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순정아,
네게 편지를 쓰는 요즘은 마치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사는 느낌이야. 옷장이나 책장 정리와는 차원이 다른, 내 두뇌 속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추억의 파일들이 먼지를 떨고 번호표를 달고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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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2000년 8월 30일에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밖으로 내려다본 풍경은 그저 넓디넓은 잔디밭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초록의 땅이었다. 신이 밥을 드시다 심한 재채기를 해서 뿜은 듯 밥알처럼 보이는 양들이 초록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 초록의 모든 경계에는 옥빛으로 시작해서 사파이어 색으로 변하는 바다가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는데 아름답다고 느끼기보다는 사람 사는 집들이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괜히 그런 걱정을 했다.
A시 시내 백패커에 짐을 풀었다. 남녀공용 도미토리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안에 우리는 차를 사고 유닛이라 불리는 다세대 작은 집을 구했다. 서울에서 부친 짐은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고 배낭에 담아 온 냄비 두 개, 그릇 두 개, 수저 두 벌은 꽤 용이하게 쓰였다. 한국의 여름은 뉴질랜드의 겨울이었다. 급하게 구한 소파 배드에서 새로 산 이불을 덮고 덜덜 떨면서 남편과 나는 왜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지를 고민했다. 전화, 전기 등의 새 연결은 세입자가 신청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사실이 우리에겐 금시초문인 것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살림을 하나씩 장만하고 카페 자리를 보러 다니는 3개월은 행복했다. 수입 없이 생활비가 수돗물처럼 나가는 것이 조마조마했지만 곧 카페를 해서 돈을 벌 테니 그 정도 투자 비용은 관대한 미소를 지으며 이겨냈다.
문제는 카페를 인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한국식당을 차리고 한국인들을 고용하고 한국말을 쓰며 한국인인 내가 잘 아는 음식들로 장사를 했더라면 문제가 덜 했을 것이다. 음식에는 문화가 담긴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계절도 반대이고 운전석도 반대이고 물 내려가는 방향까지 반대인 나라에서 그들이 먹는 음식을 그들의 문화에 맞게 그들에게 팔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우리 카페에서 일했던 아이들 중에는 소소한 범죄에 연루됐거나 마약에 손을 대는 아이들이 있었다.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에 비해 직원들은 불성실하거나 사소한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은 보수적인 사회에서 자란 나로서는 그런 직원들을 상대하는 것이 당황스럽고도 두려웠다.
영어가 자유로웠다면 쉽게 처리할 일들도 금세 문젯거리로 돌변했다. 육체노동의 강도는 심했지만 인건비와 월세 등등을 제외하면 손에 떨어지는 게 없었다. 언제나 무슨 일이 생겼고 언제나 그 일의 처리방식은 한국에서 해오던 방식과는 달라야 했다. 내 영어 실력과 스트레스 지수는 상승곡선을 그렸고 남편과 나의 애정지수는 바닥을 쳤다. 나는 평상시에 어깨를 올리고 입을 앙다물고 있었는데 그것이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몸을 곤두세운 동물적인 본능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전 재산을 털리고 거리로 나앉거나 눈물을 질질 흘리고 한국에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이를 악물고 살아서인지 남편과의 간단한 대화도 이를 악물고 했다.
처음엔 남편도 주방장 보조로 카페에서 함께 일했다. 주방장은 가게의 주인이자 자신의 보조인 H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주방장이 뭔가를 버리라고 말했고 H는 조리하던 음식을 개수대에 쏟아버렸다. 지금도 주방장이 H를 바라보던 눈빛이 선하다. 주방장은 넋이 나간 듯 남편에게 물었다.
“내가 그걸 버리라고 말했다고?”
남편은 대답했다.
“그래. 네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주방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일을 그만두었다.
사실 당시에 내가 가게보다 더 매달린 대상은 나의 남편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 남편, H가 소소하거나 중대한 결정들을 내게 맡기고 그 결정에 뒤따르는 유익과 불이익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을 삶의 방식으로 택했다는 사실을. 낯선 혼돈의 땅에서 그런 그의 태도는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남편은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구했지만 우리 사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성격을 개조하고 싶었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리더십 강한 남편으로 리폼하고 싶었다. 상대의 장점 때문에 결혼해 놓고 그 장점을 바꾸려고 애를 쓰는 헛된 짓을 하는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나였다. 그를 바꾸려고 노력하면서 정작 바꿔야 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H를 변화시키고자 한 나의 첫 시도는 그와 사귄 직후 맞이한 그의 생일 때였다. 옷을 다린다는 말은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기하학적으로 구겨진 셔츠를 입고, 바지는 길이나 폭에 상관없이 두 다리를 넣는 용도로만 여기며, 70년대 잠자리 안경을 쓰고 다니던 그에게 커피색 울 니트와 날렵한 금테 안경과 최신 청바지를 선물했다. 내 옷을 사는데도 그 정도 금액을 써 본 적은 없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춥고 세찬 바람으로는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없고 뜨거운 태양으로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도록 해야 한다는 진리를 실천하기에는 나는 어렸고 불안했고 지쳐 있었다. H를 내가 원하는 남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가 몸을 덜덜 떨도록 세찬 바람을 뿜어댔다. 하지만 남편은 순순히 재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불수록 더욱 단단히 목 끝까지 자신을 움켜쥐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카페에 나가는 것이 지옥 같았다. 장사만 아니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영주권이 있어야 카페를 팔든 다른 일을 하든 할 수 있었는데 사업을 운영한 지 3년이 지나야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도록 당시 이민법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카페를 한 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상담했던 변호사는 대학도 나오신 분이 일반 이민 점수가 충분할 텐데 왜 사업 비자를 신청했냐고 의아한 듯 말했다. 한국에서는 못 들어본 정보였다. 이 사람이 변호사비 챙기려고 우리에게 사탕발림을 하나 싶었지만 영주권 신청이 기각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다 싶었다. 신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권이 나왔다. 얼떨떨하면서도 기뻤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 해도 되는 혹은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남편과 나는 카페를 팔고 그 돈으로 다운페이먼트를 넣고 모기지를 얻어 아름다운 동네에 작고 아담한 집을 장만했다. 그즈음 남편은 좀 더 큰 회사에 취직됐다.
신기한 일이었다. 카페를 팔자, 영주권을 받자, 집을 장만하자 나는 마녀의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온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달리 보였다.
집 앞에 나가 생기 오른 잔디를 밟고 서서 백 년이 넘은 고목들 너머로 은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차올랐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행복. 내 속을 따듯하게 만들어준 숨결의 정체는 바로 행복이었다. 나는 행복했다. 언제고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내가 불어대던 세찬 바람에 옷깃을 부여잡던 H가 아니었다. 그가 내 바람을 견디는 동안 그는 내부에서 장풍의 에너지를 쌓아놓고 있었다. 그의 장풍은 겉으로는 산들바람조차 일으키지 않았지만 깊은 내공이 있었다. 그의 장푼에 맞은 나는 심장에 구멍이 날 것 같았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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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아,
아무래도 일기는 이제 그만 첨부하는 것이 좋겠어. 그때 일을 다 털어놓으면 너무 구질구질해지고 아무래도 1인칭 시점이다 보니 H에게 공평한 일이 아닌 것 같아. 연세가 70을 바라보는 어떤 분이 내게 해준 말인데 그분은 부부싸움을 하시고 나면 항상 일기를 쓰셨대. 일 년이 지나고 어느 날 문득 그 일기를 읽어보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너무나 창피했대. 누가 볼세라 잘기 잘기 찢어서 몰래 버리셨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일기는 이제 네게 그만 보여줄래. 결국에는 내 허물만 들추는 꼴이니까 말이야.
순정아, 그만 편지를 그만 줄이려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 이 얘긴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엄마, 내겐 언제나 숙제 같은 엄마 얘기 말이야.
“AK야, 잘 있냐?”
“응. 엄마는 몸은 좀 나아졌어?”
“아이고, 낫기는. 김치 해서 00이 갖다 준다고 버스 타고 내리다가 빙판에 넘어져서 이번엔 발목이 접질려서 걷지도 못해. 그리고 감기가 얼마나 독하게 걸렸는지 약을 한 달을 먹어도 안 낫고 아직도 머리도 어질어질하고 입안이 다 까져서 뭘 먹지를 못해. 그래도 니 아버지는 반찬이 이렇고 저렇고 타박이고 어디서 눈알이 흐리멍텅한 썩은 동태를 속아 사 오질 않나, 고기반찬이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니 고기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들렸나 벼. 아주 니 아버지 밥해주기 싫어서 딱 죽고만 싶다. 너라도 멀리 살아서 내게 김치 안 해 날라도 돼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너는 요새 뭐 하냐?”
“응. 뭘 좀 배우러 다녀. 대학에. 근데 학교 수업 때문에 애 학교에서 데려오고 봐줄 사람이 없-”
“차 조심해! 운전 조심해! 항시 운전 조심해. 여긴 얼마나 매연이 심하지 목이 칼칼해서 침도 못 삼키겄어. 이사를 가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니 아버지는 그 돈 다 가져다 어디 첩이라도 얻었는지 몰러. 니 집도 춥지? 하도 네가 거기서 으슬으슬 떨어서 몸이-”
순정아,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건데……
이민 와서 20여 년 동안 엄마로부터 전화가 오면 난 일단 마음의 준비를 먼저 해.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할 때마다 한 번도 편안한 상태인 적이 없거든. 언제나 짜증과 울음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몸이 아프고, 기분이 우울하고, 물가가 너무 비싸고, 아빠는 자신의 철천지 웬수이고, 미세먼지가 많아서 죽겠고, 너무 추워서 죽겠고, 너무 더워서 죽겠고 등등 자신을 괴롭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토로하셔. 처음엔 엄마의 말을 듣고 걱정돼서 언니에게 전화했었는데 언니는 되려 엄마 상태가 뭐가 어때서 그러냐고, 엄마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고 몸이 아프면 곧장 집 앞 대학병원으로 뛰어간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엄마가 내게 전화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어.
엄마는 한차례 하소연을 끝낸 후 질문을 시작해. 돈이 쪼들려서 힘들지? 사위가 무뚝뚝해서 재미가 하나도 없지? 혼자 외로워 죽겠지? 한국 음식 사 먹을 데 없어 괴롭지? 물가가 비싸서 고기도 못 사 먹지? 애 하나 키우는 게 더 힘들지? 등등. 침울한 목소리로 그런 질문들을 퍼부으면 나는 빠른 공을 막아내는 수비수의 심정으로 최대한 밝게 세상에 둘도 없는 파라다이스에서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살고 있는지를 증명해 내야 해.
예전에 한번 엄마의 유도신문에 넘어가 사실대로 대답을 했다가 엄마가 당장 세상이 끝장난 듯이 화를 냈다가, 슬퍼했다가, 걱정했다가를 반복해서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결심했거든. 언니에게 말하면 당장 엄마 귀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는 힘든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털어놓지 않는 습관이 들었어. 그렇게 엄마에게 밝고 희망찬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면 그제야 엄마는 처음 전화를 했을 때보다 훨씬 밝아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어.
사실은 전화기에 엄마 번호가 뜬 걸 보고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적도 있어. 누구나 왜 그럴 때가 있잖아. 누구를 위로해 줄 상태가 결코 아닌 때, 오히려 누군가의 위로가 간절히 필요한 때. 전화를 안 받으니까 몇 시간 간격으로 계속 전화가 오더라. 죄책감이 들었어.
엄마가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서 결국 전화를 받았어. 백 번쯤 반복된 얘기가 다시 시작되었어.
“찬바람이 도니까 왜 이렇게 우울하다냐. 몸이라도 성해야 하는데 지난번에 넘어진 다리가 여태 붙지를 않고 무릎 연골은 다 나가서 이제 걷지도 못하는데 어깨는 왜 이렇게 아픈지.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자꾸……”
전화를 끊고 나서 아주 잠깐 엄마에게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엄마를 부러워했어.
‘엄마는 좋겠다. 문득 마음이 괴로울 때면 아무 때나 전화해서 넋두리를 늘어놓고 전화를 끊을 때쯤이면 마음이 개운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어서. 나는 없는데. 나는 남편에게도, 친구에게도, 언니들에게도, 그러지 못하는데.’
그러다 생각났어. 먹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뚫고 나오듯 순정이 네가 떠올랐어. 내겐 순정이 너가 있었어! 내겐 네가 있고 네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순정아, 도대체 그놈의 밥이 뭐길래 나이 여든 넘은 엄마는 아직도 그 지옥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걸까?
밥을 한다는 행위가 가져오는 육체적 노동 때문에만 힘든 게 아니겠지? 정해진 예산 안에서(엄마 표현으로는 아빠가 쥐꼬리만큼 던져주는 생활비로) 영양과 메뉴의 다양함까지 추구하면서 식탁을 차리는 일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해야 하는 게 그게 바로 정신노동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할 것 같다.
한국 방송을 보는데 한 출연자가 아내가 차려준 밥상이 얼마나 근사한지 반찬 수는 얼마나 많은지 대놓고 자랑하는데 동료 연예인들은 동시에 ‘너 장가 잘 갔다, 부럽다’를 외치고 일어나서 손뼉을 치더라. 이 나라 남자들은 아무도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SNS에 올리거나 자랑하지 않아서인지 그 모습이 내게는 생경하게 보였어.
혹시 그런 건가? 남편들이 아내에게 갖는 가장 큰 불만이 아내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가 아니라 ‘아내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거래잖아. 혹시 남자들에겐 자존심이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해서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조차 자신의 자존심에 영향을 주는 걸까? 자신이 받는 밥상으로 자신의 가정 내에서의 지위를 가늠해 보는 걸까?
순정아, 결혼 전에는 몰랐어. 냉장고에서 차가운 보리차를 꺼내 마실 때 엄마의 고마움을 절감하지 못했어. 하루라도 보리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몇십 년 동안 보리차를 끓였을 엄마의 고충을 결혼하고 나서야 이해했단다. 세면대나 변기는 또 어떻고. 원래 그것들은 인공지능 기능이라도 있는 양 그냥 매일 하얗게 되는 줄 알았어. 결혼 후 입을 틀어막고서 변기를 솔로 벅벅 문지르면서 깨달았단다. 변기란 게 이렇게 누군가 하지 않으면 구토가 쏠릴 만큼 더러워지는 것이었구나. 그리고 그 누군가는 언제나 엄마였구나 하고.
남편 올 시간 다 됐네. 나도 얼른 밥상을 차려야겠다. 오늘은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