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순정아,
정말 오랜만이야. 네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후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 너를 잊었던 건 아니야. 그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나서 정신이 없었단다. 너는 들어본 적도 없는 코비드 19라는 팬데믹이 있었어. 전 세계가 환난으로 신음했고 아직도 그 여파가 계속되고 있어. 그 환난의 시기에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게.
네가 알다시피 2019년 초 남편은 홀로 호주 시드니에 있는 회사로 떠났단다. 회사에서 마련해 준 아파트에서 살면서 한 달에 한두 번 뉴질랜드에 나와 아들을 보러 방문하는 삶을 시작한 거야.
2019년 12월에 아들의 방학을 맞아 나와 아들은 시드니에 있는 남편이 사는 아파트에서 한 달 정도 함께 살았어. 아들이 남편 회사에서 인턴 경험도 쌓았고 나도 바로 곁에서 남편이 옮긴 새로운 회사와 그의 생활을 지켜볼 좋은 기회였어. 그게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단다. 그 한 달의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다면 난 남편이 전화로 내게 전하는 소식만 듣고 남편이 처한 현실을 자세히 알 수 없었을 거야.
남편이 전하는 소식으로는 남편 회사도 남편도 그럭저럭 잘 돼가고 있는 것만 같았어. 하지만 막상 남편의 회사 사장도 만나보고 회사도 둘러보고 나니 낙심과 불안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단다. 남편이 뉴질랜드 회사를 떠나게 된 게 실은 그의 오랜 고민과 조사와 만남 끝에 나온 결정이 아니었어. 남편은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싶은 절박감이 컸었어. 그때 마침 어떤 사람을 소개받았고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가 제시한 장밋빛 청사진 하나만 믿고 남편은 호주로 떠나온 거였어. 막상 와보니 남편이 새로 이직한 회사는 전에 다니던 회사와 비교해서 너무나 영세한 회사였고 최근 투자를 받아서 추진 중이라던 프로젝트도 엎어진 상태였어.
사실 회사 일이 잘 되어가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남편의 상태였어.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남편은 저녁을 먹자마자 TV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잠이 몇 시간이고 넷플릭스만 봤어. 자신을 방문한 아들과 아내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았어.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과 감정을 가족과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야.. 그가 왜 그랬는지는 물론 잘 알지. 시드니까지 왔는데 경제적으로 더 나아진 것은 없고, 팬데믹이 덮쳤고, 추진하던 프로젝트도 취소되고… 자신의 낙담한 마음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조금은 우울한 마음으로 나와 아들은 시드니 휴가를 마치고 2020년 1월 뉴질랜드 집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남편은 2020년 3월 어느 날 몸이 매우 아프다고 뉴질랜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취소해야 갰다고 말했어. 코비드에 걸린 거였어.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어. 남편은 그 이후로 2년 동안 뉴질랜드에 오는 비행기를 탈 수가 없었어. 코비드가 터지면서 뉴질랜드는 다른 국가들보다 더욱 강경하게 코비드에 대처했어. 아주 응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모든 국민들의 해외여행을 금지했어.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은 생이별을 하게 되었어. 남편과 나는 매일 전화 통화만으로 대화를 나누었어.
순정아,
뉴질랜드를 떠날 때 남편은 친구, 지인들과 송별 모임을 자주 했는데 그들은 남편이 엄청나게 성공해서 시드니로 가는 줄 아는 듯했어. 남편도 굳이 그들의 오해를 수정할 필요를 느끼는 것 같지 않았지. 실제로 남편은 시드니로 떠나고 나서 몇 달 동안은 정말 로또라도 맞은 사람처럼 굴었단다. 내게 명품 가방을 사라고 하고, 하늘거리는 예쁜 드레스 좀 사라고 하고 큰소리를 치는 모양이 뭔가 이상해 보였어. 우리 통장 잔고는 그 어느 때보다 바닥이었는데 남편의 그런 모습이 왜 이상하지 않았겠니.
당시 남편은 종종 말했어.
‘앞으로 1, 2년만 허리띠 졸라매고 고생하는 거야. 나도 다 계획이 있어. 이번 투자가 성공하면 2차 계획까지 다 되어 있어.’
그는 이미 통장에 재물이 가득 들어온 듯이 굴었고 나는 남편의 말을 믿었기에 꿈에 부풀어서 빠듯해진 살림을 잘 버텨보자고 결심했지. 그러나 막상 가정주부로서 살아보니 수입이 그렇게 줄어든 것은 정말 커다란 타격이더라. 남편이 생활비를 보내는 날은 정해져 있었는데 남편은 내가 돈 떨어졌다고 말을 안 하면 끝까지 생활비를 보내지 않았어. 매달 내가 말을 해야지만 그제야 생활비를 보내더라고. 그게 나는 기분이 상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정도로 그가 혼자 시드니에서 아끼며 살아야 했었구나 싶더라.
남편이 시드니에 있는 동안 아들 D는 2019년과 2020년 2년의 기간 동안 잠을 안 자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 2020년 마지막 해에는 미국 대입을 위한 sat시험과 뉴질랜드 호주 대입을 위한 캠브리지 시험, A 레벨 시험, 그리고 장학금을 받기 위한 12과목의 시험들까지 마지막 시험들에 그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어. D는 미국 대학진학이 안될 경우를 위해 호주에 있는 의대입학을 위해 UCAT이라는 의대 진학 시험도 따로 준비해야 했어.
그렇게 고생을 하니 D의 오랜 질병인 여드름이 점점 심해졌고 나중에는 탁구공처럼 커진 종기 두 개를 귀 아래에 달고도 병원 갈 시간이 없다며 시험 준비를 했단다. 미국 대학마다 입학 에세이 쓸 것은 얼마나 많고 또 인터뷰할 곳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그걸 내가 옆에서 다 지켜보았지.
남편은 시드니에 있으니 아들이 그렇게 열심히 고생하는 것을 못 봤지만 정말 폭풍 같은 시간이었단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SAT를 2019년에 시험 삼아 한번 봐 둔 것이 있었는데 처음 본시험에서 전체 SAT에서 2문 제 만 틀리는 결과가 나온 거야. 그래서 그나마 SAT는 다시 치를 필요가 없어서 그것만으로도 시간 절약이 되었지.
그 시절에 D를 생각하면 정말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아파. 가끔 지인들 중에 D가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쉽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정말로 그들이 D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CCTV로라도 봤다면 절대 함부로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
남편이 좀 더 솔직하게 회사와 재정상태를 공개했더라면 D가 불필요한 미국 대학 시험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야. 아들이 미국 대학에 원서를 넣고 나서야 아들과 나는 남편의 회사 사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D가 만약을 대비해서 호주와 뉴질랜드 의대 입학 준비를 해놓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어.
순정아, 내가 아들 공부 잘했다고 너한테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니? 실은 그 반대야. 아무리 D가 그렇게 노력을 했어도 신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그의 소망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야. 미국 대학 입학이 좌절되면서 우리의 바람은 D가 아버지가 있는 시드니에 있는 의대에 합격을 하는 것이 되었어. 그래야 우리 가족이 시드니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니까.
D가 시드니에 있는 의대에 지원을 하고 합격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어. 왜 학교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지 D가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지. 새벽 6시에 눈을 뜬 나는 기도를 했어.
그즈음 나는 천일기도를 매일 노트에 쓰고 있었는데 그날이 천일기도 중 딱 400일이 되는 날이었다. 기도 중에 D를 떠올리니 마음이 너무 아팠어. 어릴 때부터 실수투성이 엄마를 만났고 나 때문에 생긴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천식과 비염으로 고생하면서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성실하게 해내던 아이. 매번 최선을 다하는 아이였고 불평하지 않는 아이였지. D 가 고등학교 때 함께 치과에 가면 치과 벽면에 D의 얼굴이 실린 지역뉴스 신문이 스크랩되어 있기도 했어. 내가 신기해서 신문 스크랩을 휴대전화에 담으려고 하면 창피하다며 말리는 아이였지. 또 어떤 때는 길에서 만난 지인이 내 아들 얼굴이 크게 나왔다면서 내게 지역신문을 건넨 적도 있어.
공부 잘하는 아들 둬서 좋겠다는 말을 종종 들었지만, 난 그들이 그렇게 말을 해도 아들이 자랑스러운 것보다 마음 한구석이 항상 아팠었어. 그런 결실을 보기 위해 아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나는 옆에서 다 지켜봤으니까. 그런 아들의 노력이 수확을 해야 하는 시기였고 그 결실을 봐야 하는 순간이었어. 그날 새벽 6시에 나는 어린애처럼 하나님께 기도했어.
‘주님, 오늘이 제가 천일기도를 시작한 지 400일 째네요. 400일 동안 매일 기도를 노트에 쓰는 것이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하나님, 아주 쉬운 일도 아니었어요. 그래서요 주님, 저 주님께 선물 원해도 될까요? 400일간 열심히 기도했으니 주님 선물로 우리 아들에게 의대 합격 소식 주시면 안 될까요? 첫날의 적은 기도문 얼마나 부족한 지 다 보셨죠? 400일이 지나면서 제 기도를 계속 변하게 하셨죠? 주님… 저 너무 부족하고 미성숙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기특하다고 저 선물 좀 주세요. 주님 부탁합니다.’
이런 유치하고도 뻔뻔한 기도를 마친 후 10분이 흘렀을까. 아들이 이층 내 방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어. 난 벌떡 일어났어. 내게 걸어오는 D의 표정은… 그가 말했어.
‘엄마, 지금 학교에서 이메일을 받았어. 엄마, 나 0000 의대 합격했어…’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았어. 처음으로 아들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나는 느꼈어. 눈물이 흘렀어. 됐다. 이제 우리 가족 남편이 먼저 가 있는 시드니로 가서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되는 거다! 주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나는 확신했어. 그런데 순정아, 나는 왜 대학에서 합격 소식을 아침 6시에 보낼 수 있지 라는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더라. 대학에서 아침 6시에 출근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내 의구심에 D가 그러더라.
‘엄마는 참, 자동으로 메일 발신이 설정되어 있겠죠.’
맞아. 그렇게 설정이 되어 있었겠지. 내가 기도 응답을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것까지 다 계획해 놓으신 거지. D는 대학 기숙사를 신청하고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2021년 3월에 시드니로 떠났어. 그 와중에도 주님의 돌보심이 있었단다. 호주와 뉴질랜드 하늘길이 잠깐 열린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3월이었고 그 덕분에 아들은 코비드 락다운 기간에 시드니 대학으로 떠날 수 있었단다. 이제 마지막으로 뉴질랜드를 떠날 사람은 나였어.
시드니로 떠나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 할 커다란 숙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우리 가족의 전재신인 살던 집을 팔고 그 돈을 가지고 시드니로 가는 것이었어. 살던 집을 좋은 가격에 팔아야지만 물가 높은 시드니에서 우리 가족이 살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거였지.
나는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부동산업자를 만났어. 그녀는 내게 집에서 고치고 손봐야 할 것들을 지적하고 가구들을 일부 다 빼내고 인테리어용 가구를 들이는 플랜도 짰어. 그러자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내가 직접 집에 페인트칠을 모두 했지만 시멘트도 개서 외벽에 금도 메꾸고 정말 바빴어. 집을 경매로 파는 것도 일이지만 집의 모든 짐들을 정리해서 해외 이사 준비를 하고 또 내가 타던 차를 호주로 보내는 것도 일이더라.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어. 그때마다 주님의 손길이 있었단다.
간단하게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궂은 날씨로 특히 비바람으로 악명이 높은 오클랜드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오락가락하는 그곳에서 오픈 홈을 하는 주말 동안만 언제나 날이 화창했다면 믿어지니? 주중에는 비가 자주 내렸지만 주말에만 한 달 동안 비가 안 왔어. 그건 내가 주님께 드린 기도 중 하나였어. 집을 내놓을 때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아늑함과 평화를 느끼도록 날씨의 축복을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었어. 놀랍게도 경매 날 집이 팔리자마자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지.
경매하는 날에는 내가 또 얼마나 떨렸겠니? 나는 우리 가족의 전재산이 좌지우지되는 중요한 순간 그 경매장에 혼자 있었던 거야. 물론 주님이 보내신 도움의 손길이 그곳에서도 있었지만 가족들 없이 오롯이 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우리 가족의 전재산과 운명이 달려있던 거야.
여러 사건 중이 하나는 이런 일도 있었어. 집이 우여곡절 끝에 경매로 팔리고 잔금을 받는 날짜만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집에 수도가 터져 버린 거야. 도대체 어디서 수도가 터진 것인지 전문가들을 불러도 찾아내지 못하고 애꿎게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계량기만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었단다. 전문가들은 일단 누수가 집안이 아니라 마당이라고 진단했고 마당 전체에 깔린 수도를 다시 공사해야 한다고 말했어. 그 비용도 비용이지만 잔금 받고 우리 이삿짐을 빼줘야 하는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코비드 상황이라서 공사를 일주일 안에 끝내주겠다는 회사가 없었어. 빨라야 3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
그 암담한 상황에서도 나는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마음을 애써 눌렀어. 그때 내가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인 게 너에게 다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더 많았거든.
한 번은 페인트를 집안에서 칠하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어. 이층으로 올라가는 중간 계단에 사다리를 놓고 그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층고가 높은 벽에 페인트를 칠하다가 발을 헛디뎠어. 잘못하면 그대로 떨어져 목 혹은 사지가 부러지거나 죽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순간 내 발이 저절로 사다리 위를 짚었고 몸에 균형이 맞춰졌어. 그 순간 나는 내 발목을 잡는 천사의 손길을 느꼈어. 아무도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순정이 너만은 내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
아무튼 다시 마당에 수도가 터진 얘기로 돌아가서….
집수리를 하시는 어떤 한국분을 알게 되었어(내가 아직도 천사라는 부르는 분이야). 그 사람과 나는 느낌이 오는 마당의 어느 한 곳을 파내기 시작했어. 몰라. 왜 그곳을 파내봐야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그곳을 파내자고 우린 상의를 했어. 장식용 돌무더기가 옹벽처럼 쌓인 그곳에 있는 돌들을 그와 나는 손을 이용해서 모두 치워냈어. 땅이 드러났고 그곳을 파내자 수도관에서 새는 부분이 발견됐어. 그와 나는 마주 보고 감탄의 미소를 지었단다. 그래서 전체 수도공사를 다시 할 필요도 없이 그 새는 파이프만 교체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단다.
그때 그런 문제들을 겪으면서 남편이 원망스럽더라. 남편에게 SOS를 쳐도 남편은 멀리 시드니에 있고 워낙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기니까 그는 내가 전화를 해서 뉴질랜드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전달받는 것만으로도 지친 기색이었어. 남편은 문제의 발생과 진행 과정이 아니라 해결된 결과만 보고 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느꼈었어.
그래서 그 모든 문제들은 결국 주님이 해결하셨단다. 나는 남편과 떨어져 있는 2년 동안 그렇게 주님께만 철저하게 매달려 살았단다. 주님만이 나를 지키고 인도하시고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그 시간 동안 너무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
2021년 5월 30일.
나는 뉴질랜드 집을 판 돈을 호주에 있는 남편에게 송금하고 나서 시드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단다. 비행기 안에서 지난 20년의 세월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더라. 2000년 8월 30일 배낭에 수저 두벌, 그릇 두 벌씩 챙겨서 뉴질랜드에 도착해 유스호스텔에 묵었던 그날부터 광야의 20년의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 앞으로 호주에서는 무슨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또 다른 이 인생의 챕터는 어떤 장르로 그려지게 될까. 눈물이 흘렀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었지.
순정아,
내가 시드니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서 다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하늘길이 닫혀버렸단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아들 D의 경우도 그렇고 우리가 대단히 운이 좋았다고 말했지만 순정아 너랑 나는 알지. 그건 그냥 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실은 하나님의 간섭이고 은혜고 계획이었다는 것을.
순정아, 아직 코비드 그 후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말하지 못했어.
시드니는 비가 참 예쁘게 내린다. 그냥 위에서 아래로 내려. 뉴질랜드에서처럼 사방팔방으로 바람과 함께 우산을 다 뒤집어버리는 그런 비가 아니라니 감사한 일이야.
그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