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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K Moon Sep 05. 2024

제15화 시급 3만 7천 원짜리 직업


사랑하는 순정아,

3년 만에 네게 편지를 다시 쓰면서 너의 친구로서도 신앙인으로서도 네게 자랑할 만한 소식을 전하고 싶었어. 가령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었다거나 기도응답을 받아서 남편의 일이 대성공했다거나…

사실 신학교에 한 학기정도 잠시 발을 담그기도 했었어. 처음에 호주 도착해서는 아직 남편 회사 사정이 온전히 파악이 안 됐을 때라서, 내 학비 정도는 여유가 있는 줄 알고  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었어. 결국 학비를 감당 못해서 한 학기만 다녔지. 내가 아직 호주 시민권자가 아니라 융자도 정부 지원도 되지 않는데 아들이 학교와 병원 근처에서 기숙사 생활도 하고 친구들과 자취도 하는데 학비와 렌트비 등을 감당하기도 버거워서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단다.

 

시드니에 도착한 2021년 5월에서 6개월 정도 지난. 11월부터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더라.

그때부터 열심히 기도를 했어.

‘하나님, 저 그렇게 가고 싶었던 신학대를 잠시 경험해 봤네요. 이제 그곳이 어떤 곳이고 무엇을 공부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죽을 때 ‘아이고, 신학대 한번 못 가고 죽네…’ 하며 아쉬워하지 않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사정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네요. 이 길을 닫으시고 제게 다른 길을 주시려는 주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주시는 새로운 길이, 새로운 직업이 제발 아들에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벌 수 있는 직업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 직업을 갖기 위해 직업교육을 받아야 한다면 그 학비를 낼 여유도 없으니까요, 학비도 무료인 그런 직업교육을 받게 해 주세요.’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기도를 한 지 3개월쯤 되던 2022년 2월, 서울에 사는, 20여 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학교 후배에게 학교 단체카톡방을 통해 문자가 하나 왔어.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통화가 가능하냐는 거야. 그 문자를 받자마자 나는 기도를 했어.

주님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멀리서 날아든 갑작스러운 지인의 연락, 이것을 통해 어떤 일을 계획하시는 건지 부디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달라고 그리고 이 전화통화가 나의 오랜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하고 후배와 통화를 했어.


그 후배는 알고 보니 호주에서 20년 넘게 간호사 생활을 하다가 2022년 한국으로 돌아간 상태였고 한국에서 다시 간호사로 취업을 하기 위해서 호주 경찰 신원조회서가 필요했던 거야. 그 신원조회서를 호주에서 받아서 자신의 한국 집으로 전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났다고 하더라,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 내 현재 상황을 들은 그녀가 말했어.

“선배! 호주에 테잎(TAFE)이라고 국립 직업학교가 전국에 있어요. 그 학교에서 디플로마 간호사 자격을 따고 요양원이나 양로원에서 일하는 게 어때요? 학사 간호사 자격 따려면 대학을 3년 다시 다녀야 하지만 디플로마 간호사는 일 년 반만 다니면 돼요.”

 

나는 전화를 끊고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어. 2021년에 뉴질랜드에서 시드니에 도착했을 때 나도 사실 테잎에서 제공하는 간호과정을 알아봤었거든. 근데 학비가 부담이 돼서 포기했었는데 갑자기 2022년부터 그 과정이 무료가 된 거야.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니니?.


하지만 순정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간호과정을 공부할 수가 없었어. 그 과정은 공부 기간이 일 년 반이 되는데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나로서는 힘든 선택이었어. 그래서 몇 개의 무료 직업 교육과정 중에서 가장 짧고 그리고 가장 취업이 잘 되는 과정인 커뮤니티 서포트 워커(community support worker:지역 사회 보조사) 3급 자격증, 4개월 과정에 등록을 했단다..

그 3급 자격증을 갖게 되면 보통 두 가지 종류의 일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요양원에서 요양사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인들 집에 방문해서 집안일과 요리, 이동, 목욕 등을 돕는 것이었어.

 

순정아.

그런데 나는 그 두 가지 종류와는 비슷한 듯 조금은 다른 일을 내 첫 직장으로 갖게 되었단다. 그 얘기를 해줄게.  


처음 자격증을 따러 학교에 다닐 때 교실에서 내 옆에 앉은 홍콩 출신 여자분이 있었어. 그녀는 60이 넘는 나이에도 매일 네, 다섯 군데의 집을 방문해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어.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자기네 회사에서 일하라고 열심히 나를 설득했어. 자신이 하는 일을 세세히 알려주고 월급을 공개하고 매니저에게 내 얘기를 전해주고 이메일을 알려주고 정말 내가 일하겠다고 말만 하면 바로 일할 수 있게 모든 걸 도와주었어. 그녀가 왜 그렇게 나를 자기 회사에 소개해서 같이 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 덕분에 그 회사에서 일하자면 일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순정아,

실은 말이야. 나는 그 홍콩 여자분이 다니는 그 회사에 이력서를 내놓고 혼자 울었어. 남의 집에 청소기 돌리고 빨래하러 가는 일을 50이 넘은 나이에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어.

그 순간 엄마 생각도 났어. 부모님이 별거하실 때 우리 여섯 자매는 큰 언니를 제외하고 모두 학생이었어. 언니들은 고등학생 나는 중학생 막내는 초등학생이었어.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엄마는 안 해본 일이 없으셨는데 그 당시에 엄마는 가사도우미(그때는 파출부라 불렸지) 일도 하셨었어.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이 엄마가 했던 일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엄마가 그때 어떤 심정으로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집에서 밥을 하고 청소를 했을까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단다.  

물론 나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니 당연히 그런 경제적 고난의 상태에서 남편을 원망했지. 따지고 보면 돈을 못 벌어다 주는 남편도 아닌데 괜히 한가롭게 골프 치러 다니는 아줌마들을 떠올리면서 ‘여자 팔자 두레박 팔자’인가 그런 올드한 팔자타령도 했단다.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은 지금도 남편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싫어서 그랬는지 그 회사에 이력서가 수신자를 찾지 못해 리턴이 되는 일이 생기고, 매니저와 통화를 하면은 통화가 몇 번이나 갑자기 끊겨 버리고. 내가 보낸 이메일 주소를 상대방이 잘 못 알게 되고. 심지어 이메일을 보내는데 컴퓨터가 고장이 나기도 하면서 나는 그녀의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수업 때 조별 과제를 했었어.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조별과제에 대한 말이 많지 않나?

3명이 조를 짜서 과제를 해야 되는 수업 시간에 같은 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영어 잘하고 똑똑해 보이고 젊은 사람들끼리 조를 짜려고 하더라. 가만히 있다 보니 어느 순간 나와 60대 그녀(내게 일자리를 소개해준)와 내 뒤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필리핀에서 온 남자 한 명 그렇게 셋이 한 조가 되었단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 모를 열패감이 들었는데 그런 감정이 든 나를 반성하면서 나는 즉시 짧은 기도를 드렸어.  

‘하나님, 일상의 작은 상황들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 셋을 붙여놓으신 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습니다. 이 두 명을 제게 붙여주신 것이 주님의 선한 계획임을 믿습니다. 이 둘을 통해서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주세요.’

 

쉬는 시간에 필리핀에서 온 남자에게 내가 물었어.

“혹시 지금 일 하세요?”

“네. 장애인 서비스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금은 수업 때문에 파트타임으로 일하지만 졸업하고 자격증 받으면 풀타임으로 일할 거예요.”

나는 장애인 서비스 회사라는 단어도 처음 들었고 내가 따는 자격증으로 그런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어.  

“장애인 서비스 회사는 뭐 하는 곳이에요?”

“장애인들을 위해 9시에서 3시까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데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에요. 약간 유치원이나 학교 같다고나 할까요? 대신 장애인들은 모두 18세 이상 성인 장애인들이고 그들 대부분은 18세가 되면서 집에서 독립해서 그룹홈이라는 일반 주택에서 장애인 친구들과 같이 살고 있어요. 저희 같은 서포트 워커들은 장애인서비스 회사에서 9시부터 3시까지 일하고 또 어떤 워커들은 그들이 사는 집에 가서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해요. 그들이 사는 그룹홈은 저 같은 워커들이 365일 24시간 3교대, 혹은 4 교대로 그 집에서 일해요.”

“9시부터 3시까지 장애인들과 뭘 하는데요?”

“아침에 밴을 타고 장애인들이 그룹홈에서 저희 회시로 오면 우리는 그들을 데리고 그림도 그리고 볼링도 치러 가고 공원도 가고 수영도 가고 요리도 하는 그런 다양한 프로그램을 해요 오후 3시가 되면 그들이 사는 그룹홈에서 장애인들을 데리러 다시 밴이 오지요. AK 씨, 혹시 저희 회사에서 일해 볼 생각 없어요? 그쪽 동네에서 지점에 있으니 그 지점에 이력서 넣으시면 돼요. 저는 저희 회사에서 일하는 거 추천해요. 주말 공휴일 다 쉬고요. 돈 더 벌고 싶으면 그룹홈에서 더 일해도 되고요.”

“회사가 개인회사인 거예요?”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는 호주에는 NDIS라는 제도가 있어요. 장애가 진단되면 일 년에 제가 본 사람은 50만 불도 받는 사람 봤어요. 금액은 천차만별이고요. 그 재정으로 장애인의 가족이 그 장애인을 돌볼 필요가 없도록 모든 걸 다 지원해 줘요. 국가에서 장애인에게 지급하는 돈에 저희 회사 인건비 운영비 다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죠. 물론 그 돈은 현금지급이 아니고요, 그 돈으로 장애인과 관련된 서비스를 사용하면 서비스 회사에 지급이 되는 시스템이에요.”

 

말만 들어도 놀라운 시스템이더구나. 이 모든 것이 정부 재정으로 운영된다니 믿을 수가 없더라. 그런데 신체장애인들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장애인들과도 함께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솔직히 겁이 나기도 했어. 그런데 그분이 웃으며 말했어.

“영화에서 보는 정신병 환자 그렇게 상상하면 안 돼요. 물론 폭력성이 있는 장애인들도 있지만 컨트롤이 안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폭력성이 있기는 있다는 말이잖아? 그래서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원래의 나라면 선뜻 이력서를 낼 엄두가 안 났을 거야. 그런데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자격증을 따기도 전에 그가 일하는 장애인 서비스 회사에 이력서를 냈단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냐고? 뭐가 그리 급했냐고?

사실 내게는 꼭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있었거든. 아들 학비 때문이 아니야. 물론 아들 대학공부를 지원해줘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내 마음이 급했던 이유는 바로 주차비  때문이었어.

나는 정말 주차비를 내가 번 돈으로 시원하게 쏘고 싶어서 돈을 벌고 싶었어.

 

그놈의 주차비…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내가 준비한 반찬을 아들에게 주고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나와 남편의 일요일 루틴이었어. 아들이 집에서 학교를 다니려면 버스와 기차와 라이트 레일 등 세 종류의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두 시간 가까이 이동을 해야 하는데 왕복이면 하루에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기에는 아들의 공부가 너무 바쁘고 힘들었어. 그래서 아들이 친구들과 자취생활을 하게 된 거야.

아무리 반찬을 몇 개 내가 해준다고 해도 돈을 엄청 아끼는 아들은 평소에는 절약을 하느라고 잘 챙겨 먹지를 못해서 얼굴과 몸에 피부염이 심해졌고 몸도 빼빼 말라갔단다. 엄마로서 내가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겠니. 그래서 일주일에 딱 한 번 같이 밥 먹을 때는 좋은 것을 사 먹이고 싶었어. 하지만 외식을 한다고 해도 영양가도 있고 가격도 좋고 깨끗하고 그런 식당을 찾기는 쉽지 않았지.


아무튼 매주 우리는 시드니 시내 식당을 찾아다녔는데 식당을 정하면 남편은 일단 주변에 주차할 곳을 휴대폰으로 알아보면서 항상 주차비가 비싸다고 투덜대곤 했어. 우리는 매번 주차비가 저렴한 식당을 찾아서 다니다가(그런 식당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몇 번은 주차비가 비싸도 그냥 내가 고른 식당에 가게 되는데 그럴 때면 남편은 주차비나 음식값이 비싸다고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어. 나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들이 그런 말을 들을 때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남편이 나와 단둘이 외식할 때는 식사비용이나 주차비용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었기에 난 그런 남편에게 더 화가 났었어.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이마에 주름을 잡고 주차장을 검색하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어. 최대한 가볍게 농담인 듯.

“아이고, 그놈의 주차비. 내가 빨리 돈 벌어서 우리 남편 주차비 걱정 안 하게 해 줘야지.”


순정아, 나의 주차비와 외식비에 대한 그런 절박함(?)이 마음속으로 덜덜 떨면서도 냉큼 장애인서비스 회사에 이력서를 내도록 만들었단다. 이력서를 접수하자마자 3시간도 안 돼서 그 회사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왔어. 인터뷰를 다음 날 봤고 필요한 서류를 보내라고 해서 보내자마자 바로 출근하라고 하더라. 이 모든 일이 너무나 순식간에 빠르게 이루어졌어. 홍콩분이 소개한 그 회사와는 그렇게 진행이 안 되더니 이 장애인 서비스 회사와는 정말 일사천리였지.

 



너와 내가 장애인복지학과 신입생으로 처음 만났을 때 너는 그나마 장애인복지에 대해 거부감이라도 없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 취직이 잘된다는 고3 담임선생님 말만 듣고 전공을 택했던 나니까 말이야. 졸업하고 동기들이 장애인 복지관에 취직할 때도 나는 TV에서 중증 신체장애인을 본 것만으로도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비위가 약해서 그쪽 분야로는 발도 들이지 못했지. 그런 내가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장애인들의 침과 오줌과 대변을 보고 만지고 그들에게서 풍기는 모든 냄새를 맡으며 그 옆에서 도시락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됐는지 생각해 보면 참 놀라워.

 

순정아, 지금은 회사를 옮겼지만 나의 첫 직장의 장애인들은 내가 지금까지 본 장애인들 중 가장 중증의 장애인들이었단다.

뇌손상 장애인들도 많았는데 휠체어에 뒤틀린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약한 정도고 어떤 사람은 계속 자기 머리를 때리고 어떤 사람은 서서 뱅글뱅글 돌고 어떤 사람은 종이만 보이면 찢고 어떤 사람은 쓰레기며 땅에 뒹구는 것들을 모두 입에 물지 못해서 안달이고 어떤 사람은 계속 괴성을 지르며 침을 뱉고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음식이란 음식은 모두 입에 넣고 먹었어.

출근한 첫날 그 장면을 한꺼번에 목격했을 때는 아비규환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더라.

 

순정아,

처음 몇 달은 일이 힘들었어. 그 장애인들 때문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 직원들 때문에.

전업주부로 살다가 50이 넘어서 노동현장에 나가보니 정말 세상에는 다종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많더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본래 착하지 않은 사람들, 무례한 사람들과 섞여서 지내야 하는 상황을 유달리 못 견뎌했어. 어떤 모임에서 무례하거나 못된 사람이 있으면 나는 아예 그 모임에 나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어.

동료라고 불리는 사람들 속에 기버(giver)와 테어커(taker)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어. 같은 일을 하면서도 taker들은 자신보다 착하고 순한 giver들을 이용해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일을 떠넘기려고 해. 문 한번 열어서 잡아주는 사소한 것부터 장애인의 대소변을 처리하는 것, 운전하는 것 등등 종류도 다양한 갖가지 일들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육체를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고 싶어 하는 거야.   

나는 몇 번 억울한 일을 당하고 taker에 맞서보려고 마음을 다잡았다가도 막상 바쁘게 장애인들을 도와주다 보면 어느새 내가 Taker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거야. 회사에 너무나 심한 taker 가 있었는데 결국 내가 이렇게 기도를 했지.


‘하나님, 00 때문에 회사 다니기가 괴롭고 당장 그만두고 싶어요. 제게 이 일을 하게 하신 목적이 있으신 거죠? 제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거라면 제발 00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00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요. 그녀가 달라지도록 해주세요. 만약 그녀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저라도 바꿔주세요. 제가 00를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꿔주세요. 00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겠죠? 00에게도 다시 태어날 기회가 있는 거겠죠? 00가 다시 태어나게 해 주세요. 아니면 제가 00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사랑이 악을 이긴다고 하셨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런 기도를 한 후 갑자기  그녀가 회사를 관뒀어. 소문에는 해고당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 그리고 힘들 때마다 주님은 사람을 뗴어주시거나 붙어주시거나 내가 일하는 장소를 옮겨주시거나 하셨어. 그 회사를 관두고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로 옮긴 것도 나는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해.

 

순정아, 그런데 말이야. 이전 회사에서 그렇게 중증 장애인들과 일했는데 나는 한 번도 장애인들 때문에 일하기 힘들다는 생각은 못했어.

출근 첫날 내게 웃으며 손을 내밀며 다가온 장애인의 손을 잡았다가 그녀에게 가슴팍을 맞은 것을 시작으로 마일드하게 경험하는 폭력들이 존재했는데도 일이 힘드냐고 누가 물었을 때 나는 힘들지 않다고 대답했어.  

어떤 장애인이 자신의 침을 입 안에서 모으고 모아서 한 컵 분량을 만들어서 내 얼굴에 정통으로 뱉은 적이 있었어. 그녀는 내 앞에 서 있고 나는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그대로 침을 받았으니 그녀의 덩어리 침이 내 눈에 정통으로 들어갔지. 분무기처럼 날리는 침을 얼굴에 맞는 일은 흔한데 침 덩어리가 내 눈 안에 덩어리로 들어간 건 처음이었어. 그녀가 앓고 있는 온갖 질병에 나도 걸리면 어쩌나, 코비드나 감기 바이러스에라도 걸려 몸져눕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됐었어. 그동안 코비드 덕분에 마스크와 페이스실드를 껴왔었는데 마스크와 페이스실드를 벗으니 침의 접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더라고.

패드를 차고 있는 장애인들은 대변 처리를 내가 해주는데 아무리 수술 장갑을 끼고 그들의 변을 닦아도 그 변의 온기와 질감이 너무 속속들이 느껴지는 거야. 뚱뚱한 사람의 항문은 또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 있는지 그곳을 물티슈를 들고 꼼꼼히 닦으려면 어쩔 수 없이 손목에 그들의 변이 묻기도 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 일이 그렇게까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 이유를 나는 최근에 깨달았단다.

 

내게는 몇 가지 두려움이 있었어.

첫째로 나는 세균 공포증 비슷한 것이 있었어. 코비드 터지기 전에도 항상 손소독제를 사용했고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손잡이를 직접 손으로 잡은 적도 없고 변기에 내 엉덩이를 대고 앉아본 적도 없어. 아들도 그런 식으로 키웠어. 언제나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 혹은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은 것들은 만지지 않도록 그렇게 D를 키웠어. 참으로 아이러니한 게 그런 D 가 지금 의대를 다니잖아. 병원에 모이는 수많은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된 거야. 그랬던 내가 이제는 분비물이 넘치고 피부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 그들 옆에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단다.

그들의 얼굴을 처음 보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힘들 정도로 흠칫하게 되는 외모인 사람들이 많아. 근데 그들과 일하다 보면 그렇게 뒤틀리고 상한 얼굴이 진심으로 예쁘게 보여. 누워서 침을 뱉고 괴성을 질러대기 일쑤인 남자 장애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그 비틀림 뒤에 숨은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그의 진짜 얼굴이 보여. 한 번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쓰레기나 나무, 풀 등을 집어서 입에 물고 다니는 여자 장애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감탄을 뱉은 적이 있어. 옆에 있던 동료에게 ‘00가 가만 보면 참 예쁘게 생긴 얼굴이야. 은근 귀엽다. 그렇지 않아?’라고 물었는데 그 동료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라니.

매일 어떤 바이러스에 걸릴까 걱정하는 대신에 나는 ‘이런 환경에 노출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면역력이 커지겠는 걸’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둘째로 나는 운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 나는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운전은 안 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기도했었어. 그런데 그 회사에서 나는 운전도 그냥 자동차가 아니라 휠체어들과 승객들을 같이 태울 수 있는 12인승 밴을 운전하고 다녔단다. 휠체어를 싣고 내리는 것은 밴 뒤에 전기로 움직이는 승강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 휠체어를 밴의 바닥에 앞뒤 네 군데 고정하고 벨트까지 휠체어에 채우는 일을 하다 보면 허리와 무릎을 몇 번이나 구부렸다 펴야 하고 여름에는 밴 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

하지만 나는 밴을 몰고 공원으로 바닷가로 그들과 다니면서 시드니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되었어.  

 

세 번째 나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어. 외국에서 25년 가까이 살면서 아직도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게 너로서는 이해가 안 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처럼 전업주부를 오래 하고 뒤늦게 사회에 뛰어든 그것도 한국인을 상대하는 직종이 아니라 오직 영어로만 소통해야 하는 현지 회사생활을 50이 넘은 나이에 시작하다 보니 영어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더라. 영어는 부딪치면서 성장하는 거 같아. 어쩔 수 없이 매일 영어로 소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었지.

 

네 번째 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어.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이기적인 taker들이 실은 천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천사 혹은 구세주를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거야. 자신들의 삶의 무게를 대신 지어줄 사람. 그 존재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아직 모르는 그들은 자신들처럼 머리를 굴리지 않고 자신의 짐을 대신 지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더라. 잔꾀를 부려서 유익을 취하려는 자기 자신들과는 다른,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착한 존재를 원하고 있는 거야. 그런 존재는 역시 나도 기다리고 있었지. 나도 그런 존재를 찾아 평생을 헤매고 있었잖아. 그런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는 결국에 발견했지만 말이야.

나는 이제는 사람이 두렵지가 않아. 못된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얼굴이 뒤틀린 사람이든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남편이 내게 했던 조언들,  ‘세상에 소울메이트는 없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춰 사람들 사귀는 편이 좋아.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야. 인간은 악해. 속마음을 다 보여줄 필요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해야지.’ 등등의 말에 나는 모두 동의했었어.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진심을 열고 사람을 대하는 그 어떤 순간에 갑자기 기적처럼 사랑이 피어나고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어.

 

순정아,

이제 이해하겠지? 왜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지 말이야. 이 일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두려움들을 없애버리고 내게 자유, 이 험난한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자유를 가져다주었단다.  

 

물론 이 일이 힘들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빼놓으면 안 되겠지? 돈을 번다는 것이 주는 보람은 정말 무시 못 하잖아. 아들을 내 힘으로 지원할 수 있고,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된 거 같은 보람도 있고. 그리고 아들과 일주일에 한 번 식사를 할 때 내가 내 카드로 결제를 하면서 더 이상 남편에게서 식사비나 주차비에 대한 짜증 섞인 코멘트가 나오지 않게 되었어. 그리고 나는 남편이 짊어진 가장의 무게를 조금쯤은 이해하게 되었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집에서 밥 차려주는 것으로 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어야 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그를 사랑으로 더 품어 주었어야 했다는 것도 깨달았지.  



 

순정아,

이 일을 하면서 인간이 정말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이 있어. 그런 순간들마다 기도를 하게 되는데 나는 기도의 효과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겪었단다.


순정아, 네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다 보니 마치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엄청난 소명 의식이 있거나 그런 것처럼 들리는데 실은 그렇지 않아.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착하다거나 그런 건 더더욱 아니야. 나는 그저 이 일이 주님이 주신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몇 가지 일들을 겪었고 주님이 이런 일을 내게 주셨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겠거니 그렇게 믿을 뿐이야.

그래도 내가 남들과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건 아마 부채 의식 때문일 거야. 나도 그들처럼 장애를 가지고 누군가 먹여주는 밥으로 생명을 유지해야만 하는 삶을 살 수도 있었던 거잖아. 그들이 내 장애인으로서 살 운명을 대신 짊어지고 사는 것일 수도 있잖아.

세상에는 육체적으로 멀쩡해서 마음껏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화가 나면 타인을 죽이거나 다투고 욕하고 사기치고 강간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잖아. 그런데 내가 보는 장애인들은 평생을 휠체어에 묶여서 평생 누군가를 때려본 적도 사기를 쳐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거나 뇌가 손상돼서 사기도 칠 수 없는 사람들이야. 그저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기껏 침을 뱉거나 욕을 하거나 괴성을 지르는 것뿐. 화가 나면 남을 해치는 대신 자기 몸을 물어뜯을 뿐.

그런데 나는 이 일 역시 주님이 내가 거쳐가야 하는 징검다리로 쓰시는 것 같아. 내 다음 일이 무엇이 될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시겠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악인을 손가락질할 때 진심으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 함께 동조할 수가 없어. 입양아를 폭력으로 죽게 하거나 술 마시고 욱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음주운전, 폭력, 사기 등등 세상의 모든 악을 보고서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라고 한탄하는 대신에 나는 ‘맞아, 사람이니까 저러지. 나는 운이 좋아 저런 상황과 환경에 놓여 있지 않았을 뿐이지. 나도 충분히 저러고도 남을 인간인데 주님의 은혜로 저런 환경에 놓여 있지 않았지’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한동안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괴롭기도 했어. 왜 이렇게 악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그냥 저기 길 위에 이름 모를 풀로 태어나서 어느 순간 사라져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이야.

오직 하나님은 신경 쓰셨을까? 나를 이름 모를 들풀로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거겠지? 그래서 인간의 삶을 주신 거겠지? 벌써 저녁 준비할 시간이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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