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마세요.
2019년 11월 어느 날.
사랑하는 순정아,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게 허락하셨을까. 왜 우린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감히 판단 내릴 수 있게 되었을까.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인간이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지. 벗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자각하자마자 본래는 느낄 필요도 없었던 감정을 느꼈어. 물론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재앙은 수치심보다 더한 것이었지. 평생 땀 흘려 노동하는 고통과 해산의 고통과 그리고 가장 커다란 재앙인 죽음.
요즘의 나는 노력하고 있어. ‘이게 좋고, 저게 싫고, 이 사람이 좋고, 저 사람이 싫고 ’ 같은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그 판단은 내게 특정한 태도를 부여하는데 그걸로 인해서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아.
내면이 강한 사람일수록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의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지 않고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타인을 자기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이용하는 걸 나는 자주 봐왔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거지. 고백하자면 그런 사람이 바로 나였어.
내게 화풀이할 한강은 내 가족이었어. 쫄보라서 타인에게는 불쾌한 일을 당해도 화를 내기는커녕 싫은 내색도 못 했어. 과거형으로 말하는 건 그나마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야. 남편의 증언이니 신빙성이 있는 편이지. 하지만 내가 조금이나마 달라졌다면 그건 내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냐. 모두 그분이 하신 일이지.
오래전에 거리에서 뜬금없는 인종차별주의자의 공격적인 언사를 당한 적이 있어. 그때는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분노가 치밀고 적절하게 쏘아주지 못한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면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었단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후에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나는 내가 피식 웃고 있는 걸 발견했어. 처음에는 그 상황이 황당해서 웃음이 났고 곧이어 불쌍한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어. 그만큼 내가 담대해지고 내면이 강해졌다는 의미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불안하고 걱정되는 일들이 참 많았던 것 같아. 대부분의 불안이나 근심거리들이 그렇듯 그것은 현재에 벌어지지 않았지만 미래에 벌어질까 봐 미리 선수 쳐서 하는 걱정들이었어.
나는 나의 진짜 생은 다른 먼 곳에 있는 듯 현재의 순간들이 되도록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살았어. 입버릇처럼 ‘빨리 쇼핑을 하고 나서..’ ‘빨리 집을 치우고 나서…’ ‘빨리 애를 다 키우고 나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빨리 다음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다음 순간이 오면 다시 그다음 순간이 오길 기다리며 살았어.
동시에 ‘만약 00 하면’이라는 병도 있었어. ‘만약 애가 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만약 월급이 오르면’ ‘만약 살을 뺀다면’ ‘만약 한국에 가서 살 수 있다면’ 등등.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는 것은 좋지만 내 경우에는 그것이 현재의 삶을 조바심 내며 살게 만들었어. 현재를 즐기는 능력은 나의 태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상황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했지만 행동으로는 그걸 따르지 못했어.
그렇게 허둥대며 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
식기세척기가 고장 나서 전기수리공을 불렀었어. 나는 외출하다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약속시간을 정하고 우리 집 앞에서 그 사람을 만나야 했어.
그는 키가 큰 백인 아저씨였어. 그와 함께 집에 들어가려는 순간 나는 내가 깜박 잊고 집 열쇠를 외출했던 어딘가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당황해서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를 타려고 서두르는 순간, 그가 내 이름을 불렀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어.
“A.K, 서두를 필요 없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다녀와요.”
그 아저씨의 말투와 음성 그 태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몸에 긴장이 쫙 풀리면서 내 마음이 순식간에 고요해졌어. 난 천천히 차를 몰고 집 열쇠를 찾아서 돌아왔어.
식기세척기를 고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어. 그가 나를 보고 물었어.
“혹시 넬슨 만델라를 만난 적이 있어요?”
갑자기 넬슨 만델라가 여기서 왜 나오지 싶었어.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어. 그가 말했어.
“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에너지가 내 온몸으로 전달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게 마음이 평안해지고 온유해지고 고요할 수가 없었어요.”
사실을 말하자면 그가 그 말을 하는 동안에 나는 그가 느꼈다는 그 감정을 그대로 느꼈어. 내 마음은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졌어.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내 고통과 혼란을 다 안다는 눈빛이었어. 그는 내게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자제했어. 그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어.
나중에 넬슨 만델라를 검색해서 사진을 보았을 때 깜짝 놀랐어. 내가 만난 전기수리공과 그는 외모도 피부색도 머리스타일도 달랐지만 내 눈에는 둘의 얼굴이 너무나 닮아 있었어.
순정아,
솔직히 말하면 나는 가끔 의심했어. 혹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이 가난과 고난 속에서 희생하며 비참하게 살길 원하시는 거 아닐까 하고. 하지만 성경을 읽고 나서야 하나님을 믿으면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 는 생각이야말로 사탄이 원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어.
하나님도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시더라. 단지 성공에 대한 개념이 다를 뿐이지. 신앙인에게 성공적인 삶이란 자신이 신께 부여받은 능력을 얼마나 잘 사용했는가에 있는 것이래. 반면에 성공적이지 못한 삶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들을 살릴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고.
선교사의 자녀로 몽골에서 살았던 악동뮤지션이 만약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게 맞아.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그래도 굶주리진 않았습니다’하며 아무런 시도 없이 세상에 자신들의 곡을 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지금 그들의 음악을 즐기지 못했겠지.
순정아,
너가 기뻐할 얘기를 해줄게. 실은 내가 신앙을 가지고 나서 조금은 변했다는 거야. 세상을 사는 태도가 조금은 변했어.
첫 번째 변화는 걱정과 근심이 많이 사라졌다는 거야. 걱정과 근심이 줄다 보니 당연히 화를 낼 일도 줄어들었어.
한 번은 가족들과 멀리 캠핑을 갔는데 가는 도중 집에 다리미 스위치를 안 꺼놓고 온 것 같은 거야. 집에서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갈 수도 없는데 예전 같으면 머릿속으로 재난 영화급 시나리오를 짜고 남편에게 그 모든 시나리오를 들려주면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두 배로 늘렸을 텐데 대신에 나는 기도를 했어. 그리고 침착하게 남편에게 말했어
“집에 다리미 스위치를 껐는지 확실하지 않아.”
놀란 남편의 얼굴! 나는 말했어.
“다리미에 과열방지 기능도 있으니 괜찮을 거야. 그리고 뭔 일이 생긴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생길 일은 생기는 거지 뭐.”
남편이 제법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어.
생각해 보면 전혀 걱정을 안 하는 남편이 더 대단한 사람이지. 그는 회사에 관계된 일만도 걱정이 산더미 같아서, 다른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있었어. 아마도 그래서 나는 그가 해주었으면 하는 걱정까지 두 배로 내가 대신하는 습관을 갖게 됐는지도 몰라.
아무튼 캠핑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다리미를 보았어. 다리미의 전원은 꺼져 있었어.
두 번째 변화는 내가 더 이상 헛된 욕망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거야. 그렇다고 내게 평범한 욕망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야. 우리에게 욕망이 없다면 어떻게 이 지구에서 생을 꾸려갈 수 있겠니. 내가 말하는 헛된 욕망이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 되고 싶은(혹은 무엇을 갖고 싶은) 욕망’을 말하는 거야.
예전에는 과거에 내가 한 선택들에 대해서 후회를 하곤 했어.
왜 재수해서 원하는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왜 내 커리어를 쌓을 생각을 못 했을까?
왜 일찍 결혼했을까?
왜 멀리 이곳까지 와서 기껏 유아교육을 공부해 놓고 라이센스를 따지 않았을까?
왜 아들이 세 살 때 집에 방역을 신청해서 애가 비염에 걸리게 되고 급기야 천식으로까지 발병하게 했을까? 등등의 끝없는 후회가 종종 내 가슴을 치기도 했었어.
그런 후회들은 모두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데서 생긴 후회들이었어. 그런데 이제야 나는 사람들 안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게 되었어. 우리의 신분과 직업을 모두 벗기면 사람 자체만 남잖아. 그 사람 자체에 부여된 가치는 우리가 얻어낸 신분이나 직업 재산 등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잖아. 우리가 세상에 어떤 업적을 남기지 않아도, 그저 숨만 쉬고 누워있는 생명체라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거잖아.
오직 인간만이 같은 인간을 평가하잖아.
하나님은 우리가 숨만 쉬고 있어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잘난 사람에게도 못난 사람에게도 태양빛은 공평해. 내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 더 이상 자신 없이 주춤주춤 세상을 살 필요가 없는 거야. 하나님이 주신 갑옷을 입고 우연을 가장해서 날아오는 사악한 돌멩이가 갑옷에 튕겨 나가는 걸 느끼면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세 번째 변화는 내 표정이 달라졌다는 거야. 성경 모임을 몇 년째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A.K 씨는 항상 밝아서…’라고 하길래 속으로 깜짝 놀랐단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는 ‘지적이며 시크한 A.K’ 였잖니. 농담도 시니컬해야 제맛인 줄 알던 내가 싫은 사람 앞에선 표정도 건조해지고 뭐든 진지한 얼굴로 덤벼들던 내가 항상 밝다는 소리를 듣다니.
10여 년 전에 신앙도 없이 성당을 잠깐 다녔을 때 있었던 일이야. 그날은 특히 마음속에 폭풍이 일어서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 야밤에 빗길을 뚫고 한인 성당으로 차를 몰았단다. 저녁 미사가 있었어. 밖에는 비가 오고 실내는 어둡고 나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지치고 굳은 얼굴들을 보았어. ‘내 표정도 저들과 같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신부님이 말했어.
“여러분, 세상에, 이렇게 어둡고 침울할 수가 없네요. 여러분들 얼굴을 보세요! 도무지 주님을 만나러 온 기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의무감 때문에 미사 참석하시는 거죠? 그런 거라면 앞으로 성당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신부님은 진짜 화가 나신 것 같았어. 사람들은 신부님의 말에 놀란 듯했지만 그마저도 우울한 표정 아래 감추고 있었어.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여러 생각이 들더라. 맨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어.
‘지치고 힘든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면서요? 지치고 힘들지만 대신 성당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활짝 웃어야 하는 건가요? 안 그래도 먹고 사느라 하루 종일 가짜 웃음을 팔면서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인 사람들인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무릎을 털썩 내려놓는 자리에서까지 당신께 잘 보이려고 미소를 지어야 하나요? 하긴 인간의 마음이 다 똑같지 뭐. 맨날 죽는소리하는 환자를 보는 의사들처럼, 신부님들도 사는 게 힘들다 토로하는 성도들 보기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겠어.’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흘러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
‘본래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어. 만약 그때 신부님의 마음속에 사랑이 넘치고 있었다면 사람들의 지치고 어두운 얼굴을 보면서 눈물 흘리셔야 하지 않아? 이 불쌍한 길 잃은 양들, 내가 인도하여야 할 이 안타까운 영혼들아, 내가 너희를 위로해 주리라 이러면서 말이야.’
그런데 더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때 그 성당의 신부님이 떠오르면서 그가 사람들의 무엇에 그렇게 실망했었는지 알았어. 신앙인들이 은혜와 용서와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셨겠지. 세상에서 어떤 종류의 전투를 치르더라도 언제나 우리는 승리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신의 보호 속에서 우린 절대 패배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굳건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였어야겠지.
근데 순정아, 말은 참 쉽지?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니. 정신을 살짝 놓지 않고서야 이 전쟁 같은 세상에서 그게 가능한 일이겠니? 나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마냥 기쁘고 평화로웠던 것만은 아니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졌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어. 나는 그 어둠의 이름이 죄책감이었다고 생각해.
순정아,
넌 내가 어떤 엄마였는지 모르지. 너에게조차 부끄러워서 한 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으니까.
아이가 열 살 때 4박 5일로 학교 캠핑을 다녀왔어. 캠핑을 다녀온 날 아이와 한바탕 다툼이 벌어졌어. 식사를 차리고 나서 아이가 하도 식탁으로 안 오니까 내가 뭐라고 애한테 소리를 질렀던 거 같아. 아이가 돌연 정색을 하고 그러는 거야.
‘엄마, 더 이상 못 참겠어!’
아이와 나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어. 나는 D한테 ‘네가 부모와 함께 사는 이상 부모의 룰을 따라야 한다. 그게 싫으면 집을 나가라’라고 말했어. 그러자 D는 캠핑을 다녀왔던 가방을 들고 짐을 싸더라.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 좀 진정이 된 후 D의 말을 들어봤어. D의 말에 따르면 나는 집안에 불안감을 조성하는 그래서 아들의 심장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히스테리 엄마였어.
순정아,
나는 정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D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일들이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어. D는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기저귀를 떼고 나서는 이불에 단 한 번도 실수 안 하는 그런 아이였어. 다른 애들은 천방지축 식당에서 뛰어다녀도 혼자만 가만히 앉아 있던 아이였어. 5살짜리가 한 시간 동안 피아노 치라고 하면 그 자리에 앉아서 투정도 안 부리고 열심히 치던 아이였어.
아이가 유치원 때, 그 조그만 아이를 나는 때렸어.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어.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 아무튼 몇 번 그랬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안 그랬지만 여전히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어. 애가 그렇게 혼날 만한 짓을 저질렀냐고? 아니. 애들은 애들일 뿐.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야 할 일이 뭐가 있었겠니? 그냥 아이한테 내 히스테리를 폭발시킨 거야. 그러면서 겉으로는 아이를 엄격하게 교육시키는 엄마인 양 위선을 떨었어.
맞아, 순정아, 그때야. 우울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이 힘들었던 그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갑상선에 위염에 예민성 방광 신디롬으로 시달리던 그때. 남편한테 내 감정을 폭발하면 그는 참지 않으니까 만만한 애한테 내 고통을 퍼부은 거야.
부모로서 처음으로 내 자식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어. 그리고 혼자가 되었을 때 펑펑 울었어.
엄마가 떠올랐거든. 엄마에게 매를 맞는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어. 부부싸움을 하는 엄마와 아빠를 방문 밖에서 심장이 터질 듯한 두려움으로 지켜보던 어린 내 모습. 날로 커져만 갔던 엄마의 히스테리. 엄마가 무섭게 혼을 내던 기억. 손에 잡히는 데로 때리던, 때로는 그게 우산이거나 허리띠 거나 국자였던 그때의 엄마. 딸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때리지는 않고 대신에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것 같은 비난과 욕설의 향연을 뱉어내던 엄마의 분노가 떠올랐어.
사람의 말이 물리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다면 내 귀에서는 피가 나고 몸이 할퀴어지고 심장엔 구멍이 났을 거야. 내 아들은 그때의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용감했어. 나는 엄마의 분노가 무서워서 고등학생 때도 저항 한번 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내 아들은 용감하게 내게 저항했으니까.
나도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됐고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상처가 아물고 미움도 희석되고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며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언니들은 웃으면서 마치 재밌다는 듯이 엄마가 자신에게 돈을 주는 딸과 안 주는 딸을 티 나게 차별 대우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언니들처럼 웃을 수가 없었어.
한국 갈 때마다 아빠가 돈을 챙겨주시는데 엄마는 내가 그 돈을 받지 않을까 봐 난리가 나. 내가 그 돈을 받아서 한국을 떠날 때 엄마에게 드리기 때문이야. 속으로 ‘그래선가? 갑자기 내가 한국에 오는 걸 반기시는 게 그 돈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한 번은 엄마가 독감으로 아프셨는데 한국을 방문했던 나와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친정을 방문했어. 우리의 방문을 고대하셨다던 엄마는 우리를 보자 반기기는커녕 짜증을 내셨어. 그래서 쉬시게 해 드리려고 금방 떠나려 했는데 엄마는 자식이 그 먼 곳에서 오랜만에 왔는데 밥을 안 챙겨주면 쓰겠냐면서 부엌으로 가셨어.
식탁에 앉아 있는데 엄마가 음식을 담은 그릇들을 식탁에 던지듯 놓고 가시더라. 정말 이 나이에 눈물이 찔끔 날뻔했어. 물론 다음에 방문했을 때 엄마는 언제 그랬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음식을 한 상 준비해 놓고는 우리를 맞았어.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우울증이었어. 하지만 그때 가족들은 엄마의 상태가 어떤 줄 알지도 못했어. 그만큼 엄마에게 무심했고 그만큼 엄마에게 지쳐있었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엄마가 전화로 하도 우울증을 호소하시길래 가까운 해외라도 다녀오시라고 돈을 부쳐드렸더니 고맙다고 전화하셔서 덧붙이는 말씀, ‘근데 요즘 돈 백같고는 외국 못 나가’.
이런 사소한 엄마의 말과 행동에 아직도 상처를 받는 내가 싫었어.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면 내 안의 목소리가 나를 꾸짖어.
‘엄마가 너를 위해 희생한 걸 잊었어? 그래서 넌 엄마에게 좋은 딸이니? 엄마에게 심한 말 한적 없어? 엄마가 널 위해 해준 좋은 기억들도 있는데 왜 꼭 나쁜 기억만 떠올려서 엄마를 미워하는 거야?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셋째 언니가 그러더라.
“엄마는 우리의 죄책감을 이용하고 있어.”
어릴 때는 힘으로 우리를 통제했지만, 딸들이 다 성장하고 당신이 쇠약해진 시점에서 엄마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를 피력해서 우리의 연민과 동정을 얻는 것이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딸들이 당신을 절대 위해주지(혹은 사랑해 주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 같았어. 실은 그 반대인데.
우린 엄마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지 않을 때, 평범한 대화가 가능할 때 더 엄마에게 애정을 느끼는데. 부모 자식 간에 연민과 동정이라니 그게 웬 말이니. 기본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당연히 있는데 엄마는 우리로부터 그걸 도통 느끼지 못했던 거야.
혹시 엄마가 어릴 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싶어서 몇 년 전에 엄마에게 슬쩍 말을 꺼낸 적이 있었어. 엄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어.
“니들은 진짜 내가 뭘 어쨌다고 그려? 남들 같으면 진즉에 애들 버리고 도망갔어.”
그런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어. 엄마는 온몸에 총알 자국이 너덜너덜한 사람인데 내가 그 상처를 후벼 판 거야. 엄마의 인생은 진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나 같으면 진작에 생을 포기할 수도 있었을 법한 그런 인생이거든.
엄마가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서 친척 집에서 키워졌다는 걸 나는 몇 해 전에야 알았어. 19살에 아빠에게 시집와서 갖은 고생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지만 불화가 계속되던 어느 날 아빠는 막내를 데리고 엄마를 떠났어. 그때 엄마는 우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다하셨어. 몇 년 후에 아빠와 다시 합치긴 했지만, 다른 여자랑 살림까지 차렸던 아빠와 살면서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나는 상상조차 안 가. 나는 그렇게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 사람에게 내 손톱 아래 가시가 아프다고 투덜댔던 거야. 경제활동을 못 하는 노인네가 돈 나올 데라고는 왠수 같은 남편하고 출가외인 딸들밖에 없는데, 매달 용돈을 드리지도 못하는 자식이면서 나는 속으로 엄마가 속물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있었던 거야.
순정아,
최근에 엄마는 경도인지장애라는 판정을 받았었어. 치매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대….
순정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어. 엄마를 위한 기도는 처음에는 그녀의 건강에 관한 것이었다가 어느덧 기도의 내용이 바뀌었어.
엄마가 충동적인 말과 행동을 벌이던 과거의 장면들이 떠올랐어. 나는 그녀를 비관적이며 불안하게 만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충동적으로 엉뚱한 말(혹은 예언적인 말)을 내뱉게 만드는 것의 정체가 혹시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이 아닌지 의심스러웠어. 혹시 나쁜 것이 엄마의 안에 살고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어. 또한 엄마에 대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상처와 미움을 인정하고 엄마를 용서하게 도와달라고 빌었어. 엄마를 용서하는 일이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내 자신 또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어.
순정아,
나는 사람들이 자상하고 학벌 좋은 부모님을 자랑할 때마다 속으로 부럽고 한편으로 우리 부모님이 창피했어.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세월을 살고 보니 우리 부모님은 정말 위대한 분들이라는 걸 깨달았어. 순탄치 않은 삶 속에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낸 엄마는 말할 것도 없이 아빠 역시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셨어.
아버지는 젊었을 때 시골에서 탄광사고로 허리를 다쳤고 식솔들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해서는 슈퍼를 운영하던 중에 바이크를 타고 다니다 고통사고로 또다시 허리를 다치셨어. 그 후유증으로 남은 여생을 허리 통증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것저것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셨어. 물론 작은 성공도 있었고 커다란 실패도 있었어.
사업 실패와 가정불화를 겪으면서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 술로 현실을 잊으려 했고 그대로 인생을 끝내도 상관없다고 자포자기했어. 결국 병원에서 아버지에게 ‘이대로 가다간 6개월을 살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들었어. 그때, 아버지가 그대로 삶을 포기했다면 지금의 우리 가족은 없었을 거야. 아버지는 그날 이후 다시는 입에 술을 대지 않았어.
매일 아침 일어나 녹즙을 갈아 마시기를 평생을 지속하셨고 엄마와 함께 쓰러져가던 동네의 작은 가게를 나름 유명한 동네의 맛집으로 일으켜냈어. 그는 60세가 넘어서 운전을 배웠고 70세가 넘어 컴퓨터를 80세가 넘어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셨어.
얼마전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꿈에 옛날 일들이 악몽처럼 나온다고, 특히 내 생각이 많이 난다고, 아직도 뜬금없이 우울하고 불안하다고 하시더라.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내 마음을 표현했어.
“엄마, 엄마가 어떤 세월을 겪어왔는지 우리가 다 알아. 내가 엄마였다면 나는 너무 힘들어서 살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아. 엄마니까 다 이겨낸 거야.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야.
우린 엄마가 살았던 그때보다 훨씬 많은 혜택을 받아서 잘 살고 있어. 잘살고 있긴 하지만 우리도 살면서 힘든 일이 안 생길 수는 없어.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해결하고 이겨내야 할 몫이야.
인생이 다 그래. 아무 고통도 없이 평생 웃고만 사는 인생은 하나도 없어. 힘든 순간이 있어도 사는 게 더 좋으니까 사는 거야. 그러니 우리 걱정은 이제 그만해. D가 대학 가면 엄마 모시고 여행도 가고 맛난 거 많이 드시게 해 드릴 테니까 엄마는 앞으로 엄마 건강에만 신경 써. 더 좋은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 잊지 마.
엄마, 그리고 진짜 부탁이니까 이제 버스 타고 다니지 마. 넘어져서 이번에는 엉덩이뼈라도 다치면 그때는 다리보다 더 심각해져요. 제발 부탁이야.”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어.
“너가… 니가 나를 이해해 준다. 나는 진짜 돈보다 이게 좋아. 내가 딸들이 많아서… 난 참 복 받은 사람이여.”
작년에 온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을 다녀왔어. 아빠가 씩씩한 걸음으로 앞서가며 스마트폰으로 풍경을 찍고, 그 뒤에서 엄마가 삭신이 쑤신 몸을 추스르며 쫓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이게 기적이구나 싶더라. 부모님이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운 것을 목격하던 어린 시절에는 미래에 내가 이런 그림을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거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인생은 좋은 카드를 가졌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손으로 얼마나 잘 플레이하는가의 문제’라고 말했어. 인생에서 좋은 카드만을 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싶어. 중간에 다이(die)를 외치지 않고, 내가 가진 카드로 최선을 다해서 플레이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이기는 순간이 온다는 걸 이제는 믿어. 내가 어떤 카드를 쥐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믿음이라는 것도.
그래서 감히 나는 네 번째로 달라진 나의 모습을 ‘용서’라고 말하고 싶어. 주기도문처럼, 우리에게 죄를 지은 이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해야지.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어. 지평선 위로 황금색, 오렌지색, 보라색, 청록색, 회색이 켜켜이 쌓였다. 인간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신의 작품이네.
그럼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