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순정아,
오늘부터 네게 편지를 쓰기로 했어.
그 생각이 든 건 기생충이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야. 보통 영화관에서 나오면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은 후고친구와 저녁 식사나 술을 한잔 하며 수다를 떠는 게 일상인데 그때는 영화관을 나오니 눈이 부신 환한 대낮이었단다. 잠시 여기는 어딘가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지. 영화 속 세상은 분명 한국이었는데 영화관 밖은 백인과 아시안들이 뒤섞인 외국의 한 거리여서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라.
주차해 둔 차를 향해 걸으며 ‘혼자 영화를 보는 것에도 이제 익숙해’라고 생각했어. 실은 혼자 영화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면서 말이야. 너와 함께 그 영화를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장에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배 터지게 밥을 먹고 또 자리를 옮겨 영화 상영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수다를 나누고 끊임없이 터지는 웃음 덕분에 먹은 것보다 더 많은 칼로리 소비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어디 내가 한두 번 느꼈겠니? 그러다 생각했어. 네가 옆에 없으면 어때? 편지를 쓰면 되지라고. 신속하지 못하다고 문자나 통화에 밀리긴 했어도 상대방의 반응이나 상태에 무관하게 일방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편지도 꽤 쓸모가 있지 싶었어.
1989년에 너를 처음 만났으니 올해로 우리 사이가 30년이 되었구나.
요즘 나이가 들긴 들었는지 새로운 정보들이 뇌에 저장이 잘 안 되는 반면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은 운전을 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혹은 오늘처럼 영화를 보고 나서 갑작스러운 부력의 힘이라도 받은 듯 기억의 수면 밖으로 솟구친단다.
순정아,
나는 정말 삐딱한 인간인가 봐. 아니, 삐뚤어진인간인가 봐.
얼마 전 칸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이 상을 타지 않았겠니. 기적 같은 일이라고, 전 국민이 축하해 주어야 한다고 온갖 매체에서 대서특필하고 난리였단다. 이미 수상 후보에 올라왔을 때부터 나 역시 그가 상을 타길 바라면서 수상 장면을 아이폰으로 시청했어. 그의 이름이 호명되자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주먹을 허공에 흔들면서 흥분을 감추지 않더라. 그 장면은 마치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모습과 비슷했어. 그러자 문득 ‘가뜩이나 국내외에서 봉준호, 봉준호하고 떠받드는데 이제는 범접할 수 없는 영화계의 높은 옥좌에 앉아 목이 뻣뻣한 상태로 꼰대질 하는 영화를 만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게다가 ‘저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상도 타는데 나는 오늘도 밥상이나 차리는구나’하는 생각마저 들면서 은근 허탈해지는 거야. 내가 무슨 영화계에 발이라도 담갔던 사람처럼 평생 방구석에 앉아서 리모컨이나 컨트롤하는 주제에 왜 그런 엉뚱한 자괴감이 들었는지 모르겠어.
순정아, 도대체 난 왜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하고 현실감각도 제로인 거니?
도대체 내 피가 문제인 건지 아니면 내가 태어난 별자리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어. 내 별자리는 산양자리 중에서도 ‘다른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데 혼자 기를 쓰고 산 정상에 올라가려고 버둥대고 있는 양’ 자리 라더라. 문제는 양의 발굽으로는 비탈길을 올라갈 수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 버둥댄다는 거야. 나중에 알아보니 큰 뿔 야생 양이라는 종류는(그래, 난 그런 것도 알아보고 그런단다) 특별한 발굽이 있어 비탈길도 쑥쑥 잘 올라간다고 하는구나. 그러면 그렇지. 어디에나 특별하게 태어난 것들이 특별하게 살기 마련이지 싶더라. 그나저나 순정이 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AK야, 정상에 있는 풀이나 산 중턱에 있는 풀이나 풀 맛은 똑같지 않겠니? 산꼭대기 기어코 올라가서 뭐 하게?’
산꼭대기는 뷰(view 전망)가 있잖아. 왜 조나단 리빙스턴이 높이 날려고 했겠니. 멀리 보기 위해서 아니었겠니. 그런데 실은 이미 나도 알고 있었어. 어린애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어릴 때는 대통령, 우주비행사, 투명인간 등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꿈을 말하지만, 중,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자신의 성적에 맞춘, 대학에 맞춘, 세상에 맞춘 직업을 나열하잖아.
초등학교 6학년 때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세 번이나 읽으며 ‘그래, 나도 높이 멀리 가는 갈매기가 될 거야’라고 다짐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그 꿈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단다. 난 수학을 포기했는데 선생님은 ‘국·영·수 중에 하나라도 포기하면 좋은 대학을 못 가고 좋은 대학을 못 가면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다’고말했어. 그건 마치 ‘너는 높이 나는 갈매기가 되기는커녕 항구를 기웃거리며 죽은 생선을 잽싸게 가로채는 갈매기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학을 포기한 굶주린 갈매기가 될 거야’라는 예언 같았어.
게다가 성격도 무난한 편이 아니었는지 4차원이라느니 특이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종종 들었지. 어릴 때(여기서 어릴 때란 20대를 말하는 거야!) 여성지 같은데 나오는 성격검사를 보면 꼭 이런 질문 있잖아. ‘무슨 색을 좋아하나요?’ 그럼 나는 속으로 ‘옷은 주로 흰색이 좋고 풍경은 파란 하늘이 좋고 페인트가 칠해진 벽은 무채색이 좋은데’ 싶은 게 도무지 어떤 색에 동그라미를 쳐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흰색과 파란색 두 군데 동그라미를 쳐. 그런 식으로 나머지 질문도 두 개의 답을 고르고 그렇게 나온 두 개의 다른 결과를 읽으며 둘 다 내 성격이겠거니 하고 했지.
살면서 나는 자주 혼란스러웠어. 우주에 거대한 ‘인간 분류 서랍’이 있는데 나만 특정 서랍으로 깔끔하게 구분되지 못하고 이 서랍 저 서랍으로 옮겨 다니다가 맨 구석에 ‘기타’라고 쓰인 칸에 던져질 운명인가 싶었어. 인간은 절대 타인과 같은 종류로 분류될 수 없는 각각의 고유한 존재라는 건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달았단다. 맞아, 나는 철이 매우 늦게 든 셈이야.
아무튼 내가 네게 편지를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영화를 보고 나서 떠오른 어떤 기억 때문이야.
우리가 함께 본 첫 영화가 아마 살인의 추억이었지? 그영화에서 살인 사건 현장, 낡고 폐허가 된 버려진 공장이 나오는데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서 그 장면을 보다가 대학 1학년 때 일이 생각나면서 온몸에 닭살이 돋았단다.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앞에서 자취 중이었는데 보통 일요일 늦은 밤에 서울 집에서 출발해서 경기도에 있는 학교로 들어가곤 했어. 그날도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00까지는 갔는데 거기서 학교에 들어가는 버스가 끊긴 거야. 하는 수 없이 인적 없는 밤에오지도 않는 택시를 기다렸어.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택시 한 대가 나타났고 난 그 택시를 탔어.
택시가 학교에 거의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학교는 보이지 않고 택시는 어두운 논두렁 길에 접어들었어. 나는 그 길도 역시 학교로 가는 길일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그저 멍하니 택시에 앉아 있었단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돌연 세 명의 남자들이 택시 앞을 가로막았어. 택시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사내들은 택시기사에게 뭐라 뭐라 말하며 합승을 요구했어. 사내들은 보조석에 앉아 있던 나를 나를 내리게 한 후 두 사내가 나를 가운데 두고 뒷자리에 앉았고 운전사 옆 좌석은 다른 한 명의 사내가 앉았어. 그제야 내 가슴이 불안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했어. 불시에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양 쪽의 남자에게 저지를 당하게 될 형국이었던 거야. 택시는 계속 비포장길을 달렸고 이윽고 영화에서 본 폐공장과 똑같은 건물 앞에서 섰어. 사내들은 택시에서 내려서 공장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운전사는 재빨리 택시를 후진했어. 택시가 불빛이 있는 도로에 들어서자 운전사가 나를 돌아보았어.
“아가씨는 안 무서웠어? 아휴, 겁나 죽는 줄 알았네.”
세월이 흘러 영화가 개봉된 후에야 나는 내가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바로 그 시기, 그 지역을 겁도 없이 늦은밤에 돌아다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 세명의 사내들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형사들이었던 것 같아. (놀랍게도 네게 이 편지를 쓴 후 몇 개월이 지나서 연쇄살인범이 잡혔더구나!)
나는 내가 내가 운이 좋아서 또 다른 희생자가 되지 않았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순간에도, 훨씬 그전에도, 그 후에도 나를 지켜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내가 한때는 운이나 우연이라고 불렀던 그 모든 순간에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앞을 향해 달려드는 무엇인가를 막아내고, 이정표를 보여주고,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그곳의 문을 닫거나 혹은 가야 할 곳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
순정아, 앞으로 네게 그 얘기들을 해줄게.
영화보다 더 믿기 힘든 이야기들. 살림하고 애 키우고 먹고사느라 바빠서 나누지 못했던 일상 그 너머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너와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