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아,
'지구상에서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과 평생 죽을 때까지 같이 사는 것'.
그것도 그냥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모두 공유하며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절대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로드를 걸을 때는 정말 알 수 없었단다.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이 신이 아니라 인간일진대 당연히 악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잖아. 그리고 부부는 상대방의 악을 외면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곁에서 그걸 직관해야 하는 위치에 있고.
남편이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다투고 화해하고 다시 다툰단다.
너도 남편과의 다툼을 매우 힘들어했었지. 솔직히 나는 네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결국 네 결혼생활이 암 덩어리를 키웠구나 싶으면서 네 남편을 원망했었단다. 물론 그것이 합당한 생각이 아니란 것은 금세 깨달아졌지만 말이야.
‘네 인생에서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을 평생 단 한 명이라도 사랑해 보아라’
라는 과제를 받고 우리 모두는 결혼생활에 뛰어들었는데 자신의 배우자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인 것 같아.
신앙을 갖고 나서 남편을 위해 기도할 때, 특히 2018년도에 참 많이 눈물을 흘렸단다. 남편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가 가엾어서 눈물이 줄줄 나왔어.
그가 가엾게 느껴지기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를 처음에 나는 남편에게서 찾았단다. 나는 그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혼자서 몰래 구글에다가 소시오패스 판단법, 어른 자폐 특성 그런 검색도 해볼 정도로 나는 남편을 매우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제 구구절절하고 찌질한 에피소드들을 풀어볼게.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뛰다가 넘어지는 일이 있었어. 보통 부모들이면 놀라거나 아이가 다치지 않았나 뛰어가 보잖아. 그런데 남편은 옆에서 웃음을 터트렸어. 몇 번 그랬던 것 같아. 그는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라도 본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리더라.
아이가 어릴 때는 급하고 당황스러운 일도 종종 생기잖아. 내가 거실이나 방에서 집안 어딘가에 있는 남편을 부를 일이 가끔 있었어.
“자기야, 급해. 빨리 와봐”
그렇게 말하고 남편을 기다리고 있으면 남편은 정말 여유롭게 천천히 걸어왔어. 내가 급하다고 말할 때마다 뛰지 않고 걸어오는 남편이 나는 참 이해가 안 갔어. 어느 날 나는 작심하고 그에게 물었어.
“도대체 자기는 왜 사람이 급하다고 불러도 뛰어오지를 않는 거야?”
“난 원래 안 뛰어.”
“…”
“불이 나도 안 뛸 거야?”
“불난 거 아니잖아.”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안 하던 짓도 하게 되고 취향도 바뀌는데... 사랑하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원래 자신의 습관이나 태도를 고수한다고? 그래서 나는 속으로 그를 판단했어.
‘그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십몇 년 전 어느 날 친구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어.
“네 옷에서 특이한 냄새가 나거든. 눅눅한 곰팡내 비슷한 거, 너희 집 햇볕도 잘 드는데 왜 그러지?”
냄새의 원인은 빨래 세제였어. 선물 받은 빨래 세제가 매우 대용량이어서 꽤 오랫동안 그 세제를 사용하고 있었어. 나는 당장 새 빨래 세제를 산 후 남편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었어. 남편이 말했어.
“알아. 그래서 내가 내 빨래는 다른 세제로 따로 하고 있었던 거야.”
남편이 자신의 옷은 따로 세탁기에 돌리겠다고 한지 거의 일 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 남편을 통해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 너무 놀랍더라. 아이가 천식이 있었을 때였으니 아이를 생각해서 혹은 내 일거리를 줄여주기 위해서 남편이 자기 옷을 따로 빨고 있는 거라고 나는 혼자 그렇게 착각했었어. 나는 당황해서 말했어.
“그럼 나한테 말 좀 해주지. 냄새가 나면 자기 옷뿐 아니라 내 옷에서도 냄새가 날 거 아냐. 나는 이제까지 그런 줄도 모르고 다녔어.”
남편은 별다른 대꾸 없이 어깨를 으쓱했어.
40일간 저녁을 안 먹는 금식기도를 했었어. 2018년의 일이야. 그때 내가 아픈 너를 생각하며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었어. 그래도 남편과 아이의 식사는 빠지지 않고 챙겨주었지. 엄마로서 아내로서 당연한 거 아니겠니. 물론 음식을 조리할 때마다 그 음식 냄새의 유혹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말이야. 그런 후 얼마 있다가 한국을 방문했었어. 친정 식구들과 가족여행을 갔을 때 엄마가 나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어.
“너 다이어트하냐? 왜 이렇게 말랐어?”
남편이 불현듯 울분을 토하듯 말했어.
“다이어트한다고 저 밥도 안 챙겨줘요!”
사실은 정반대였어. 그의 기억이 정확했다면 ‘근데 그렇게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항상 저녁밥은 해주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참 독해요.’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니니?
최근 몇 년 안에 기억나는 것들은 이런 거야.
아이가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어. 일주일에 한 번 아이를 만나러 시내로 가서 근처 식당에서 한 끼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우리의 일요일 루틴이었어.
내가 반찬을 싸다 준다고 해도 19살 남자아이가 혼자 밥을 제대로 챙겨 먹을 리가 없잖아. 나는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아이와 밥을 먹고 반찬을 조금 챙겨주는 것이 마음이 아팠어,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어.
아이와 식사를 하고 기숙사에 내려주는데 아이의 뒤통수를 보면서 남편이 한탄하듯 내뱉었어.
“다음 주에 여길 또 와야 해?”
나는 작게 남편에게 말했어.
“애 듣겠어. 다 들려.”
아들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사이 아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말했어.
“그런 말 D가 들으면 서운하잖아.”
남편이 말했어.
“못 들었어. D 이미 들어갔어.”
“아니, 아직 걸어가고 있었어. 걸어가는 뒤통수에 대고 자기가 그렇게 말했다고.”
남편이 입을 삐죽였어. 내가 말했어.
“들었던 못 들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혼자 공부하느라 밥 해 먹느라 고생하는데 매일 보러 오지는 못해도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거 힘들 거 없잖아.”
남편은 내 말에 서운해했어. 자신이 아들에게 그런 말을 뱉은 걸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지적한 내게 서운해했어. 남편이 말했어.
“또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 너는 나를 꼭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아들이 운전을 시작하면서 남편이 아들 옆에 타고 내가 뒤에 타고 시내로 나간 적이 있었어. 여전히 운전이 서툰 아들은 남편이 옆에서 해주는 조언을 들으며 운전을 했어. 공원 어딘가로 가서 주차 자리를 찾는데 갑자기 GPS 먹통이 되자 아들이 당황했어. 뒤에 차는 따라오지 아들이 당황하고 놀란 마음에 “어디로 가? 어디로?” 물었는데 남편이 답이 없으니 아들이 목소리를 높여 다시 물었어. “어떻게? 나 이제 어디로 가?” 남편이 소리쳤어.
“나도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여기 처음이야!”
내가 얼른 나섰어.
“D야, 저 앞에 왼쪽에 차를 세워. 세우고 GPS로 목적지 다시 넣고 출발하면 돼.”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서 아버지가 옆에 탄 건데... 아는 길만 다니는 게 운전이 아니잖아. 길을 모를 때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직진이든 가다가 정차할 만한 곳에 정차해 놓고 GPS를 다시 보면 되잖아.
남편은 지하 주차장에서 나올 때 GPS가 빨리 오른쪽 왼쪽 어디로 가야 할지 안내를 못 해주면 항상 초조해했어. 신호등에서도 우회전이 아닌데 우회전 길에 들어서면 여기가 아닌데 하면서 답답해했고. 길을 잘못 들어섰으면 조금 돌아가면 되잖아. 어디로 가야 할지 우물쭈물할 게 아니라 어디로든 간 후에 조금 돌아가면 되잖아. 그런 운전하는 방식도 나와 남편은 참 다르더라.
운전을 두려워하던 내가 회사에서 처음 12인승 밴을 운전하기 시작했던 때에 남편에게 몇 번 투덜거렸었어. 운전 싫은데 요즘 맨날 운전한다고. 그것도 버스처럼 느껴지는 밴을. 그런데 그렇게 말을 끝내버리면 남편이 미안해할까 봐(아내가 돈 버느라 힘들다는 불평을 듣는 남편 마음이 편할 리 없잖아) 말을 덧붙였어.
“그래도 요즘 운전 실력이 늘었어. 이제 안 떨리는 편이야. 나중에 캠핑카도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아. 캠핑카 사이즈가 내가 운전하는 밴보다 작을걸?”
남편이 말했어.
“그럼 내일 우리 00로 가는 거 너가 운전할래?”
주말에 멀리 갈 곳이 있었거든. 평일에도 운전해서 힘들다는 아내에게 그래서 주말에도 운전하라고? 내 말에 대한 보통의 남편 반응이라면 아마 ‘아이고 고생하네.’ 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 말에 대한 남편의 해석은 남들과 달랐어. 그의 해석은 ‘당신 운전 스킬이 늘었다고? 그렇다면 내일 장거리 운전도 너가 하면 되겠군.’ 이런 거였지.
한 번은 쇼핑하면서 그 물건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단다. 살까 말까 고민하는 내게 남편이 말했어.
“사, 너 돈 잘 벌잖아.”
그 짧은 문장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이지만 그 말을 듣는 상황에서는 이상하게도 그 문장이 유쾌하게 들리지 않더라.
내가 이 직업을 가지기 위해 자격증을 따러 학교에 다닐 때 3주간 요양원 실습을 했었어.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간단히 아침 차리고 남편 도시락 싸고 내 도시락 싸고 요양원에 가서는 노인들 목욕에 패드(기저귀) 갈고 변이 묻은 몸을 닦고 식사를 먹이고 정말 육체노동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서 매일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힘들었었어.
그런데 새벽에 나가는 나를 그래도 남편은 배웅하고 싶었나 봐. 현관문에서 나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런데 나는 바쁘니까 나가려다가도 까먹은 게 있어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그렇게 되더라고. 남편은 그런 나를 보더니 혀를 차고 한숨을 쉬더라. 뭘 그렇게 깜박깜박 잊어버리나 싶었나 봐. 자기는 나를 위해 현관문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야.
실습이 끝나고 내가 말했어.
“3주간 실습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돈도 안 받고 하는 실습 너무 열심히 했지.”
남편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했어.
“그때 너 집에 오면 맨날 잠만 잤잖아.”
그때 남편이 퇴근해서 들어오는 것도 못 보고 자다가 깬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내가 고생하는 걸 다 지켜본 남편이라면 ‘맞아, 그때 너 너무 힘들어서 갔다 오자마자 쓰러져서 잤었지’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잠만 잔 걸 힐난하는 태도로 말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더라.
내가 일을 하게 된 걸 알게 된 시어머니는 내게 말했어.
“심심해서 일하는 거지?”
나는 그냥 웃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도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
한 번은 모임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 반응은 대충 비슷했어.
‘대단한 일 하시는 거예요. 아이고, 그런 일을 하시는 거구나.’ 등등.
옆에서 듣던 남편이 말했어.
“물론 이 사람이 꼭 돈을 벌어야 상황은 아닌데요….”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남편은 은근히 내비치고 싶어 했어. 그런 말을 하는 남편의 마음이 이해는 되면서도 왜 꼭 그렇게 체면이나 자존심을 챙겨야 하는지 솔직하지 못한 남편이 싫었어. 사람들 앞에서는 돈 때문에 자신의 와이프가 일하는 것은 아니라고 포장하고 싶어 하는 그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처럼 보였어.
그런 남편은 내가 일이 힘들다고 말할 때는 아무 대꾸가 없다가 내가 오늘 바닷가에 장애인들 데리고 피크닉 갔다 왔다고 말하면 ‘좋네. 그런데도 다니고..’ 라고 말했어. 장애인이 오늘 내 얼굴에 침 뱉었다고 말하면 왜 남편은 아무 말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반응이 없다가 내가 장애인들이랑 영화 보고 왔다고 하면 ‘영화도 보고 돈도 벌고 좋네’ 라고 말하는 건지 나는 이해가 안 갔어. 남편의 그 꽁꽁 싸매고 있는 자존심이 나는 너무 오만하고 철이 없다고 느껴졌어.
그래서 순정아, 남편에게 솔직해지자고 말했단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심심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 벌기 위해서 일하는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남편에게 이 말도 덧붙였어.
“자기야, 나 전에 실습할 때 자기는 현관에서 나를 배웅하는 게 나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지? 새벽에 현관문을 열고 나를 배웅하는 그런 당신이 나를 써포트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 했지. 그런데 말이야. 진짜 나를 도와주고 싶었으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종종거리며 준비하는 아내를 위해 자기가 아침도 차리고 자기 도시락은 자기가 쌌겠지. 당신은 그렇게 진짜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은 쏙 빼놓고 현관에 서서 나를 배웅하는 정도의 제스처로 나를 서포트 해주고 있다 믿고 싶었던 것 같아. 실은 당신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을 고른 거야. 왜냐하면 그게 덜 힘들고 폼은 더 나니까. 사실 당신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그렇기는 해. 남을 위해서 무엇을 행해야 할 때 그 순간에 자신의 최소 희생, 최소 투자를 오토매틱으로 계산해서 선택하지. 돕긴 돕지만 내가 덜 힘든 걸 선택하는 거지.”
순정아,
나는 남편이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가 겪는 감정과는 선을 긋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듯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해 보려고 많은 세월 노력했단다.
사소하게는 외식할 식당을 고르는 문제부터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것이나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선택들에서 남편은 모든 결정권을 내게 쥐여주었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가 남편이 가장 내게 많이 한 말이었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조사와 대화와 만남들이 필요하잖아.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내가 보고(?)를 하면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거나 혹은 ‘근데 00라는 것도 있지 않나…’ 지나가듯이 한 마디 던져. 그러면 나는 헐레벌떡 그런 게 있었나 싶어서 또 열심히 알아보고 그랬어. 그래서 나는 착각했어. 남편이 내게 결정권을 주고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 남편은 나를 리서치 담당으로 붙여놓고 자신은 그 결과를 보고 받은 후 그 결과에서 자신의 선호도에 맞는 선택을 하는 거였어. 보통은 자신의 선택대로 되지만 그게 나의 선택과 다르면 남편은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어필하는 대신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스타일이었어. 남편의 그런 그의 스타일을 깨닫는 데도 참 오랜 시간이 걸렸지. 그런데 그 모든 선택에서 남편이 제일 처음 배제하는 것이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단다.
나는 누가 내 성격이나 행동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하면 내게 그런 면이 있었나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하면 그걸 고칠까 고민하거든? 내게 그런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속상해서 심리상담 영상도 보고 책도 찾아보고 내게 그렇게 조언해 준 사람과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눠보는 편이야. 실제로 그래서 내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과 가장 친하게 되기도 해.
반면에 남편은 누군가 자기에 대해 말을 하면(그게 칭찬이 아니라면) 그 말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저 사람은 참 무례한 사람이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가 보군. 나도 저 사람이 싫어’ 라고 결론을 내리는 쪽인 거야. 그런 남편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그를 비난했어.
‘음식도 달고 기름지고 말초적인 맛의 음식만 좋아하지아. 조금이라도 씁쓰름한 채소는 절대 한 입도 입에 넣지 않잖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좋은 말이 들어와도 내 입에 달콤하지 않으면 다 뱉어버리는구나. 과연 입맛처럼 아이 같은 사람이구나’
남편과 살면서 나는 남편이 상대방의 고통이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그의 행동과 태도와 말을 속으로도 겉으로도 많이 정죄하고 비판했단다.
순정아,
그런데 남편에 관한 그 모든 비난과 비판과 정죄와 판단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잘못된 것이었는지 나는 그걸 최근에야 깨달았단다.
아이가 넘어진 게 웃겨 보일 수도 있지. 남편은 말로 떠드는 토크쇼를 보다가 웃는 일보다 넘어지고 자빠지는 코미디를 보면서 웃는 편이었으니 학습된 웃음이 터져 나올 걸 수도 있잖아.
내가 급하다고 해도 안 뛰었던 건 내 말에 신뢰가 가지 않아서 일 수도 있잖아. 급하다고 가보면 별일 아니었었나 보지.
주말에 나보고 운전을 하라고 말한 것도 그 당시 남편이 허리가 좀 안 좋았었는데 그래서 마침 허리도 아픈데 잘됐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운전할 때 남편이 특히 당황하는 것도 실은 히스토리가 있어.
남편은 어릴 때 시장에서 길을 잃어버렸었어. 남편에게 들었는데 어머님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아이고. 네 아버지한테 죽었다’ 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대. 엄마 입장에서야 당연히 아이를 잃어버리면 가슴이 철렁하고 눈앞이 까매지면서 얼마나 걱정스러우셨겠어. 그런데 남편에게는 어머님의 “아이고. 네 아버지한테 죽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라”라는 말만 기억이 나고 그 말속에서 어떤 서운함을 느꼈었나 봐. 남편은 그 말을 내게 세 번 정도 했는데 남편이 그 에피소드를 전할 때의 그 이야기의 초점은 자신이 시장에서 길을 잃어버렸었다가 아니었어. 어머님이 하신 그 대사가 남편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었지.
아무튼 남편의 그 이야기를 통해서 남편이 길을 못 찾는 것에 조급함이 있는 것이 어릴 적 엄마 손을 놓치고 길을 잃은 트라우마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었어.
내가 힘들다고 말할 때 그 힘듦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지. 내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그게 자신을 비난하는 말처럼 들린다고 남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간단한 실수도 정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같이 사는 아내가 무엇 때문에라도 힘들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본인 자존심을 긁는 것일 수 있지. 게다가 자식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 방식이 엄격했던 시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남편이 실수를 지적받는 것이나 자신에 대해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남보다 더 쉽게 더 많이 상처받는 게 당연하잖아. 자신은 남에게 조언도 안 하고 항상 예의를 차리는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사람을 남편은 무례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는 거지.
어머니가 남편과 전화 통화하다가 남편에게 생일 뒤늦게 축하한다고 잊어버렸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 남편이 이렇게 대꾸하더라.
“언제는 뭐 기억했어?”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문장이었지. 매번 생일을 챙겨주다가 생일 당일날 까먹고 다음날 생일을 챙기면서 잊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내게 남편은 말했었어.
“언제는 내 생일 챙겨줬어?”
언제는 자기 생일 챙겨줬냐는 그 말은 친정 식구들과 가족여행을 갔을 때 남편이 불쑥 토로하듯 내뱉은 말, “다이어트한다고 저 밥도 안 챙겨줘요.” 와 같은 맥락의 말이지.
남편은 내게 무엇인지 모를 서운함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나를 공격 혹은 지적하고 싶었던 거야. 실제로 아내가 다이어트하면 밥을 잘 못 얻어먹는 남편이 있을 테니 사실과 상관없이 남편은 대부분의 남편들이 불만을 터트리기 딱 좋은 말을 가져다 했던 거야. 사실과 상관없이 맥락상 딱 꺼내기 좋은 불만을 토로한 거야.
남편이 불쑥불쑥 불만을 터트리는 그런 말은 시아버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러 오셔서 하신 말과 묘하게 겹치는 말이었어.
오래전에 뉴질랜드를 방문한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내의 한식당에 간 적이 있었어.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을 궁금해하실 것 같아 모시고 간 거야.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시아버님이 종업원에게 물었어.
“여긴 뭐가 맛있어요?”
종업원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어.
“다 맛있어요.”
시아버님이 퉁명스럽게 말했어.
“뭐 다 맛없더구먼.”
나는 당황했어. 한국에서 오신 시아버님이 뉴질랜드에서 처음 간 한국식당인데 그 식당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왜 다 맛없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종업원이 샐쭉한 얼굴로 주문을 받고 돌아갔는데 내가 더 놀란 건 어머님도 남편도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이었어.
당시 시아버님이 급작스럽게 내뱉은 그 말은 남편이 불현듯 토해낸 “언제는 내 생일 챙겨줬어?” 와 “다이어트한다고 저 밥도 안 챙겨줘요.” 등과 같은 결을 지닌 말이었어. 그 말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지고 물으면 결국에는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이 드러나고 사실이 아닌 말이 되지만 그 말을 뱉을 때의 남편의 심정은 서운함과 억울함 그리고 피해의식이 믹스된 감정이었던 거야.
순정아,
다행히도 나는 이제 남편이 자신을 ‘피해를 당하는 자’로 여기는 원인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상처와 애정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남편이 내게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면 그런 서운함이 폭발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겠지. 아무리 불쌍한 사람을 봐도 남편은 별로 그 사람을 불쌍해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그 이유도 이해가 가. 그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니까.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쌍한데 누가 누구의 아픔을 안타까워하겠니. 더구나 자신은 사람들에게 이해와 동정을 구하면서 힘들다고 티도 내지 않으니 말이야.
남편이 그동안 저런 말과 행동들을 했던 것이 실은 내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나는 인정하게 되었어. 남편은 쉽게 상처를 받고(나는 그것을 마음이 작은 사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석했었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외로운 소년이었는데 어쩌다 MBTI 중에서 ㅑNFJ의 아내를 만나서 참 고생이 많았어. 나는 누군가 겪은 일을 묘사만 해도 그 현장에 내가 있었던 것처럼 감정이입이 용솟음치고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모든 걸 꼼꼼하게 계획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
내게는 화가 나면 그 즉시 화를 터트리는 나쁜 버릇이 있었어. 지금은 그걸 고쳤지만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편에게는 내가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 결혼 초기에 남편은 종종 말했어.
“너 우리 아버지랑 너무 닮았어.”
그 말은 그냥 스쳐들을 수 없는 그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가 모두 담긴 말이었던 거지.
순정아,
나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남편을 내 입맛에 맞게 고치고 바꾸고 꾸밀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왜 남편의 장점은 공짜로 누리면서 그의 단점들은 하나같이 비판하고 외면하고 핍박했을까? 나도 수많은 단점을 가진 주제에 왜 남편이 나와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다고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왜 그가 사랑이 부족하다고 함부로 판단했을까? 매일 아침 일어나 가족들을 위해 일터로 나가는 일을 몇 십 년간 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잖아. 나처럼 표현하고 나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그는 그의 방식으로 최선의 사랑을 실천하고 살고 있는 것이잖아. 교회는커녕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았던 사람이 세례까지 받았고 싸우고 난 후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남편이 되었잖아. 기적이 그런 게 아니고 무엇이 기적이겠니.
그런데 순정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이제는 남편의 단점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남편의 단점이 하나 있어.
남편은 자신이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습관이 있어. 몇 년 전에 한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그러면 기억이 안 나나 보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데 불과 5분 전에 자신이 내뱉은 말도 남편은 결코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우겨. 남편의 말에 따르면 내가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 말을 꾸며내서 자신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거야. 나는 남편의 그 점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어. 너무나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거야.
한국에 갔을 때 언니네 집에서 자게 되었는데 언니가 방에서 잘 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미세한 전기신호 같은 소리인데 경비실에 따져보기도 했대. 그러면서 마침 우리가 출국 전날 자신의 집에서 묶게 되었으니 우리 보고 그 방에서 자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남편과 언니네 집으로 자러 가면서 그에게 그 얘기를 했어. 방에서 나는 소음과 그래서 언니가 나보고 그 방에서 자보라고 했다고. 그 말을 들은 남편이 말했어.
“그게 어느 방인데?”
“언니가 원래 자던 방.”
“그럼 난 거기서 안 자야지.”
몇 시간 후에 언니네 집에 도착해서 언니에게 “00는 그 방에서 안 잔대.”라고 했더니 남편은 나를 외계인 보듯이 보더라. 자기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거야. 자기는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대.
부부싸움을 할 때도 그건 마찬가지야. 언쟁을 하다가 남편이 “네 아들이나 그럼 챙기셔. 밥 안 해도 좋으니까 그런 걸로 생색내지 말고.”라고 말했는데 내가 왜 그렇게 말하냐니까 펄쩍 뛰는 거야. 내가 도대체 언제 그런 소리를 했냐고. 방금 그렇게 말했다니까 아니래. 내가 말을 지어내는 거래. 30년 가까이 그렇게 내가 지어내는 말 들으며 억지로 미안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지긋지긋하대. 더 이상 내게 자기가 하지도 않은 말을 덮어씌우는 게 지긋지긋해서 못 참겠대.
한 번은 대화 중에 혹시 남편이 이번에도 자신의 말을 부정할까 싶어서 몰래 휴대폰 녹음버튼을 눌렀어. 근데 그 대화 중에도 그러는 거야. 내가 남편의 말을 되물으면서 왜 그렇게 말하냐고 물으니까 자기가 언제 그렇게 말했냐고 하더라. 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냐니까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대.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나를 이상한 여자로 몰고 가는데 정말 억울해서 미치겠더라. 그래서 그에게 녹음한 것을 들려줬어.
순정아, 그가 어떤 반응이었을 것 같니? 녹음을 듣더니 인정하더라. 자기가 한 말을 인정하면서 대신에 자신의 말이 들리는 것과 같은 그런 의미는 아니래.
남편이 불쑥 터트리는 그런 말은 욕도 아니고 그렇게 나쁜 말도 아니야. 하지만 평소에 남편이라면 절대 내뱉지 않을 그런 말이 불쑥불쑥 남편에게 터져 나와. 조금은 본능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속 안에 못된 마음이 드러나는 말들. 마치 사악한 작은 꼬마 마귀가 남편 속에서 불쑥 내뱉는 원초적인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들. 그런데 남편은 정말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가 000라고 말했어’ 라고 말하면 진짜 너무 놀라고 당황해하고 억울해하는 거야. 남편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순정아, 내가 왜 남편의 이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심하게 고통을 받아왔는지 네게 설명해야 할 부분이 있어.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고 하지? 돈, 명예, 권력 중에 우선순위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고. 나는 아마 그중에 명예가 중요한 사람인가 봐.
어릴 때부터 나의 발작 버튼은 억울함이었어. 나는 오해받는 게, 내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왜곡되는 게 제일 괴로웠어. 어렸을 때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오해를 받아서 수모를 당하는 장면조차 보기 힘들었어. 억울한 걸 제일 못 참는 내가 남편을 만나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된 거야. 친구들 사이에서 말 잘한다는 소리 들었던 내가 남편 하고는 대화가 안 되고 남편에게 말을 이상하게 하는 여자로 취급당하는 거야. 그러니 내가 억울하고 답답하지 않겠니?
나는 남편이 말주변이 없는 사람인 걸 알면서도 결혼했어.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말다툼을 할 때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하면서 내게 지난 30년의 말다툼의 책임을 모두 돌려버리는 그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더라.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정말 심장을 꺼내서 내 결백을 주장하고 싶어서 미치고 팔짝 뛰고 울고불고 난리였을 거야. 그동안 나는 남편과 이 문제로 다툴 때마다 사람들이 왜 자살이라도 해서 결백을 증명하는지 이해가 갔을 정도였어. 처음 겪는 것이 아닌데도 매번 새로 겪으면 새롭게 미치고 팔짱 뛸 노릇이 되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더라.
‘30년 동안 반복되는 싸움이 정말 지긋지긋해!’
라고 남편이 내뱉은 그 말은 얼마 전 다툴 때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어. 그는 내가 했던 말을 무의식 중에 똑같이 말하고 있었어. 그동안 나는 남편이 조금쯤은 내게 미안해한다고 생각했었어. 자신이 한 말을 잘 기억 못 해서 말이야. 그런데 그건 나만의 완벽한 착각이었어. 그는 정말로 내가 거짓말을 하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자신이 당해왔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거야.
그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더라. 이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조용히 그에게 물었어.
“나한테 화가 나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감정이 격해져서 우기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남편이 말했어.
“그래.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지 지긋지긋하다.”
남편의 억울해하는 얼굴을 보면서 과거의 일이 떠올랐어. 10여 년도 더 오래전 일이. 차 안에서 둘 사이에 조금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던 때 내가 라디오 채널을 돌리려고 다이얼에 손을 댔을 때 채널을 돌리지 말라는 듯 남편이 내 손을 탁 쳐냈었어. 나는 손을 움츠렸지.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내가 그에게 말했어.
“근데 아까 차에서 내가 라디오 채널 돌리려고 했는데 왜 내 손을 쳤어? 그거 좀 기분 나쁘던데?”
남편이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어.
“왜 또 그래? 내가 언제 너 손을 쳤다고 그래?”
순정아, 그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는 깨달았어. 이건 이 사람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그의 가장 큰 손상이라는 것을. 손상. 그래, 그렇게 이름 붙일 수밖에 없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치명적인 손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나의 치명적인 손상이 있는 것처럼 내 남편도 그 손상이 있고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 깨달아졌어. 그건 포기가 아니라 인정이었어.
어쩌면 남편의 마음 안에는 본인도 모르는 심술 맞고 본능적인 그것이 숨어있는지도 몰라. 이성으로 자제심을 발휘하며 평소에는 예의 바르고 착하다는 말을 듣는 남편이 가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안에서 숨어있던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어.
서운할 때나 화날 때나 혹은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목소리를 내며 터져 나오는 그것을 또 다른 자아라고 부를 수도 있고 남편 안에 숨어 사는 못된 꼬마귀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오래전 기도로 내 안에 숨어있던 귀신이 나갔던 것처럼 어쩌면 남편에게 숨어 있는 그것이 남편에게서 떠나갈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함께 기도하자고 남편에게 말했어. 우리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앉아서 우리의 다툼을 기도로 마무리했어. 남편이 그런 말을 했냐 안 했냐로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우리 가정에 사랑과 평화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만 진실하게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어.
설령 다시 남편이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는 순간이 와도 “그래? 난 그렇게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보네”라고 웃으며 말할 여유가 내게 생겼고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감사한 일이 되었어.
신앙을 가지고 나서 내가 달라진 게 있다면, 네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거야. 겨우 이거. 자살이라도 해서 내 억울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그래? 그렇다면 뭐…’라고 어깻짓으로 넘겨버리는 여유를 갖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단다.
예전 회사에 있던 장애인인 그녀는 항상 직원들을 때렸단다. 체구도 작고 주먹으로 펀치를 날리는 게 아니라 들고 있던 여러 도구들이나 자신의 손으로 내 등이나 팔 등을 찰싹 때리는 것이니 아프지는 않았어.
그녀는 스스로 밥을 먹을 정도의 지능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밥을 먹여주었는데 그녀는 밥을 먹여주는 나를 자신의 놀고 있는 손으로 찰싹 때리곤 했어. 그러면 나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피하기도 하고 단호하게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지. 그런데 신기한 게 그런 그녀가 전혀 밉지가 않았어. 분명 그녀한테 맞았는데 내 감정에는 분노나 화가 생기지 않았어. 그녀에게 왜 때리냐고 따지지도 않고 일하면서 오늘 또 맞았네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어.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는 건 그녀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니까. 그건 그녀의 장애 때문이지 그녀가 나를 미워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니까. 하지만 새로 채용된 직원들 중에는 간혹 그런 것들을 못 받아들이고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
그래서 내가 남편을 장애인 취급하는 거냐고? 그래서 남편을 이해하게 된 거냐고?
아니. 나는 모든 인간을 장애인 취급하는 거야. 우리 인간 모두 어떤 종류의 장애든 장애가 있으니까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그 장애를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장애조차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깨닫게 된 거야.
나의 남편이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너무나도 악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처럼.
그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 사랑이겠니. 오랜 세월 나는 남편의 손상을 괴로워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기 바빴지. 결국 오랜 세월 나는 남편의 악을 한탄하다가 결국에는 마침내 내 악을 깨닫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걸 깨닫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셨어.
순정아,
나는 너의 가장 행복했던 때를 알아. 너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너와 가족들 모두 소망을 품고 똘똘 뭉쳐있었을 때. 매일 가족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던 그때 너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
“AK, 솔직히 요즘처럼 행복했던 적이 없어. 우리 가족이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어. 매일 예배를 드리면서 가족들이 사랑으로 서로를 위해주는데 이게 나는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감사해. 이런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정말 나는 몰랐어.”
네 말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 허탈했어.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다 죽어 나가는 상황이 되어서야 자신이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고 있던 자아와 자존심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진정 불쌍히 여기게 되는 건가 싶었어.
나는 남편이 자기가 한 말을 안 했다고 계속 고집해도 좋으니까 그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잖아. 서로가 잘났다고 다투면서도 우리 내면 깊은 곳에 품고 있는 진실이 바로 그런 사랑이잖아.
남편을 위한 내 기도는 매번 비슷해. 아주 유치하고 직설적으로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청하지.
“하나님, 제 남편에게 폭포수 같은 사랑을 쏟아부어 주세요. 남편이 이런 사랑이 너무 과분하다고 제발 그만 달라고 사정할 만큼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셔서 그가 받고도 받고도 너무 넘쳐서 줄줄 흘러 여기저기로 주변 사람들에게 그 사랑이 다 흘러 들어가도록 그런 사랑을 남편에게 부어주세요. 그가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사랑을 맛보게 해 주세요. 사랑으로 충만하고 가득 차져서 가끔씩 찔러대는 세상의 가시쯤 손으로 툭툭 털어버리고 여유롭게 웃는 남편이 되도록, 그리고 세상에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떠지도록 그렇게 사랑이 샘솟아 나는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정아,
네게 편지를 쓰면서 남편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었단다. 남편에 대해 이런 것까지 네게 말해야 하나 싶은 것도 있었으니까. 나는 너와 삶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리고 내 삶을 만들어 가신 하나님을 증거 하고 싶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받는다면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그런 고민이 들었지. 그런데 최근에 나는 이 죄책감의 뿌리가 선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우리의 죄책감이라는 것이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는 일을 방해할 수도 있는 거잖아. 들에 핀 잡초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살 수는 없는 거잖아.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신 것도 아닐 거야.
고린도후서 12장 9절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약한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자랑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물러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나는 믿어.
순정아,
말기 암 진단을 받고도 너는 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계속 일했지. 병원 치료를 병행하며 풀타임에서 파트타임으로 바꾸고 그래도 생활비는 벌어야 한다고 계속 일을 하는 너를 보고 얼마나 존경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
평소에 네가 요양원에서 일하며 생긴 일들을 말할 때 나는 네 얘기에 열심히 맞장구는 쳐주었지만 요양원이란 곳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었어. 그래서 시드니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요양원에 3주간 실습을 하러 다녔을 때 네 생각이 많이 났어. 마지막으로 네게 그때 요양원에서의 일을 얘기해주고 싶어. 갑자기 길에서 급사하지 않는 이상 보통의 우리들이 생을 마감하게 되는 그곳 말이야.