 테지만 그래도 얘기할래. 몇 해 전에 우리 집에 불이 났었어. 우린 그때 3층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부엌에서 시작된 불이 삽시간에 번졌어. 집에 있던 아버지와 나는 불 때문에 현관문으로 탈출할 수가 없었어.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야만 했는데 도저히 3층 아래로 뛰어내릴 자신이 없더라. 그래서 우왕좌왕하다가 다시 창문 밖을 내다보는데 글쎄 창문 아래 아까는 분명히 보이지 않았던 사다리에 놓여 있는 거야. 생전 처음 보는 사다리가. 아버지와 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어. 소방차가 와서 불을 껐는데 근데 이상한 게 말이야. 소방차가 왔을 때는 그 사다리가 없더라고.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어.”
그때 나는 네 신앙이 이제 광신도의 경지로 들어섰구나 싶었어. 네 눈동자의 동공이 혹시 풀리지 않았냐 너를 유심히 쳐다봤는데 너는 정말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나를 보고 있었지. 속으로 한숨이 나왔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건데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더니 그런 식으로 다 우연을 기적이라고 부르는구나 싶었어. 내가 말했지.
“이웃 사람이 창문에서 연기 나니까 불이 난 줄 알고 얼른 자기네 사다리를 갖다 준 거지. 너가 무사히 내려온 거 보고 도로 가져간 거고.”
너가 내 말에 뭐라고 대꾸했는지는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 하지만 너는 그때 내게 이런 식으로 말했던 거 같아.
‘설령 그렇다 해도 사다리가 마법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게 아니라 이웃 주민이 마침 그때 자기 집에 사다리가 있었고 마침 그때 신속하게 사다리를 놓아줬다고 해도 그게 너는 신의 은총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니? 나와 아버지가 그 화재에서 살아난 게 신의 은총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
보통 간증하는 사람들 보면 D에게 일어난 일 정도면 신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던데 나는 보통 오만한 인간이 아니었어. 게다가 나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을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들로 봐왔기에 거부감이 더 심했어.
대학 졸업 후 카페를 할 때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불쑥 찾아와서는 자기 엄마의 뇌종양이 어떻게 갑자기 치료됐는지(코를 푸는데 코에서 콧물이 아니라 이상한 것들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나왔다는구나) 그래서 신앙을 갖게 됐다는 얘기를 할 때는 겉으로는 ‘그래, 그것 참 다행이다’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나는 절대 신앙을 가지지 않을 거야. 거의 정신과를 찾아야 할 정도구나’라고 생각했어.
D에게 일어난 일을 당시 내 주위 사람 한두 명에게 한 적이 있어. 그들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때 우연히 만난 어떤 신앙인에게도 D의 일에 대해서 말했어. 나는 그 이야기를 하면 그분이 내 손을 잡고,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놀라셨죠? 이제 모든 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드릴게요’라고 말해줄 걸 기대했었나 봐. 그런데 내 얘길 들은 그분은 근엄한 얼굴로 말했어.
“신앙심이 깊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나기 힘든 경험을 하셨군요. 하지만 그런 은혜를 받았다고 너무 자만에 빠지지는 마세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신답니다.”
교만이라니 의아했어. 갑자기 여기서 그 단어가 왜 튀어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아무튼 그 후로 나는 그 일을 다시 입 밖에 꺼내지 않았어.
순정아,
우리가 고통 가운데 처했을 때 우리를 향해 내미는 두 개의 손을 너는 진작에 알고 있었지? 한 손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기발하고 쉬운 해결책으로 보이는 악이 내미는 손이고 다른 손은 얼핏 보기에는 말이 안 되지만 가장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신이 내미는 손이지.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쉽게 악이 내미는 손을 잡고 마는지 몰라.
‘돈이 궁한데 어쩌지? 아, 저렇게 하면 큰돈 만지겠군!’
‘아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어쩌지? 아, 저 여자라면 날 행복하게 해 주겠군.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
‘살기 힘들어, 괴로워. 아, 죽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군. 죽으면 되겠군!’
이런 악의 손길은 잡기가 얼마나 쉬운지. 반면에 신이 내미는 손을 잡으려면 그를 믿어야 하는데, 신이지만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났다는 그리하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사흘 후에 부활해 하늘로 올라갔다는 그 동화 같은 얘기를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니.
이 지구 외에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죽음 이후에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에는 내가 지구에서 배운 지식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어. 내가 알고 있는 진리 중에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진리는 바로 ‘인간은 모두 죽는다’야.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갔대. 그 말을 믿으려면 세상의 진리인 인간은 모두 죽는다를 부정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빌어서 이 땅에 왔지만 신성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많은 기적도 행하고 부활조차 가능할 수 있었다고? 그걸 믿으라고? 한여름에 눈이 내렸다는 소리는 믿어도 죽음의 진리를 부정한 예수의 부활은 믿지 못하겠더라. 근데 그걸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잖아.
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것을 통해서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가 갈린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당시엔 내가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못 믿는지도 확실히 몰랐단다.
순정아, 우리 인생이 말이야. 그래서 우린 다시 행복하게 남은 인생 동안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하고 쉽게 끝나지 않더구나.
나는 잊었는데 그분은 날 잊지 않고 계셨어. 그분이 다시 나타나셨어. 내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니까(혹은 봤어도 모른 척하니까) 다시 내 앞에 나타나셨어. 이번에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전혀 다른 사건으로 말이야. 다음엔 그 이야기를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